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밥 6기, 에디터가 되다6 : 그러니 "Go"
△예능에 꽂힌 썰
요즘 잘 만들었다는 드라마 몇 편이 화제다. 조금 과장하자면 그 중 어느 하나라도 보지 않으면 오프라인은 물론이고 온라인에서 말을 섞기도 힘들다. 여주의 대사 한 마디에 ‘추앙’이라는 단어를 새로 찾아봤다거나 네이티브 수준의 제주어 표현으로 안방 시청자들을 울고 웃기는 이정은 배우의 연기력에 대한 얘기는 슬그머니 ‘다시보기’서비스를 선택하게 한다.
다만 지난주에는 모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몇 장면이 그보다 인상적이었다.
웹툰 작가에서 화가라는 제자리로 돌아가 개인전을 연 기안84의 분량이었다. 전시장 안팎에서 벌어진 소소한 에피소드들 중에 작가와의 대화였던 것 같다. 창작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던져진 질문에 기안84는 “자꾸 내가 생각 못 한 것까지 물어봐서…”라고 당황한다. 하지만 다시 그 상황을 곱씹고 ‘그렇게 볼 수 있구나’하며 수긍을 한다.
장면을 보자.
박태준 – 밤하늘과 바다와 그림에 전체적으로 파란색이 많고, 작가의 머리색과 의상도 파란 계통인데 어떤 의미가 있는 거냐?
기안84 - 그냥 파란색이 편안해서 녹여냈던 건데
주호민 - 그림에 유독 초승달이 많은데 이유가 있나
기안84 - 그냥 별 뜻 없이 그렸…
주호민 – 풀소유라는 전시 주제에 맞게 채워지지 않은 욕망이 아닐까 싶어서요
기안84 - “10년 동안 컴퓨터 앞에만 있었다. 사람들 보는 시간보다 ‘우기명’을 본 시간이 더 길었다. 이게 내 자화상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전시 개막 행사를 마치고 돌아와 가까운 지인들과 나누는 대화에는 솔직함이 배어있다. 사실 그런 경우는 흔하다. 영화 시사회를 하고 나서 평론가나 영화전문기자들의 질문에 감독들이 당황하는 일도 그렇다. 화가나 작가들이 새로운 작품을 발표하고 나고 반응을 오래 듣거나, 적극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해명하는 일도 종종 본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그런 과정들을 통해 다듬고 만지고 단단해진다.
적잖은 문화부 기자 경험으로, 그 때도 지금도 이런 일들은 자주 있다. '주고 받는'특별한 과정은, 종종 격려와 힘이 된다.
△속도와 속력, 뭐가 중한디
그리고 최근 흥미가 생긴 논쟁(?) 하나. 새로 시작한 드라마가 꽤 이슈다. 코로나19로 오래 갇혀있던 터라 대신 몸을 움직이고 땀 흘리며 사랑의 정의를 내리는, 요새 흔한 레퍼토리 중 하나라서가 아니라 제목이 때아닌 ‘문과·이과 관점’으로 부대꼈다.
‘너에게 가는 속도 493㎞’다. 구기 종목 중 가장 속도감 있는 스포츠인 배드민턴을 다루면서 숫자를 꺼내 차별화와 강조라는 목적을 살린 것 까지는 좋았는데 갑자기 ‘왜?’라는 물음표가 붙었다. 상식을 다루는 프로그램에 지성으로 등장했던 뇌과학자가 ‘/h’가 빠진 것 아니냐는 포스팅을 하면서 시적 허용과 과학적 열린 결말, 방향적 해석, 일상적 표현 등등 각자의 위치에서 보고 풀이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바이럴이 되는, 하나의 현상이 됐다.
이과 그룹에서도 1999년 NASA가 미화로 1억2500만불, 우리돈으로 1300억원 정도를 쏟아부어 기후 탐사 위성을 화성에 보내려던 프로젝트가 가속도 계산 때 미터법(SI Unit)과 인치법(English Unit)을 헷갈려 적용한 탓에 ‘안드로메다’로 가버린 예를 들어 단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고, 시속 493㎞가 더 임펙트 있다는 해설이 나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시속 493㎞는 초속 137m. 10m 거리에 있는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하는 시간이 0.1초라면, 이 때 빠르기가 '초속 100m', 즉 10m 거리에 있는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하는 시간이라는 풀이를 내놓는 식이다.
문과 쪽에서는 다른 해석을 한다. 드라마가 무슨 다큐가 아닌 이상, 특히 컨텐츠 특성 상 제목은 감성의 감도를 감안해 짓는 것이 맞다거나 ‘표기의 오류는 절대 이과의 영역이 아니’라는 말도 있다. 아예 이 논란을 통해 ‘어떤’유형의 사람을 구별할 수 있다는 접근도 있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다를 수도 있지’라고 한 발 물러선 뒤 “그래도 시속이라고 표현하는 게 어땠을까 싶네”라고 덧붙일 것 같다. 맞춤법 같은 것에 민감한 일종의 직업병 영역이다.
△그래서, 나에게 ‘응원’이란
지난 스밥 운영진 회의에서 ‘응원이란?’화제를 놓고 여러 이야기를 주고 받은 영향인지 이런 일들이 유독 가슴에 들어왔다.
각각의 영역과 입장 같은 것이 다르기도 했고, 상황이나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터라 딱 떨어지는 답을 내놓기 힘들었다.
스타트업 언저리에서 관찰하는 입장에서 찾은 뉴스 하나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영화 ‘코다’(선 헤이더 감독·2021)를 봤고, ‘미라클 벨리에’(에릭 라티고 감독·2015)를 건너 「수화, 소리, 사랑해」(베로니크 플랭 저)로 돌아갔다. 가족 중 유일하게 장애가 없는 소녀가 부모에게 단단히 묶인 자신의 인생을 노래로 풀어내고, 소녀의 빈 자리를 생각해보지 않았던 가족들이 현실과 소녀의 꿈을 인정하게 되는 과정이 담겼다.
합창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소녀지만 정작 가족이란 이름의 합창단은 묘하게 불협화음을 낸다. 분명 하나의 그림처럼 보이지만 약간은 이기적이고 또 조금은 부족한 것들이 미세하게 균열을 만든다. 상대의 소리를 더 듣지 않고 마음에 담아뒀어야 했을 날 선 말로 상처를 준다.
우리가 다 안다고 믿는 가족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아는지를 슬그머니 돌려 묻는 순간, 턱하고 숨이 막힌다. 삶을 감당하고 버텨 살아내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일상이라 하지만 “왜 내게만 이렇게 잔인한가”란 질문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위로’코드의 성장 영화는 그저 가볍게 보는 것이 맞았다.
기분이 그래서인지, 절실한 상호의존적인 관계와 감정과 선을 넘는 복잡 미묘한 상황, 내가 없으면 또는 아니면 안 된다는 책임감 비슷한 무엇, 그로 인한 부담감에 중요한 선택 앞에서 포기해야 했던 것들을 애써 음악에 버무려 삼키느라 고생했다.
그렇게 찾은 응원의 정의라면 ‘우리 모두는 다른 길 위에서 각자 다른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인정과 더불어 똑같을 수 없지만 비슷한 어려움과 극복 속에서 ‘나라면 어땠을까’한 번쯤 생각해 보는 일이다.
응원이 꼭 누군가를 위한, 대상이 있어야 하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좀 더 많이 듣고 말하며 정리하다 보니 찾아지는 과정도 그렇다. 흔히 ‘대화’라 부르는 그것이다. 조금 돌아왔지만, 그러니 “Go”. 이런 응원도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