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이 숲이 되는 순간

나의 소소한 제주 일상 :제주도립미술관 ‘바람과 숲의 대화‘

by 고미

[봄_산책] [바람과 숲의 대화] [제주도립미술관]

“피어남은 자기 의지를 외치는 행위라기보다, 세상이 건네는 신호에 몸으로 대답하는 과정이다. 씨앗은 흙의 무게에, 줄기는 빛의 방향에, 꽃은 계절의 조건에 응답한다. 인간의삶도 이와 닮았다. 논리보다 먼저, 어떤 손길이나 목소리에 이끌려 길을 바꾸고, 순간의 빛을 따라 마음을 열었던 경험들이 그렇다. 이 모든 것은 감각에 대한 몸의 응답이었다.”
#남효창 #우리는 모두 씨앗이다_중



이만한데도 꼼짝하지 않는다면 직무유기나 마찬가지인 봄 날. 움직였다. 모처럼 미술관이다.


처음 전시 소식을 듣고 한 번, 친구의 추천에 또 한번. 그래도 미루고 미루다 전시 마지막을 하루 앞두고 간신히 눈에 담았다.


날이 좋아서 다행이었고, 컨디션이 좋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아니었음 어디 먼 곳으로 움직여 길 위에서 방전됐을 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니 제주도립미술관을 꽤 오랜만에 찾았다. 복작한 시기를 피한다는 게 시간 낼 이유를 갉아 먹었던 탓이다. 그럼에도 공간은 편하게 ‘무료’로 품어준다.


제주–아오모리 국제교류전 ‘바람과 숲의 대화’.

제주와 아오모리는 생각보다 오래 서로를 오가고 있었다.


2011년 우호 교류 협정, 2016년 자매결연.

그 사이에서 아이들의 그림이 먼저 오갔고, 예술이 천천히 길을 냈다.

이번은 두 곳의 작사 29명이 125개의 색을 녹여냈다.


전시는 다섯 갈래로 나뉜다.

• 제주와 아오모리 예술가의 교류 이야기

• 북쪽과 남쪽 변방에서 태어난 예술

• 나라 요시토모와 제주의 그녀들 : 얼굴 너머의 얼굴

• 양 지역 창작자의 미래와 시간의 씨앗

• 기억의 풍경 : 사진가의 눈으로 본 아오모리와 제주


구분은 있지만 무겁지도, 억지스럽지도 않다. 개성이 강한 작품들이 서로 밀어내지 않는다.


동화 속 숲처럼 들고 또 나고, 돌고 또 돌게 구성한 전시장 안에서 호흡을 조절하며 느끼다 보면 경계없이 세상을 유영하는 바람이 보인다.


“뿌리는 밀지 않고, 흙은 밀어내지 못한다.
서로의 무게를 인정하며 아주 조금씩 자리를 바꾼다.
숲이 갈등을 넘는 방식은 언제나 이처럼 부드러운 조율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오래 보고 배웠다.빠름은 편리하지만, 느림만이 깊이를 만든다는 것을.씨앗마다 시계가 다르고, 자리마다 빛이 다르다.
다른 시간을 억지로 맞추지 않을 때, 숲의 리듬은 무너지지 않는다.” #남효창 #우리는 모두 씨앗이다_중

마치 책에서 인용한 문장처럼 작품 하나 하나가 씨앗으로 숲을 이룬다.


낯익은 오브제가 발을 붙잡고, 특유의 마티에르가 시선을 끈다.


그중 일본 사진작가의 작업 앞에서 오래 멈췄다.
앵글 속에는 평범한 소시민의 뒷모습이나 옆모습, 혹은 멀리서 찍힌 일상의 장면들이 담겨 있었다.
특별한 사건도, 과장된 감정도 없다.

‘아 이런…’ 하고 긴장을 풀었다가 그때의 삶, 그 뒷모습까지 소중히 담아낸 장면들에 이르러 어느 순간 숲과 하나가 됨을 느낀다.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의 온도가 조용히 남아 몸을 기댈 수 있게 해준다.


강요배 작가의 풍경 앞에서도 한참 호흡을 맞췄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구도의 풍경. 쨍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그저 따뜻한 초록.

무심한 듯 펼쳐진 그 초록빛이 이상하게 편안해 한참을 서 있었다.

가슴에 품은 감정을 옮기기 위해 종이 뭉치나 돌까지 붓처럼 쓴다는 이야기를 떠올려서일까.

캔버스 위의 흔적들이 바람결처럼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일부러 줄 세운 것들이 아니라 바람이, 또는 새가, 우연처럼 살아있는 것들의 기척을 타고 온 씨앗이 만든 다양함이 부담스럽지 않아 즐거웠다.


놓치지 않아 다행이다.

숲은 늘 거기 있었지만,

씨앗이 되는 순간은 언제나 지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