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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Mar 01. 2022

'식민'의 굴레 속 해녀로 살아남다

한바당해녀 이어도사나 신물질로드-징용물질의 아픔

"꽃이/피는 건 힘들어도/지는 건 잠깐이더군/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아주 잠깐이더군//…//꽃이/지는 건 쉬워도/잊는 건 한참 이더군/영영 한참 이더군"(최영미 '선운사에서'중)

시인은 사랑을 노래했다지만 읽은 나는 그랬다. 그날 그 때 한 껏 피어났던 그대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목소리를 내기까지가 힘들었을 뿐 그들을 잊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잊을 수가 없다. '대한 독립'이라는 거창한 대의명분을 내밀지 않더라도 자신과 주변 등 지켜야 할 것에 대한 사명만큼은 누구보다 강하고 단단했던, 여성 그리고 독립운동의 현장에 있던 그대들이다.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이라 했던 저항시의 한 토막을 그들을 위해 풀어놓는다.  



△ 사회적 약자 아니 역사의 강자     

제주 여성 항일운동가


세상은 '사회적 약자'라 했다. '혐오'라는 불편한 단어를 얹고, 각종 강력범죄의 표적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불렀다. 평등을 외치지만 사회라는 틀 안에서 여성에게 적용하는 것들은 어지간한 균형 감각 없이는 이해하기 힘들 만큼 한쪽으로 쏠린다.

소리를 낸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사실 다들 알고 있던 것들이다. '역사'라는 이름의 큰 수레를 굴리는 바퀴는 결단코 하나였던 적이 없다.

3·1운동은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 '여성'이란 이름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신여성'이 있었지만 그 보다 더 많은 수의 여성들이 가부장이란 그늘에서 고개를 숙였고, 노동력을 혹사당하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내 나라를 외치지 못했던 암담한 현실 앞에, 내 가족과 내 능력을 지키지 못하는 억울함에 당당히 나서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적 상황을 끌어내지 않더라도 제주 여성들의 주체성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 변화를 이끌었다.


"…난 졸업장을 받지 않겠어. 일본 국가를 부르며 졸업장을 받는 것 보다 더 치욕적인 일은 없을 거야"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79명의 소녀 결사대를 이끌었던 고 최정숙 지사의 외침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문맹퇴치' 야학에서 시작해 계몽운동의 중심이던 제주여성청년회, 노동운동, 재일조선인단체까지 그들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다. 직접 독립 의지를 글로 만들어 옮기고, 일제의 감시를 피해 규탄 격문을 뿌리던 현장에 그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재판 기록이나 판결문의 한 줄로, 누군가는 직접 남긴 노트와 일기장으로 기억된다.

섬에 깊게 뿌리 내린 공동체 정신의 맥이 여성을 통해 제주 독립운동사(史)에 힘 있는 획이 됐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제주해녀. 역사의 흐름을 타다     

제주해녀를 연구한 일본인 학자 자료집(1933)

“역사는 아무리 구멍을 파서 숨기려 해도 나올 때는 나온다”는 일본의 대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에밑줄을 긋는다. 해녀항일운동이 당시 제주해녀의 실상을 대표하지는 못한다.

일제 강점기 전 분야에 걸쳐 폭넓게 이뤄졌던 노역 징용에 있어 해녀는 빠지지 않는다. 위안부 등으로 끌려갔다는 기록도 있다. 이미 오래전 관련 자료들이 공개됐지만 해녀에 대한 관심은 아직 여기까지 충분히 미치지 않은 상황이다.


강제 동원이 본격화한 1939년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총동원 태세의 진전」은 당시 조선인 강제동원이 해녀와 심마니, 땅꾼 등 134개 직종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고 치밀하게 이뤄졌음을 담고 있다. 마구잡이식 차출을 통해 조선인들을 데려가 군인, 단순 노무자 등으로만 배치한 게 아니라 분야별 필요에 따라 각종 기술자들을 맞춤형으로 징발해 노역에 동원했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내용 중에는 ‘국민직업신고령이 내려져 (강제동원이) 실시되었다. 시국(時局·전시 총동원체제)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인정되는 직업 134종에 종사하는 자, 특수학교 졸업자, 양성소에서 일정기간 검정한 자’라고 명시돼 있다. 해녀 역시 당시 일본에는 중요한 노동력이었다.


일제강제동원규명위의 미공개 자료에도 50여종의 직업인들이 강제 동원된 사실이 확인된다. 제주 해녀 등 조선인 수십 명이 독도로 끌려가 수산물 채취 등 강제노역에 시달렸다는 내용은 일본 시마네현의 다케시마관계철 등에 남아있다.

조선인 징용자가 독도로 끌려가 전복과 소라를 채취했다는 내용은 1921년부터 확인된다. 두세 명의 일본인 감시하에 40여 명의 조선인 어부가 독도에 살았다는 내용과 더불어 1941년 제주에서 해녀를 데려와 일을 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1920년대 한 일본인 어부가 썼다고 알려진 ‘독도일기’를 보면 당시 일제가 조선일들의 독도 출입을 엄격히 금지하며 일본인들의 어업권을 보호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당시 해녀들의 독도 물질이 강제노역, 징용에 의한 것임을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살기 위해 ‘노동’을 팔았던 죄

     

이붕언 사진집 <재일동포 1세, 기억의 저편> 중. 가운데 동그라미 속 해녀가 홍석랑 할머니다.

제주도의 「제주항일독립운동사(1996)」에서 “1938년 5월에 일제는 '국가총동원령'을 내렸으니 이는 중일(中日)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침탈적 제국주의자의 무소불위의 소행이었다. 이 동원령은 한국사람을 전장(戰場) 혹은 노동현장으로 강제 징용할 수 있고 또 생산된 농산물의 공출이거나 사유물을 강권으로 징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1943년 8월 여자정신대근로령(女子挺身隊 勤勞令) 공포 후 조선 전라남도와 제주도에서 18세 이상 30세 미만(기혼자도 무방, 단 임신부는 제외) 신체 건강한 자로 황군(皇軍)을 위문할 조선인 여자정신대 200명을 동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내용을 찾았다.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바짝하고 긴장의 끈을 조였다. 그럴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다시 그 때로 간다.

여성을 ‘징용’한다는 것은 일본의 사탕발림과는 크게 달랐다. 어떤 내용인지 알고 있던 탓에 공포와 저항이 심했다. 그랬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료 속에서 눈에 띄는 이들, 그러니까 성산포의 단추제조공장에 임시 고용된 여공 100여명과 조천면 산간 부락 순대식품공장 여공 180여명 중 일부, 법환리 근처 8㎞ 연안을 돌며 강제 집행한 해녀, 한림읍 옹포의 처녀 등 205명을 모았다는 증언을 확인한다. 심장이 불편하게 뛴다.


‘식민’이란 굴레는 해녀들의 삶을 더 퍽퍽하게 했다. 일제 강점기 보국 제557호라는 전투기가 건조된다. 전시에 전투기가 만들어지는 것이 무슨 대수인가 싶지만 배경은 심상치 않다. 상대적으로 현금성이 젛았던 이들에게 가해진 압력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다. 심지어 해녀들이 성금을 모아 건조했다고 해서 그 전투기에는 ‘제주도 해녀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피해자 외의 이름으로 그렇게 전쟁의 한 부분이 됐다.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인가.


그리고 ‘홍석랑’이란 이름 석자를 기억해 냈다.

1923년 제주 한림읍에서 태어난 홍 할머니는 당시 징용물질의 산증인이었다. 여자정신대근로령이 내려진 이듬해인 1944년, 말이 좋아 '모집'형식으로 일본에 끌려간 뒤 군수산업에 동원됐다. 화약 원료인 감태를 채취하는 일을 했다. 이후에는 돈을 벌기 위해 태평양 방향으로 이동했다. 1988년 일본 일본 ㈜신숙서방에서 발간된 재일 조선인 2세 김영·양징자씨의 「바다를 건넌 조선의 해녀들」에서 홍 할머니의 존재를 확인하기 전까지 몰랐던, 아니 잊었던 역사였다.

일본 출가 물질 1세대 홍석랑 할머니.

2015년 현해탄 건너 일본 출가 1세대 홍석랑 할머니를 만났다.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가는 대신 강제 징용을 선택하면서 70여 년을 일본 바다를 전전했다는 할머니를 만난 곳은 제주에서 비행기로 2시간 30분여, 다시 자동차로 3시간여를 달려 찾아간 지바현 미나미보소 후쓰시의 외딴 요양원이었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몸을 움직이기 힘들 만큼 쇠약해진 홍 할머니는 고향에서 왔다는 낯선 사람의 손을 붙들고 “(고향)바다가 보고 싶어”라는 말을 반복했다.

한 번은 일본어로, 또 한 번은 제주어를 섞어서. 그마저 “바쁠 텐데 어서 돌아가라”는 재촉으로 끝났다. 해녀의 오랜 습관이다. 물질이라는 것이 물때를 놓치면 작업을 하고 싶어도 못 한다. 평생을 몸에 익힌 것은 정신이 희미해져도 남아 있다.

책으로 확인한 일본 지바현 보소반도 8개 지역의 현역 출가 해녀는 모두 28명이었다. 실제 현지 조사를 진행한 결과 그들 중 대부분이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특히 와다우라 지역의 해녀 5명 중 4명은 지바현 아와군 와다마치 조코우인에 조성된 재일 제주인 묘 20여 기 안에서 그 흔적을 찾았다.

어디에서 여기까지 왔고, 바다에서 일을 하며 가족을 사랑했던 어머니라는 기록에 코 끝이 찡해진다.

책 속에서는 그래도 한창 때라 목소리도 짱짱하고, 노래도 곧잘 한 가락 하고, 뒤늦게 합류한 제주 출신 해녀들에게 이런 저런 지식을 나눠주던 홍 할머니였지만, 끝내 꿈에도 그리던 바다에 돌아가지는 못했다.

지난 2017년 9월 어느날 홍 할머니가 소천하면서 그 때 해녀들의 삶은 이제는 더 이상 알 수 없는 역사가 됐다.

돌아가시기 전인 촬영한 2016년 다큐 공감 중 한 장면. 화면 캡쳐.

△굴곡의 역사 속 해녀의 이름으로


누군가 그랬다. 제주 해녀의 삶을 모르고는 우리 역사를 온전히 안다고 할 수 없다고. 파도에 쓸리고, 바람에 밀리며 깊어진 주름 만큼 우리 역사의 가장 깊은, 눈물이 그렁그렁 괴어 내를 이루는 어두운 골짜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 잃은 설움을 딛고 자주권을 찾기 위해 애썼던 이들에 대한 공적을 인정하는 작업은 필요하다. 살아있는 누군가에 그 업을 전하는 일 또한 경중을 가릴 수 없는 부분이다.

홍 할머니는 물론이고 당시 일본에 끌려가 물질을 했던 해녀들은 자신의 처치를 쉽게 입 밖에 내놓지 못했다. ‘징용물질’을 했던 사정과 달리 군수산업을 도왔다는 점, 그리고 ’급여‘를 받았다는 점 등을 들어 일부에서는 돈을 벌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당시 해녀들은 일본에서 주로 감태와 우뭇가사리를 채취했는데, 전쟁에 열 올리던 일본에게 감태와 우뭇가사리는 무척 유용한 군수용 물자 였다. 이를 태워 원료를 만드는 작업까지 해녀들이 했다.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넜던 이유는 또 있다. 전시동원이란 명분하에 국가 총동원법을 공포한 일본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군사훈련을 시켜 최전선으로 내몰 준비를 했다. 그것이 두려워 고향을 떠난 낯선 이국에서 이들은 제주라는 이름을 가슴에 묻었다.

제주발전연구원의 <제주여성사-일제 강점기> 작업에 참여한 일본 에히메대학의 이지치 노리코 교수의 논문(‘국외 출가 해녀’)을 보자.

논문을 보면 일본으로 건너간 제주 해녀들은 1930년대 후반부터 주로 군수용으로 필요한 우뭇가사리를 채취하는 데 동원됐다. 일본 하치조섬에서 ‘물질’(바닷속에서 패류 등을 채취하는 일)을 했던 해녀들은 1938년부터 전복이나 오분자기의 채취가 금지돼 우뭇가사리만 채취했다.

규슈 구마모토현의 한 지역에서는 1940년 “군수용으로 절대 필요하고, 수요가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는” 우뭇가사리를 채취하기 위해 임금이 싼 해녀 30명을 고용했고, 그 이듬해에도 50명의 해녀를 고용했다. 당시 우뭇가사리는 비행기의 날개 부분에 색을 입히거나 가죽제품의 마무리제, 화약제조용 고정제(접착제) 등 군수용으로 쓰였다고 확인한다.

그렇다고 고분고분 시키는 일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 곳에서도 제주 해녀들이 노동 착취나 차별에 맞서 투쟁을 벌였다. 이즈열도 미야케섬에서 해녀 40여명이 인솔자가 사업 부진으로 임금을 주지 않자 파업을 선언했는가 하면, 시즈오카현 아타미에서는 해녀들이 임금 체불에 항의하는 등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이지치 교수가 읽은 해녀는 비록 전시 체제를 뒷받침하는 데 이용되기는 했지만 일제 강점기 제주도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편입되는 가장 초기 과정의 임금노동자이면서 이주노동자다. 바다만 건넌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데 두려워하지 않았고, 노동으로 돈을 벌 수 있다면 그게 처음하는 일이라고 해도 마다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해석하는 것은 자유지만 사실을 덮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제주사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에 입각해 ’제주해녀‘를 읽는 작업은 그런 점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다.     

현해탄을 건넌 제주 해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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