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손을 뻗지 않으면, 언제 닿을 수 있겠어”

스밥6기, 에디터가 되다 7: 애니에서 스타트업을 읽다

by 고미

스트레스가 쌓일 때 종종 쓰는 루틴 하나가 있다. 물릴 때까지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특별히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교훈적 내용을 찾거나 복선을 뒤집어 살피는 작업 같은 걸 하지 않아도 되는 자연스런 흐름에 정신을 맡기는 일이다. 뭘 어떻게 봤는지 굳이 묻지 않는 데다 어지간한 상황은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사전을 뒤져봤다는 ‘추앙’같은 단어도 등장하지 않고 ‘붉은’으로 얽힌 퓨전사극 알고리즘도 없고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만찢남 캐릭터에 한눈을 팔아도 뭐라 할 사람이 없다. 이 어찌 편안하지 않으랴.

그랬던 애니 마니아의 눈에 툭 하고 뭔가 하나가 걸렸다. 아니 걸려버렸다. 심지어 세 번째 돌려보던 중이었다. ‘던만추’라는 말을 만들어냈던 주로 라이트 노벨 원작의 애니메이션 ‘던전에서 만남을 추구하면 안되는 걸까’다. 간략하게 영웅을 꿈꾸는 소년의 성장 스토리라고 정리할 수도 있지만,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묘하게 설득된다.


미궁도시 오라리오는 통칭 ‘던전’이라 불리는 장대한 지하미궁을 보유한 거대 도시다. 신과 인간이 함께 산다. 사고로 자신을 키워주던 할아버지를 잃고 도시로 온 소년 벨은 모험자를 꿈꾸지만 어딜 봐도 허약하기만 하던 그는 대부분 ‘권속(FAMILIA·파밀리아)’에서 거절당한다. 그러다 자신의 파밀리아를 찾아 거리를 헤매던 여신 헤스티아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묵묵히 자신의 능력을 키워가던 벨은 던전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을 구해준 한 소녀에 대한 동경과 더불어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던 영웅이 되는 것을 목표로 모험과 레벨업을 거듭한다. 그 과정에서 동료를 만나고 다양한 스킬을 얻는다.

물론 일본 애니 특유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하는 요소가 산재해 있지만 대사와 흐름에 집중하면 주인공의 성장 뿐만 아니라 스토리텔링의 감칠맛이 살아난다.

역대 최단기간 랭크업 기록을 세운 주인공에 대한 불편한 소문과 견제, 혼자서는 못 이겨도 서로를 보완하면서 훨씬 강한 적을 물리치는 일이 가능해지고(파티 구성) 경험을 통해 배워가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사람 수만큼 다양한 모험의 의미와 그것을 제대로 알아야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 어드바이서의 조언을 진지하게 듣고, 처음 겪었던 절망의 상황을 피하지 않고 밟고 서서 스스로를 단련해 가는 과정이 낯설지 않다.

“여기서 못 일어나면, 여기서 높이 손을 뻗지 않으면, 언제 닿을 수 있겠어”, 그리고 압도적인 힘의 부조리에 대응해서 어떤 궁지에서도 역전할 가능성을 믿고 행동하는 모습에 어느 순간 동화된다.

마치 스타트업이란 이름을 달고 출발선에 선 뒤 몇 번이고 넘어지고 부딪히면서 다음 단계, 또 다음 단계를 밟고 올라서는 것과 흡사하다. “우리 중 누구 한 사람이라도 없었다면…”같은 가슴 울컥하게 하는 대사라니.

‘만일 영웅이라 불릴 자격이 존재한다면 검을 든 자가 아니라 방패를 든 자도 아니며 유를 가져오는 자도 아니다. 자신을 건 자야말로 영웅이라 불리는 것이다. 동료를 지켜라. 자신을 걸어라. 부러져도 된다. 꺾여도 좋다. 크게 울어라. 승자는 항상 패자 속에 있다. 소망을 관철하고 마음을 외치는 거다. 그러면 그것이 가장 멋진 영웅이다’. 이 정도 주문은 외워 볼 만 하지 않을까.


애니를 보다가 느닷없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니다.

리더십 분야에서 세계적 석학으로 꼽히는 란자이 굴라티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의 글을 읽었던 참이다. ‘원대한 목적’이 스타트업을 성장시킨다는 제목의 글을 읽으며 생각이 많아졌다.

란자이 굴라티 교수는 성장에 급급한 스타트업 리더들에게 잊고 있던 것, 목적의 필요성을 갈파한다. 그의 이론을 정리해보면

첫째, 목적은 기업가적 야심을 키워준다. 야심은 창업가와 초기 직원들이 더 큰 이상을 추구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시스템의 문제 해결이나 가치 창출에 대담하게 나서도록 자극한다.

한 예로 2009년 고담 그린스를 공동 설립한 비라지 푸리는 사업 초기부터 농작물을 키우고 로컬푸드를 생산하는 것을 넘어 지역사회를 활성화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혁신하자는 기업 목적을 제시했다. 이 같은 목적은 창업가 본인뿐만 아니라 직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목표에 더 헌신하도록 만들었다.

지역사회에 도움을 주고 더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서라도 사업의 대규모 운영과 수익 창출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그 결과 창업가들은 이상을 바탕으로 지역이라는 단위 경제에 집중해 오프라인 사업의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둘째, 목적은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끌어모은다. 창업가는 직원, 투자자, 고객, 공급업체를 포함한 다양한 이해관계자에게 위험을 감수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그런데 단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이상을 전달하는 경우 더 큰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다. 사람들의 이성과 감성을 모두 자극하기 때문이다.

가령 2014년 리봉고를 설립한 창업자 글렌 툴먼은 만성질환자들의 삶의 질과 건강을 개선하겠다는 목적을 내세워 이 사명에 공감하는 인재들을 채용할 수 있었다. 회사가 미칠 선한 영향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기업이 탐내는 실리콘밸리 엔지니어들을 영입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2019년 기준 리봉고 전 직원의 3분의 1이 당뇨 같은 만성질환을 앓고 있었고, 다른 3분의 1은 만성질환을 앓는 가족이 있었을 정도다. 이들은 만성질환과 함께 살아가는 환자들에게 일조할 수 있다는 점에 이끌려 헌신적으로 일했고, 결과적으로 회사의 상업적 성공을 촉진했다.

셋째, 목적은 이기는 팀을 만든다. 스타트업은 종종 혼란스럽고, 엄청난 도전 과제의 부담 때문에 와해된다. 벤처 자금의 지원을 받는 미국 기업의 4분의 3이 결국 살아남지 못한다는 통계도 이런 위험을 말해준다. 기업들이 망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성장 과정에서 전략적 초점을 잃거나 강력한 공동체 정신과 팀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도 주된 원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적에 대한 충실성은 팀원들이 결속력을 유지하고 오랜 기간 응집력 있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해준다는 이점을 가진다. 와비파커의 공동 창업자인 닐 블루먼솔은 누구에게나 합리적인 가격으로 안경을 제공하겠다는 이상을 중심으로 강력한 조직문화를 조성했다. 그는 속속 합류하는 신입 직원들에게 와비파커의 가치관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신념 체계가 회사의 평상시 의사결정에도 반영되도록 했다. 그 결과 합리적 가격으로 친환경 포장을 적용한 제품을 제공하겠다는 목적을 위해 여러 부서가 힘을 모으는 등 협업을 촉진할 수 있었다.(동아일보 2021년 9월 27일자 오피니언)


목적이 스타트업을 성공으로 이끄는 유일한 길은 아니지만, 그를 통해 얻는 이점이 저평가되고 있다는 점, 벤처 투자가들이나 창업가들은 훌륭한 아이디어만큼 한 기업의 라이프사이클도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조언이다.

비단 리더들에게만 적용되는 얘기는 아닌 듯 싶다. 아직 던만추의 경지까지 오르지는 못했지만 남은 시즌과 외전까지 신경 써 훑어볼 생각이다. 최근 나온 16부작 드라마에서 인생 2막을 꿈꾸는 40대 자영업자와 천재이자 예비 스타트업 창업자인 20대가 각각의 세대를 대표해 등장할 정도가 됐다. 남일처럼 두고 보기만 할 일은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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