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밥6기, 에디터가 되다 10 – '슬럼독 밀리어네어', 운과 운명
스타트업과 관련한 뉴스의 온도 차가 마치 환절기와 같다. 지원과 확장, 기회라는 단어가 질주하는 사이로 위기와 변화, 대응이 묵직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지난 16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테크 스타트업의 파티는 끝났다(For Tech Startups, the Party Is Over)’는 기사를 냈다.
지난 13년간 돈 귀한 줄 몰랐던 실리콘밸리를 비롯한 글로벌 스타트업들이 비용 절감을 위해 직원들의 해고를 고민하고 있다는 상황을 전했다. 후하기만 하던 기업 가치 평가 또한 보수적으로 변하고, 회의적으로 바뀐 투자자들의 반응은 낯설다 못해 냉랭한 분위기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대표 액셀러레이터인 와이컴비네이터에서 최근 자사가 투자한 스타트업 대표들에게 보냈다는 ‘위기 메시지’와도 맞물린다.
마치 봉화처럼 국내 스타트업 업계에 조용히 물들고 있는 ‘최악에 대비하라’는 메시지에는 “향후 6~12개월 안에 투자를 유치할 계획이라면 경기침체의 정점 시점일 수 있다. 자금조달에 성공할 가능성이 아주 낮을 것이며 심지어 회사가 잘되고 있더라도 어려울 것이다. 계획을 변경하길 조언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소울리스좌(소리좌)’마냥 감정없이 지극히 건조하면서도 전해야 할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경기가 얼마나 나빠질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 가장 확실한 것은 최악을 대비하는 것이다, 대표의 책임이란 투자 유치를 하느냐 못하느냐가 아니라 24개월 뒤에도 회사를 살아남게 만드는 것이다 등 ‘잘 하고 있다’거나 ‘잘 할 수 있다’는 응원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나마 위안(?)이라고던진 말은 만약 ‘버틴다면’ 정도다. 바쁘다고, 행여 남의 일처럼 흘려들을지 모를 대표들을 위해 “만약 체감되지 않는다면 회사 관련 지표와 펙트를 다시 파악하라”는 뾰족한 메모도 덧붙였다. 여기까지.
솔직히 전문적인 영역은 아직 배움이 모자란 만큼 자세한 내용은 번역본( https://ebadak.news/2022/05/21/plan-for-the-worst/)으로 대신한다.
이 내용을 몇 번 반복해 읽다 보니 ‘운(Luck)’과 ‘운명(Destiny)’의 알고리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스크를 벗고 바깥 바람을 즐겨도 괜찮아졌는데도 굳이 공기 청정기 영향권 내에서 마기꾼 행세를 하며 뒹굴거리는 것을 선택한 결과다. 어느 OTT에서 최근 시작한 판타지 뮤직 드라마 관련 정보를 살피다가 스파크가 터졌다. “아 그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Slumdog Millionaire)’다. 2008년 개봉해 2009년 아카데미 8개 부분 수상(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음악상 편집상 촬영상 주제가상 음향상)까지 2년 동안 88개 상을 휩쓴 흥행작이다.
극적인 퀴즈쇼 사이 더 극적인 드라마를 품은 영화는 곳곳에 다양한 장치를 숨겨놓은 영민한 구성으로 볼 때마다, 또 보는 사람마다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한다. 2008년에는 빈민가 출신의 아이가 자라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을 찾는 가슴 떨리는 감정에 마지막 주먹을 꽉 쥐었던 기억이었는데 2020년 재개봉 때는 몇몇 장면에서 감은 눈으로 불편한 현실을 마주했다. 그리고 이번엔 처음과 끝을 봤다.
영화 전반에 걸쳐 진행되는 퀴즈쇼는 실제 2000년도 인도에서 첫 방송된 이후 2007년까지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누가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가’라는 퀴즈쇼를 그대로 옮겨왔다.
차를 배달하는 일을 하는 빈민가 출신, 말 그대로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자말이 퀴즈쇼에 도전한 것도 대단하지만 난이도 있는 퀴즈를 척척 맞혀내는 설정은 마치 동화같다.
서로 연관성이 없는 데다, 자말의 환경을 감안하면 감 조차 잡기 어려울 것 같은 퀴즈는, 마치 운명처럼 자말의 삶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겪어왔던 극적인 사건들 사이에 퀴즈의 답들이 마치 단서처럼 놓여져 있었고, 그의 이야기를 통해 자말의 인생 여정을 보게 된다.
어린 시절,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로 인해 눈앞에서 엄마를 잃은 자말을 형과 단둘만 남아 산전수전을 겪는다. 인도의 뿌리 깊은 계급 사회 전통과 전혀 보호되지 않은 어린이 인권 상황은 사회 문제를 다룬 르포를 연상케 한다.
더 흥미로운 것은 자말의 사정을 알게 되는 것은 퀴즈쇼가 끝난 뒤라는 사실이다. 혹시 모를 부정 행위가 있었을 것이라는 신고로 경찰에 끌려간 자말은 이 모든 상황이 ‘운’이었다고 설명한다.
자신이 퀴즈쇼에 도전한 것은 돈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위해, 잃어버린 사람을 찾기 위해서이고, 피할 수 없었던 상황들에서 알게 된 것이 문제로 나왔을 뿐이라고.
이런 기가 막힌 우연은 운과 운명 어느 한 가지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잠깐 숨을 돌리고 ‘영화’에 집중해 보면 다른 운 또는 운명과 만난다.
영화는 ‘퀴즈’로 시작한다.
“자말 말리끄는 2000만 루피의 상금이 걸려있는 최종 우승까지 한 문제만을 남겨놓고 있다. 그는 어떻게 최종 단계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A: 속임수를 썼기 때문에
B: 운이 좋아서
C: 그가 천재이기 때문에
D: 영화 속 이야기이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플롯들 사이에서 이야기에 취해 방황하는 사이 답을 생각해야 한다는 잊고 말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정답은 자말이 아니라 내가 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겨우 그 사실을 알아챈다.
“It is written”. ‘지어낸거다’와 ‘운명이다’의 중의적 표현이 답이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정작 자말이 마지막 문제를 맞힌 것은 오로지 ‘운’이었다는 사실이다. 삼총사의 마지막 총사를 묻는 것 질문의 답을 자말은 몰랐다. 그의 삶 속 삼총사 중 한 명은 첫사랑 ‘라띠까’였다. 전화찬스를 이용해 라띠까를 찾는 것으로 자말은 퀴즈쇼에 참가한 목적을 달성한다. 그 자체로 만족한 까닭에 마지막 문제는 자신있게 ‘찍었다’. 승부사들이 좋아하는 ‘확률’적으로도, 결코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던 지금까지의 운명만 놓고 보면 맞추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자말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해피엔딩은 조금 억지스럽지만, 그래서 만족스럽다.
영화 배경과 출연 배우 모두 인도를 가리키고 있지만, 영국 출신 대니 보일 감독이 연출하고 미국 20세기 폭스사가 배급한 한·미 영화다. 원작인 소설 ‘Q&A’을 쓴 비카스 스와루프는 소설가가 아닌 현직 외교관이라는 사실까지 운과 운명이 정신없이 교차한다.
행운의 동전이 가지고 있는 ‘비밀’은 어떠한가.
영화 속에서 경찰에서 풀려난 자말은 늘 지니고 다니던 행운의 동전 버린다. 나락으로 떨어질 뻔한 상황에서 그의 선택을 도왔던 동전은, 알고 보니 양면이 모두 앞면이었다. 그리고 말한다. “이제 이 동전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 행운은 내면에서 오는 것이니까”
소설의 내용도 비슷하다.
“어느날 스미타(라띠까)와 함께 걷던 토머스(자말)가 마지막 비밀 하나를 꺼내놓는다. 그가 종종 자신의 운명을 걸곤 했던 1루피 짜리 행운의 동전에 대한 비밀. 동전을 건네받은 스미타(라띠까)가 동전을 이리저리 살피다 놀란다. 동전의 양면이 모두 앞면이었던 것. 동전을 던져 결정한 그의 선택들은 사실 전부 운이 아닌 토머스(자말)의 의지였던 것이다. 그는 동전을 돌려받자마자 바로 바다에 던져버린다. 왜 행운의 동전을 버리냐는 스미타(라띠카)를 돌아보며 토머스(자말)가 말한다.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 행운은 내면에서 오는 거니까”
운·운명의 수레바퀴가 언젠가 만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같은 영화를 세 번(몇 번인가 TV에서 방영한 것을 본 기억이 있지만 ‘집중도’를 기준으로)을 보고 나서 내린 결론치고는 빤하고 추상적이다. 냉정하게 현실을 보라는 따끔한 충고를 접하고 난 뒤 본 탓에 장면마다, 상황마다 이전과는 다른 감정이 벌떡 하고 일어났다.
런웨이(생존할 수 있는 기간). 몇 번이고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위기를 넘기면서 자말은 결국 꿈에 그리던 ‘첫사랑’을 만났다. 퀴즈쇼에서도 우승한다. ‘최악에 대비하라’는 메시지를 의역하면 처음 스타트업 무대에 나섰을 때의 ‘첫 마음’을 기억하라는 연서(戀書)일지 모른다. 앞이 보이지 않고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상황이 닥치더라도 목적했던 것을 잊지 않는다면, 그렇게 정신을 단단히 붙든다면 기회가 온다는 충고는, 아무리 뒤집어 봐도 무섭지 않다. 그게 뭐라고. 운과 운명, 겨우 글자 하나 차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