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제주 살아요 : 제주4.3기록물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에 부쳐
세계가 ‘제주4.3’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이 났다.
살아남음을 비극으로 여겼던 이들의 말과 흔적, 진실규명을 위해 애썼던 모든 노력들이 ‘인류의 기억’이 됐다.
‘제주4·3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는 사실이 가슴 벅찬 것은 어쩌면 늦게 역사와 직면했고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얼마간의 시간과 현재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 입에 쓴 맛이 남아 한참 고생했다.
제221차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2025년 4월 11일 금요일 오전 6시 5분(프랑스 현지시각 4월 10일 23시 5분), ‘진실을 밝히다: 제주 4·3아카이브(Revealing Truth : Jeju 4·3 Archives)’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최종 승인했다.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4·3평화재단이 2023년 11월 제출한 등재신청서는 유네스코 등재심사소위원회(RSC)와 국제자문위원회(IAC)의 등재권고를 받았다. 그리고 5개월, 집행이사회가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최종 결정하기 까지 ‘긴’시간이 흘렀다.
지난 2016년 꼬박 11년을 기다려 제주헤녀문화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대표목록 등재를 지켜봤던 일이 생각나 다시 울컥했다.
영광스러운 결과는 수없이 많은 노력과 쓴 맛, 도전 끝에 얻어진다.
제주특별자치도는 지난 2018년부터 시작된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노력이 7년 만에 결실을 맺게 됐다는 공식 입장을 내놨지만 내 기억에 제안과 논의는 그보다 먼저 시작됐다.
내 기억에는 2014년 4.3 명예도민 1호인 추미애 국회의원과 인터뷰에서도 그 말을 들었고, 그 전에 이미 관련 작업이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모아졌다.
2017년 신년호인가 창간호 작업을 하면서 관련 기획을 시작했을 때만 하더라도 ‘힘들 것’ ‘안될 것’이란 의견이 많았다. 제주4‧3과 관련한 자료 중 상당수가 원본이 아닌 복사분 형태로만 남아 있고 확보하지 못한 자료들이 많다는 점이 우려를 샀었다.
덕분에 5‧18광주 사례도 꽤 다양하게 수집했고 후배들의 단골 기획 아이템이 됐으니 그런 관심만으로도 감사했었다.
제주4·3기록물은 진실 규명과 화해의 과정을 담은 1만 4,673건의 역사적 기록을 담고 있다.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와 옥중 엽서(27건), 희생자와 유족들의 생생한 증언(1만 4,601건), 시민사회의 진상규명 운동 기록(42건), 정부의 공식 진상조사보고서(3건) 등이 포함됐다. 기록유산 등재에 맞춰 프랑스 파리 현지에서 '진실과 화해에 관한 기록’주제 특별전도 열렸다.
전시장을 찾은 한 현지인들 사이에서 “한국 현대사의 잘 알려지지 않은 비극을 알게 됐다” “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비극적인 상황을 해결해 나가는 노력이 인상깊다”는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특별전 일정을 함께한 ‘순이삼촌’의 현기영 작가는 “제주4·3의 기억과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의미는 인류가 제주4·3을 통해 전쟁과 국가 폭력의 잔혹함을 되새기는 계기를 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제주 4‧3을 활자를 통해 세상에 처음 알렸던 노 작가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 때로 돌아간 소년의 눈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지는 않았을까. 가까이 다가가 귀에 대고 말을 하지 않으면 잘 듣지 못한다며 필담을 청하는 소설가의 말이 와르르 단단한 글자가 되어 굴러온다. 우르르 몰려가 단체 사진을 찍어 올린 누구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사실 내게 4‧3은 1996년 시작됐다. 제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대학은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사그라든 90년대 초반에 다녔다. 당시 처음 배운 민중가요가 ‘잠들지 않는 남도’였다는 것만 빼고는 향냄새가 짙게 감돌았던 4월 캠퍼스 이상은, 몰랐다. 그런 내가 지역 신문, 그것도 제주4‧3 발굴 보도로 알려진 곳에 몸 담게 됐다.
12월 입사하고 송년호 신년호를 만들자 마치 번개처럼 ‘제주4‧3’이란 단어가 던져졌다. 모른다고 할 수 없었다. 당시 편집국장이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을 지낸 양조훈 선배였고, 고개를 들면 보이는 자리에 현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이신 김종민 선배가 앉아계셨다.
모른다고 넘어갈 수 없는 상황에 위령제 현장을 굴러다니며, 4‧3을 주제로 한 여러 행사장을 mf 만나 돌며 부지런히 살폈다. 증언본풀이에 들어갔다가 주저 앉아 운적도 있었다. 유족과 피해자들의 증언을 취재하고 녹취 테이프를 수십 수백번 돌려들었던 선배의 책상 마지막 서랍에 소주가 있었던 것도 기억한다.
1987년 3월 제주4‧을 다룬 장편시로 옥고를 치른, 한라산 필화사건의 이산하 시인을 인터뷰하고 실물 크기로 만든 백비를 세우는 퍼포먼스를 하며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쏟았던 김시종 시인의 굽은 어깨를 옆에서 봤다. 그들이 있어 이 날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제주4·3기록물의 역사적 가치와 진정성, 보편적 중요성을 인정했다.
국제자문위원회에서는 제주4·3기록물에 대해 “국가폭력에 맞서 진실을 밝히고, 사회적 화해를 이뤄내며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조명한다”며 “화해와 상생을 향한 지역사회의 민주주의 실천이 이룬 성과”라고 높이 평가했다.
‘다행이다’하면서도 씁쓸했던 데는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이뤄낸 결과를 ‘5관왕’으로 포장해버린 역사 감수성이 있다.
제주특별자치도는 이번 등재로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세계자연유산, 세계지질공원, 무형문화유산, 세계기록유산까지 유네스코와 관련한 ‘5관왕’을 달성했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유네스코 등재를 타이틀 정도로 생각했다면 이런 작업을 굳이 공들여 할 필요가 있을까.
제주도를 알리고 기억할 5개의 국제 공인 인정을 보유하게 됐다…정도면 충분히 묵직하다. 역사에 대한 무지와 사회적 무관심을 넘어 이뤄낸 것들을 순수하고 뜨겁게 받아 안을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