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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Apr 20. 2022

생각만으로 ‘오늘’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스밥 6기, 에디터가 되다 5 : '화성장'에 다녀왔습니다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혼자서는 외롭고 힘든 싸움도 나를 알아주는 내 편 한 명으로 판세를 바꿀 수 있다. 혼자 하면 고민으로 끝나지만 어느 정도 서로를 알게 될 때 서서히 함께하고 싶은 것들을 나누다 보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얻어낼 때가 있다.


지난 대통령선거 때도 그랬지만 6월 1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그럴싸한 약속들이 쏟아진다. ‘누구를 지지하냐’는 낡고 빤한 질문에 ‘누가 되는…’이란 답이 돌아오는 것은, 그저 그런 일이 된 지 오래다. 그보다는 오히려 무심코 집어 들었다가 쏟아지는 숫자와 질문을 보고 덮었다가 혹시 몰라 다시 읽었던 「불평등한 선진국-대한민국의 불평등을 통계로 보다」가 더 인상적이었음을 고백한다.

선진국 대한민국의 국민은 과연 행복한가. 왜 그들은 늘 힘들고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는가. 그들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으며, 그렇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쓰고 버려지는’ 아픈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그리고 왜 불평등한가.

속이 뻥 뚫릴 듯한 시원한 답은 나와 있지 않다. 저자의 의도를 정리해보자면 현재 상황을 데이터화(통계)해 살피다 보면 평면으로는 결코 드러나지 않던 문제가 보이고, 대안을 모색해 볼 수 있다는 얘기인 것 같다.     


#‘오늘도 무사히’


제주는 물론이고 각 지자체의 유력한 단체장 후보들의 입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 등의 시대 변화에 발맞춰 경제산업 정책의 틀을 새롭게 짜고, 스타트업 생태계 활성화를 비롯해 전략산업 육성에 나설 것이란 말이 나온다. 아니나 다를까 선거철이다.

스타트업계에서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불합리한 규제 개선과 제도적 지원이지만, 표가 급한 이들은 역시나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환경을 개선하고 규제 해결 방안을 찾겠다’는 말 뒤로 우선 순위에서 몇 번째 쯤 위치할 지는 누구도 모른다는 사정이 깔려있다. 청년 인재 육성과 일자리 창출과 연관한 관심을 보였으니 아마도 ‘시작을 지원’하는 지금의 흐름이 고집스럽게 이어질 거란 전망이 가능하다. 공약의 방향이 현재 스타트업에 뛰어든 이들의 고민이나 바람에 닿을지도 장담하기 어렵다. 성장이 가진 의미와 그늘 아래에 시들해지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한 눈에 보일 리는 만무하다.

그러니 책 241쪽에 나온 문장 하나를 감히 인용한다. “매일 '오늘도 무사히'를 염원하는 건 비단 버스나 택시 기사들만이 아니지요”.

며칠 전 어느 신문 1면을 장식했던 기사 제목이 봄 아지랑이처럼 눈 앞에 어른거린다. 스타트업 “보고서 쓰다 날 샌다”. 들은 얘기, 들리는 얘기만 정리해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내용이다. 이대로면 ‘실적쌓기' 행정에 전담인력 부담과제 의존/'좀비 기업' 부작용도/성장에 초점을…제도 개선 필요라는 부제목은 아프다.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갈 것인지가 더 고민스럽다.


전자신문 2022년 4월 15일자 1면

#화성장에 가면 **이 있고


사실 이런 무거운 얘기를 할 계획은 아니었다. 지난주 ‘화성’에 다녀온 얘기를 잔뜩 풀어놓을 생각이었는데 하필 이런 게 눈에 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맨인블랙에 등장하는 뉴럴라이저(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기억을 지워주는 장치)다. 번쩍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알았는지 봄 하늘은 정신없이 푸르고, 나풀나풀 바람을 타고 꽃 향기가 진동을 한다. 일단 미사여구를 늘어놓은 까닭은 찾아가는 길에 몇 번인가 입구를 놓쳐서 U턴을 반복했다는 실수담을 포장하기 위함이다. 봄에 취하면 뭘 못하겠는가.

그런 마음은 ㈔제주스타트업협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제주 스타트업 프리마켓 ‘화성장’이 열린 곳은 실내 스케이트장과 실내 정원이 눈에 띄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축제장 같은 넓은 스테이지는 없지만 빙 둘러 뭔가를 하기에는 유용한, 골목 장터 같은 1층 공간에 ‘화성’이 열렸다.

모두가 ‘처음’이란 전제를 깔고 시작한 일이라 너나없이 분주했다. 다행히 미리 ‘스텝’역할을 요청하고 이름 스티커를 받았다.

아는 얼굴, 들어본 이름, 알고 있던 제품과 처음 보는 것들까지 하나 하나 모여 빛을 낸다. 제주 스타트업은 ‘로컬’로 강하다고 했지만 정작 현장에서 본 것은 연대의 힘이었다.

프리마켓이 맞는지 플리마켓이 맞는지 하는 흔한 논쟁에서부터 행사 성격을 제대로 몰라 당황했다는 귀띔까지 ‘처음하는 일이라’ 여러 소리가 났다.

‘팔 것’을 꺼내는 대신 가지고 있는 것을 풀어내는 팀도 여럿 있었다. 대신 계산을 하고, 심지어 어깨 너머에서 들은 정보로 호객도 한다.

“왔어요”하고 신고를 하고 불과 30분도 되지 않아 양손이 무거워졌다. ‘끼니 거르지 말라’는 덕담에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보리개역을 GET했다. 제주에 봄 느낌을 가득 집어넣은 장신구와 딸기 맛이 보태진 카카오닙스 같은 것들로 일단 참가 인증.

장이 섰으니 사람으로 통하는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역시 처음이라 그 대상이 어디까지인지, 누구와 만나야 하는지 모호한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기꺼이 자신을 알릴 기회를 얻은 두 팀은, 사전 아무런 약속도 없이 마치 운명처럼 ‘환경’으로 연결됐다.

해양 쓰레기 업사이클링을 테마로 하는 바다쓰기(대표 김지환)와 청정 제주산 자원을 이용해 6차산업 융복합 비즈니스를 실현 중인 ㈜대한뷰티산업진흥원(대표 강유안)이 차례로 자리를 잡기 까지의 과정과 앞으로 자리를 만들기 위한 생각을 풀었다.

김지환 바다쓰기 대표는 지난 2013년 제주 애월읍에 정착한 이주민이다. 제주의 아름다움에 이주를 결심했지만 바닷가를 장악하는 쓰레기 파도에 ‘어떻게 할까’라는 고민을 시작했다. 전공을 살려 미술작품을 만드는 것을 고안하고 몇 차례 전시회를 했지만 지금은 교육을 한다. 처음 5년은 방과후미술 수업과 근로복지공단에서 근무를 하면서 버텼다. “귤도 팔았다”고 했다. 지금은 환경 체험 프로그램 강사로 자리를 잡았다. 바다쓰기 역시 교육 프로그램으로 지탱한다. 그림책 작가로 데뷔를 앞두고 있다고 했다. 그가 화성장에 들고 나온 것은 바다에서 모은 것들을 활용해 만든 장식등이다. 이내 여러 가지 의견이 쏟아진다. 재활용 작품이 다시 쓰레기 취급을 받는 것을 어떻게 해면 해결할 수 있을지, 제품 종류를 다양하게 하는 방법은 고민하고 있는지, 교육과정과 연계한 프로그램으로 업그레이드하면 어떨지 하는 얘기들을 김 대표는 가만히 들었다. 그리고 입을 뗐다.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사실 무엇을 어떻게 할지가 고민이었다”고 했다. 교육과 사회적경제기업 제품 유통 플랫폼, 홍보 마케팅, 수중 드론, 3D 입체영상 obj제작 까지 다양한 분야를 개척 중인 CEO들이 꺼낸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빠짐없이 기억하고 ‘좋았다’는 감상을 남겼다.

제주스타트업협회에 가입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새내기지만 화장품 원료 개발과 제조·유통, 정부 R&D수행, 교육 비즈니스 등으로 10년 넘는 업력을 가지고 있는 강유안 대표는 진행중이고, 또 예정인 신제품에 대한 피드백을 구했다.

땅과 연결된 ‘제주온’과 바다를 소재로 하는 ’하이온’이 이번 내놓은 라인업은 유기농 탈모 샴푸와 선에센스다

제품 설명이 끝나자마자 바다 작업을 하는 대표들은 기능성과 더불어 유지력 등에 대한 정보를 캤다. 제품 인쇄까지 꼼꼼하게 친환경 패키지를 실천하는 고집을 올해부터 호텔 등 50실 이상의 숙박시설이 일회용 위생용품 무상제공 금지 대상 사업자에 포함된 상황과 연결하는 방안도 제안됐다.

주부나 엄마까지 다양한 경험이 품평회 자리에 오른다. 의견이 끊이지 않는다. ‘직접 써 보고’ 솔직한 후기를 공유한다는 약속도 했다. “일정이 있어서 간신히 도착했는데 늦게라도 참가하길 잘 했다. 잘 모르고 왔는데 많이 듣고 간다”는 소감이 인상적이었다.


#더 잘 '산다'는 것


‘밑졌다’는, 시장이라면 빤하게 통하는 거짓말이 여기서는 무용지물이다. 누군가는 정보를 얻었고, 누군가는 홍보를 했다. 코로나19라는 막막한 터널을 지나며 아쉽고 안타까웠던 연대와 공감을 찾은 것은 돈으로 다 환산할 수 없다. 그들의 눈 속에서 ‘슬슬 해보면 되겠네’하는 작은 자신감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정하 시인의 시 하나가 떠올랐다.     


“누가 제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별은 스스로가 빛난다

수없이 많은 별들 중에서도

그 어느 하나 빛을 내지 않는 별은 없다

우리들 잠든 영혼을 깨워주는 종소리

잠에 취해 혼미한 새벽

잠결에도 우리의 정신을 번쩍하는

저 맑은 종소리는 도대체 누가 울리는 것인가”     


아하. 시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한밤에서 새벽까지’라는 제목을 ‘화성장에서 생긴 일’이라고 바꿔 달아도 어색하지 않다.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혼자서는 외롭고 힘든 싸움도 나를 알아주는 내 편 한 명으로 판세를 바꿀 수 있다. 혼자 하면 고민으로 끝나지만 어느 정도 서로를 알게 될 때 서서히 함께하고 싶은 것들을 나누다 보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얻어낼 때가 있다.

카카오패밀리가 자리잡은 세화리의 특별한 움직임이 그랬다. 마켓에 나온 상품은 아니지만 장에서 들을 수 있는 기운차고 흥미진진한 풍문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마을 안 뜻 맞는 몇몇 CEO가 의기투합해 ‘체험’을 연결한 프로그램을 가동하기 시작했다는, 심지어 제주라는 섬, 그 안 작은 마을이 ‘하나의 지구’가 됐다는 귀띔이 토요일 오후를 몽땅 쏟아부은 보람이 됐다.

그 뒤 지역 매체에 소개됐음이 기쁘면서도 아쉽다.

'화성장'은 이번을 시작으로 오는 6월, 9월에도 열릴 예정이다. 23일에는 서귀포 법환동 아뜰리에안에서 가칭 별책 화성장이 펼쳐질 예정이다. 이미 다음엔 무엇을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잔뜩 모아놓은 참이다. 이들의 '놀이'에는 그게 어떻게 제주를, 제주 스타트업을 더 잘 사는 것으로 연결 될까 하는 관심이 묻어있다.

그래서 마지막 질문 하나를 남겨본다. ‘당신에게 스타트업은 무엇입니까’. 마치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를 묻는 것처럼 따지고 해석하느라 쉽게 답을 내놓기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도상(道上)을 감내할 줄 아는’하는 짧은 문장 하나를 챙겨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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