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당해녀 이어도사나 신물질로드-독도 출가 물질
'출가 해녀'라는 단어는 늘 끝이 가라앉는다. 그리움의 대명사이기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건, '섬'생활이 단조로웠건 처음 제주를 떠날 때는 치열했지만 타향살이가 쉬울 리 만무했다. 지금도 바다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제주'라는 단어에 가슴 먼저 뛰는 해녀들을 만날 수 있다. 동해 바다 외딴섬 '독도'도 마찬가지다.
교통수단이라고는 풍선에 발동선이 고작이던 시절, 몇 번이나 바다를 건너며 독도 물질을 했던 이들의 기억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한 페이지지만 많은 부분 활자화되지 못했다.
일본 기록 통해 확인
한국 전쟁의 혼란을 틈타 독도 점유권을 차지하려던 일본에 맞섰던 '독도 의용수비대'의 이야기를 담은 저예산 다큐멘터리가 있다. 권순도 다큐멘터리 전문 감독의 '독도의 영웅'이다.
당시 수비대장이었던 고 홍순칠 옹의 부인 박영희 여사가 고증을 하는 등 생생한 재연에 도움을 줬다는 얘기도 들었다. '잘 된 일'이라 박수를 쳐주는 것이 맞지만 어찌 된 일인지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 앞선다. 당시 독도 의용수비대를 지원했던 제주 해녀들의 이야기는 구체적인 기록 작업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태다. 당시 독도 물질을 했던 해녀들의 기억이 몇 번에 걸쳐 정리하고도 기록물로 남기지 못한 책임이 무겁다. 이후 이 자료들을 활용한 방송·신문 콘텐츠가 수차례 나왔지만 반짝 관심만 끌었을 뿐 진전을 보지는 못했다.
현재 유일한 독도 주민인 김신열 할머니(84)는 해녀다. ‘독도 지킴이’로 유명한 남편 고(故) 김성도씨가 2018년 10월 숨진 뒤 11월 독도를 떠나 경북 울진에 있는 큰딸 집에서 생활하다가 2019년 8월 다시 독도로 돌아왔다. 고 김성도씨는 과거 월남전에 참전한 국가유공자로, 1965년 독도 최초의 민간인 주민 고(故) 최종덕씨와 함께 조업하며 생활했다. 1987년 9월 최씨가 숨진 뒤엔 1991년 11월 아내 김신열씨와 주소를 독도로 옮겨 생활했다. 김씨는 독도의 샘물인 ‘물골’로 올라가는 998계단을 직접 만들었다. 혼자한 작업은 아니었다. 그 작업을 도운 것이 제주에서 건너간 해녀들이다.
기억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950년대 이후 부터지만 훨씬 이전부터 제주해녀들은 독도 바다를 누볐다.
일본 시마네현의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 측 명칭) 관계철'에는 '1921년(대정(大正) 10년)부터 매년 다수의 조선인을 독도로 끌고 가 전복과 소라 등을 따도록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1939년(쇼와(昭和) 14년)부터는 90t과 20t 짜리 어선으로 독도 주변 해역에서 조업을 했는데 선원 40명 가운데 감독을 맡은 일본인 2~3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조선인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1941년에는 제주도에서 해녀 16명을 끌고 와 일을 시켰으며 주로 성게를 채취하도록 했다는 내용도 확인된다. 비슷한 시기 독도 어장을 배경으로 히사미(久見) 어업조합을 운영했던 야하다 사이다로(八幡才太郞)가 쓴 '다케시마 일지'의 '독도에는 30여명이 이용할 수 있는 우물이 있었고, 강제징용자들의 숙소로 추정되는 막사 2채가 있었다'는 내용은 실제 독도에 살았던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보다 분명히 말해준다.
제주해녀박물관 등의 자료에서도 제주해녀의 독도 조업은 일제 강점 말기인 1940년대부터 시작됐고, 광복 이후 한국인 선주들에 의한 미역 채취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확인된다.
처음 10명 이내였던 제주해녀의 독도 조업은 1950년대 후반에는 20~40명으로 규모도 커진다. 이 시기 미역 등의 시세가 좋았던 것을 감안하면 '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들어가 포항으로 이동한 뒤,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꼬박 3~4일을 배에서 보내야 했던'사정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1956년 울릉수산업협동조합이 독도 미역 채취독점권을 가지면서 주춤하기는 했지만 이후 1980년대까지 제주 해녀가 독도에서 작업을 했다는 증거가 나온다.
실질적 '독도살이' 의미
해방을 전후한 바깥물질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1953년에 일본의 시네마호가 해산물 실험조사를 위해 독도 부근에 들어갔다가 약 30명의 한국인들이 독도와 그 수역에서 해산물을 채취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일본의 영토인 다케시마에 대한 불법침입으로 간주하여, 독도에 상륙했다는 기사 등에서 유추해 보건 데 당시도 적잖은 제주 해녀들이 독도행을 감행한 것으로 풀이된다.
독도 의용수비대가 조직된 것이 이 시기였다. 의용수비대 대장이었던 고 홍순칠 대장을 비롯한 의용 수비대원들이 독도 방위를 담당해왔는데 서로 한 달에 한번 씩 교대로 번갈아 가면서 3년 8개월 정도 근무를 계속했다
제주해녀들의 '자발적' 독도 출가물질도 이 시기 시작된다. 자발적일 수밖에 없던 이유도 분명하다. 독도 물질을 했었던 해녀들의 기억을 종합해보면 제주 해녀들이 독도를 찾은 것은 1954년 어간이다. 처음부터 독도 바다를 목적했던 것은 아니지만 울릉도 미역 작업을 하러 바다를 건넜던 해녀들 중 제주와는 다른 '바다밭'관리 기준과 현지 지선 해녀와 갈등, 차별을 견디다 못해 독도까지 갔다는 얘기가 가장 신빙성 있다. 당시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가는데 약 7~10시간이 걸렸다고 하니 여간해서는 선택하기 힘든 일이었다.
1956년 울릉도수산업협동조합이 독도미역채취독점권을 갖게 된 이후에는 기업형 미역 채취가 가능해져 독도 해녀들의 규모 역시 커졌다.
경북일보의 독도 관련 기사를 보면 1953년 최초로 박옥랑·고정순 등 4명과 1954년 김순하·강정랑 등 6명이 독도에서 물질을 했다. 이후 1955년 홍춘화·김정연 등 30여명이 독도 바다에 자맥질을 하는 등 독도 물질이 본격화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1956년 이후에는 한해에 많게는 30~40명의 해녀가 독도에 입도해 물질 한 것으로 확인된다.
'객고풍상/애향연금/성심성의/영새불망(객지에 나가 고생하면서도 고향을 사랑하여 돈을 내놓았으니 성실한 마음과 성실한 뜻을 영원토록 잊지 않으리')
제주문화원이 '한림읍역사문화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확인한 비석에 적힌 글이다. 비석에는 또 1956년 당시 울릉도.독도로 출가물질을 다녀온 해녀 23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해마다 미역철인 3월에 독도에 들어가 5월까지 석달 정도 생활하고 겨울에도 해삼과 천초를 얻기 위해 한 두 달 사는 일이 다반사였다.
'물'불편을 던 것은 196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다. 인위적으로 물을 저장할 시설이 만들어지며 사정이 나아졌다. 간이 화장실이라 부를 수 있는 편의시설과 작업한 미역 등을 임시 보관하는 창고 같은 것도 이 시기 생겨났다.
1970년대 양식 미역이 나오면서 울릉도·독도 출가 물질은 자연스레 줄어들었지만 없어지지는 않았다. 1973년 이후는 전통 나잠이 아닌 머구리 작업으로 형태가 바뀐 채 독도행이 이어졌고, 완전히 발이 끊긴 것은 1990년대 초로 추정된다.
해녀들의 독도 기억을 엮다
독도 출가 해녀들의 인터뷰 기록을 다시 꺼냈다.
김공자 해녀(79)의 독도 기억은 1959년부터다. 고무옷이 없던 시절이라 물적삼과 물소중이를 챙겼다. 테왁 대신 양철 깡통을 물에 띄웠던 적도 있었다. 독도까지는 발동기를 단 목선을 타고 갔다. 10시간 넘게 배를 타고 이동했다. 몇 년 독도까지 가기 위해 뇌물도 썼다는 말도 나왔다.
한림 등 서쪽 해녀들의 이야기 외에도 동쪽 구좌읍 행원 출신 고춘옥 해녀(작고)는 남편의 사업 실패로 가족 모두가 울릉도까지 갔고, 30대 중반에 독도 바다를 헤집었다. '울릉도 산 떨어지면 독도 산이 보이고, 독도 산이 떨어지면 울릉도 산이 보인다'라고 할 정도로 거리감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미역 시세가 좋다 보니 한 번 들어가면 한달 이상 머물러야 하는 독도 살이를 1년이면 서너 차례나 감수했다.
하도리 조봉옥 해녀(작고)와 임화순 해녀(작고)는 어린 자녀를 데리고 독도 물질을 감행했다. 한 번 작업에 20~30일이 소요되는 터라 아기업개를 구해 데리고 가거나 남편과 함께 독도에 들어가는 일도 있었다고 했다. 일도 힘들었지만 배고픔 역시 참기 힘든 부분이었다. 배가 한정되다 보니 보리쌀과 된장 등 간을 할 수 있는 몇 가지밖에 짐에 넣을 수 없었다. '모자라면 더 가져다주겠다'는 약속도 믿을 것이 못 됐다. 현지에서 미역보다 덜 귀했던 소라를 감자처럼 쪄서 먹었다는 얘기에는 웃음도 안 나온다.
해녀들의 기억은 비교적 정확하다.
광복 전까지 일본인들을 통해 독도에 갔던 내용은 확인하기 어렵지만 당시 독도에서 어업조합을 운영했던 일본인의 기록을 보면 당시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은 전량 일본으로 보내졌다.
광복 후 1950년대 후반까지는 전문적인 모집원에 의해 단체로 독도에 들어갔다. 독도 의용수비대가 자체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제주해녀를 모집했다는 내용 역시 여기에 포함할 수 있다.
1956년 개인의 독도 어장권 입찰이 가능해지며 기업형 미역 채취가 가능해졌고 제주에서 모집하는 해녀 규모도 늘었다. '5명씩 조를 짜 작업했다'는 시기다.
바깥 물질은 물론이고 여러 이유로 제주를 떠난 뒤 생계를 위해 물질을 하다 독도까지 들어간 경우, 이중에 다시 현지에 터를 잡거나 다시 고향에 돌아온 사례까지 독도 물질의 서사도 하나의 흐름을 이룬다. '독도에 살았다'는 실효지배적 의의의 상징으로 읽는 것 역시 이런 배경에서 출발한다.
독도 미역 조업은 3월에 시작해 5~6월까지 이어졌다. 채취한 미역은 독도 주변 바위에 널어 말렸다. 해녀들이 미역을 말리던 '가재섬'은 지금 가재바위라는 지명으로 기록돼 있다.
가장 마지막까지 독도에 남았던 고순자 할머니가 1984년과 1987년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두 차례나 독도로 주민등록을 옮기기도 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
독도 물질을 해봤던 해녀들만 기억하는 내용도 있다.
발동기를 타고 독도 바다에 가서 모르게 작업을 하고 몰래 돌아오는 '솔짝치기'다. 어업권을 얻지 못한 지역 주민들이 해녀 몇 명을 모아 작업을 했다. 새벽 5시에 출발해 동틀 무렵 물에 들어가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30분도 안돼 한 망사리를 충분히 조물 정도'(박순재 명창.74)였다. 소라도 지천이었지만 돈이 되는 전복만 잡았다. 껍질에 감태가 수북한 '머드레 생복(실력 좋은 사람이 잡아오는 큰 전복)'을 잡았던 기억도 남아있다.
제주해녀의 독도 물질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또 있다. 독도 해녀바위다. 1980년대 초 선박 접안을 위해 접안장 및 독도 경비대 물품수송용 삭도를 설치하면서 기계장치를 뜻하는 일본어 '동키'를 사용해 동키바위로 불렀던 것을 2012년 국토지리정보원이 국가지명위원회를 통해 해녀바위로 바꿨다. 미역 채취를 위해 제주도 등지에서 건너온 해녀들이 쉬었던 기억을 지명으로 남긴 것이다. 현재 독도를 홍보하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들에서 잠녀나 해녀 등의 연관어를 통해 정보를 찾을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해녀 바위'가 검색되는 것이 유일할 정도다.
대신 해녀들은 지나가는 배만 봐도 반가웠던 독도 물질 기억 속에 합자(홍합)가 지천이고 사람을 봐도 도망가지 않던 강치와 물이 깊지 않고 여가 많아 작업하기 좋았던, 말 그대로 '없는 것이 없었던' 바다를 남겼다.
일본 시마네현 등이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억지 주장하며 2월 22일 시마네현 마쓰에시에서 '다케시마(竹島·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의 명칭)의 날' 행사를 개최했다.
일본 정부는 이 행사에 2013년부터 올해까지 10년째 차관급을 파견했다. 마츠노 히로카즈 일본 관방장관은 정례 기자회견을 통해 독도를 다케시마로 부르며 "역사적 사실로나 국제법상으로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언급했다.
이에 대해 한국 외교부는 대변인 성명을 내고 "일본이 독도에 대한 부질없는 도발을 반복하고 있는데 대해 강력히 항의하며, 해당 행사를 즉각 폐지할 것을 엄중히 촉구한다"라고 밝혔다.
독도는 역사적·지리적·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우리 고유의 영토라는 점을 강조하고, 일본 정부는 독도에 대한 부당한 억지 주장을 즉각 중단하고, 겸허한 자세로 역사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타깝게도 이런 상황은 수년째 반복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1905년 1월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각의(閣議, 내각회의) 결정을 했다. 같은 해 2월 22일 독도가 시마네현에 속한다는 고시를 발표한 시마네현은 2005년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해 2006년부터 매년 2월 22일 행사를 열고 있다.
제대로 입을 다물게 하는 데 제주해녀의 독도 물질만큼 분명한 카드는 없다.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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