‘시스템’이 작동하는 로컬 2.0 시대를 기대하며

지역력 탐구생활 - 창업 권하는 사회를 넘어, 살아내는 로컬을

by 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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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만큼 보이지 않는 ‘국가창업시대’의 역설


정부가 테크 4,000명, 로컬 1,000명이라는 대규모 창업 인재 발굴 계획을 내놓았다. 성장의 과실이 대기업·수도권·경력자에 집중되고, 중소기업과 지방, 청년층까지 확산되지 않는 ‘K자형 성장’이 고착화하고, 안정적인 소수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을 벗어날 키워드로 ‘모두의 창업’프로젝트다.


숫자만 보면 야심 차고, 문장만 보면 비장하다. 그러나 현장의 반응은 그만큼 뜨겁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는 이미 비슷한 장면을 충분히 보아 왔기 때문이다.

단기 공모사업의 반복, 성과 중심의 사업 설계, 지원 종료와 함께 사라진 팀들. ‘국가창업시대’라는 화려한 선언 뒤에 가려진 이 피로감은, 정책이 다시 한 번 과거의 그림자를 밟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조심스러운 불안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묻는다. “이것은 창업 권장 정책의 다른 이름 아닌가?” 로컬크리에이터, 지역가치 창업가 등 이름만 달라진 지원 정책을 거쳐 온 지역 현장에서는, 이번 ‘로컬창업 1,000명’ 역시 단순한 숫자 채우기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차원의 시도인지부터 냉정하게 분간하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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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해도 괜찮다’는 말의 무책임함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정책이 주는 ‘낭만적 신호’다. 이제 우리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 실패는 ‘용인’해주는 것이 아니라,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정부는 “실패해도 괜찮다”는 메시지와 함께 재도전 펀드, 도전·실패 경력서 등 여러 장치를 내놓고 있다. 방향 자체는 ‘실패의 자산화’를 지향하지만, 자본과 안전망이 약한 지역 청년·생계형 창업자에게 실패는 여전히 훈장이 아니라 삶의 기반을 흔드는 사건이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낭만적 구호가 아니라, 실패 확률을 구조적으로 줄이고 실패 이후에도 다시 설 수 있게 하는 ‘관리 가능한 실패 시스템’이다. “실패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정직하게 전제하되, 그 확률을 구조적으로 최소화하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버티는 힘(Resilience)’을 길러주는 것. 그것이 정책이 해야 할 진짜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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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는 ‘선(Line)과 면(Surface)’을 보는데, 정책은 ‘점(Point)’만 찍는다


사실 ‘로컬’에 대한 담론은 이미 연구 영역에서 상당히 깊어져 있다. 국토연구원의 「로컬리즘 기반 지역발전 전략」 보고서는 로컬리즘을 단순한 창업이 아닌, ①장소성 기반 가치 ②로컬 주체 간 협치 ③자립적·자생적 자본 순환 ④지역다움의 창출로 명확히 정의한다. 양양의 서피비치나 공주, 군산의 사례처럼 하나의 점(Point)에서 시작된 실험이 선(街路)과 면(생활권)으로 확장되며 상권과 일상 공간을 형성하는 과정도 이미 포착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책의 시계는 이런 연구의 걸음을 따라가지 못한다. 연구가 ‘면 단위의 생태계’와 ‘자본의 순환’을 이야기할 때, 정책은 여전히 가게 개수, 창업자 수, 매출 같은 지표로 환원 가능한 ‘점’들을 센다. 중요한 것은 점이 아니라, 그 점들이 연결되어 만들어낼 ‘플레이스메이킹(Placemaking)’인데, 정책은 아직도 이를 단순한 ‘상권 조성’ 정도로 이해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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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 정책의 진화: 이제는 ‘2세대’로 넘어가야 할 때


굳이 로컬 정책의 흐름을 나눠 본다면, 지난 10년은 개념을 정의하고 상권을 패키징 하는 ‘1세대’였다. 로컬크리에이터라는 단어를 알리고, 상권 르네상스 사업을 시작한 시기였다. 지금 정부가 발표한 ‘국가창업시대’와 ‘글로컬 상권’은 이를 국가 전략 수준으로 끌어올린 ‘1.5세대’에 가깝다. 관광·문화·창업을 결합하려는 시도는 확실히 전진한 지점이다.


그러나 연구와 현장이 말하는 로컬의 본질—정주성, 자본 순환, 생태계—을 정책이 충분히 반영했다고 보기엔 아직 간극이 크다. 이제 필요한 것은 ‘2세대 로컬정책’이다. 2세대는 단순한 지원이 아니라 투자 구조, 민간 디벨로퍼 모델, 정성적 KPI, 데이터 기반 운영 시스템을 갖추는 단계다. 즉, ‘사람 수’가 아니라 사람이 자랄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하는 단계다.



지원 방식의 혁신: ‘중간지원조직’을 넘어서


2세대로 가기 위한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누가, 어떻게 지역 창업팀을 키울 것인가?” 그동안의 중간지원조직은 행정적 관리에 가까웠다. 그러나 로컬 창업은 행정이 아닌 치열한 경영 기능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벤처스튜디오형 지역경영회사’ 모델을 제안한다. 민간 차원의 연대와 연속성을 가진 지지 기반을 만들자는 얘기다.


돈을 지원해 줬으니 “알아서 성공하라”고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경영회사가 자본, 인력, 시스템을 창업팀과 공유하며 ‘공동 창업자’의 마인드로 함께 뛰는 구조다. 이 구조 안에서만 창업팀의 실패 확률은 통제 가능한 범위로 들어오고, 실패 이후에도 지역 안에서 다시 시도해볼 수 있는 두 번째·세 번째 기회가 생긴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말이 비로소 현실이 되는 것은, 이런 시스템이 있을 때뿐이다.


낡은 지도를 버리고 ‘로컬×테크’의 뿌리 산업을 심자

시스템과 함께 산업을 바라보는 눈도 바뀌어야 한다. 로컬은 더 이상 전통적 제조·농수산·관광이라는 고정된 틀에 머물지 않는다. 현장은 이미 빠르게 테크와 융합하고 있다.

농업은 데이터 분석(Agri-Tech)과 만나고, 해양은 스마트 센싱과 결합하며, 지역 기록 문화는 AI 아카이빙으로 재탄생한다.

이는 중앙 정부가 일괄적으로 나누는 산업 분류표로는 담기지 않는다. 이제 각 지역이 스스로 “우리 지역은 이 자원(X)과 이 기술(Y) 조합으로 승부하겠다”라고 고유의 산업 지도를 그려야 한다.

이때 로컬창업 1,000명은 단순한 인력 양성이 아니라, 각 지역이 자기 언어로 그린 뿌리 산업 위에 사람을 어떻게 배치하고 키울 것인가의 문제로 재해석된다.


공정한 경쟁의 설계: 속도가 아니라 ‘순환’을 보라

평가와 경쟁의 방식도 2세대 문법에 맞춰야 한다. 인구와 산업 기반에 따라 ‘유형별(Type)’ 리그를 만들고, 지표 역시 “얼마나 빨리 성장했는가”가 아니라 “지역 자본이 지역 내에서 몇 번이나 순환했는가”, “얼마나 오래 살아남았는가”를 물어야 한다.

누군가를 탈락시키는 오디션이 아니라, 우수 모델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고 공유되는 구조가 새로운 경쟁의 룰이 되어야 한다. 속도 중심 경쟁에서 ‘순환·잔존 중심 경쟁’으로의 전환, 이것이 로컬정책 2세대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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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가 보여주는 가능성: ‘생태계로서의 로컬’


이 관점에서 제주가 진행 중인 ‘지역형 로컬크리에이터 경제 모델’ 실험은 의미가 크다. 제주는 단순 상권 조성이 아니라 앵커기업 중심 로컬 생태계 육성, 로컬 전용 펀드, 마을 단위 프로그램, 정주 환경 구축 등을 포함한 복합 생태계 전략을 시도 중이다.

이 실험은 ‘가게 몇 곳이 잘되느냐’가 아니라 ‘제주라는 조건 위에서 어떤 산업 조합으로 살아남을 것인가’를 묻는 장기 전략이다.


아직 진행형이지만, 이 실험은 분명 국가 로컬 정책의 방향타 역할을 할 수 있다. 개별 창업자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섬, 기형적 산업구조의 한계 등 특수한 조건 위에서 그들이 뿌리내릴 토양까지 함께 설계하는 모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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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를 넘어, ‘시스템’이 작동하는 토양을 위하여

결국 로컬창업 1,000명 정책의 성패는 숫자가 아니라 토양의 두께에 달려 있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창업자를 황무지에 홀로 세워두고 있는가(1세대), 아니면 비바람을 함께 견딜 시스템과 파트너를 마련해주고 있는가(2세대)?”


실패해도 괜찮다는 무책임한 위로보다는, 실패하지 않도록, 혹은 실패해도 다시 시도할 수 있도록 곁에서 함께 뛰는 지역형 맞춤 시스템 설계가 절실하다. 연속성이나 유연성이 떨어지는 기존 지원 조직 대신, 전문성을 가진 민간 지역경영회사의 역할을 인정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화려한 개업식의 조명이 꺼진 후에도 묵묵히 지역을 지키며 ‘버티는 힘’을 가진 이들이 대우받는 세상.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할 로컬 2.0의 미래다.


에필로그: ‘로컬’이라는 단어를 지키기 위해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로컬이 더 이상 감성적인 유행어로 소비되지 않으려면, 창업을 부추기는 말의 다른 이름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이 단어 안에 조금 더 조심스럽고 단단한 의미를 담아야 한다.

로컬은 무엇을 얼마나 팔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로컬의 힘은 속도가 아니라 순환과 잔존, 시간이 쌓여 기억이 되고, 실패도 다음 시도로 이어질 수 있는 생태계에 있다.

로컬창업은 결국 지역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새로 쓰는 일이다. 그 맥락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창업 권하는 사회의 피로를 넘어, 지역이 스스로 숨 쉬는 방식으로 다음 시대를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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