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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Jun 13. 2022

제주 원도심, 담쟁이 걸음을 걷다

그냥 제주 살아요 - 제주라는 이름의 '핵'을 만나다


제주시에 대한 기억이 있는 사람 몇몇이 모여 얘기를 하다 무릎을 탁하고 쳤다. ‘아 시내’. MZ라 구분하는 요즘 세대나 그 보다 더 어린 아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 보다 나이가 있는 이들에게 ‘시내’는 지금 우리가 원도심이라 부르는 그 곳이었다. 읍면에서도 동네 안 말고 특별한 볼 일을 보러 갈 때는 “시내에 다녀온다”고 했었다. 성안, 성내의 다른 이름으로 시내를 지칭했던 기억은 그리 멀지 않은, 지금도 남아 있다.

제주 원도심 옛길 답사 지도

지금의 제주 시내는 원도심이라 부르는 공간에 뿌리를 두고 뻗어나간 지역을 아우른다. 툭 하고 길이 나고 턱하고 건물이 세워지고 주섬주섬 사람이 모인 것이 아니라 담쟁이덩굴이 뻗어나가는 것처럼 빈 곳을 채우며 영역을 넓혔다. 담쟁이란 것이 그렇다. 식물의 뿌리가 중력과 같은 방향인 땅 속으로 자라고 줄기는 중력과 반대 방향인 위로 자라는 것과 달리, 줄기에서 잎과 마주하면서 돋아난 작은 빨판 형태의 공기뿌리 끝이 아무 곳에나 착 달라붙어 위나 옆은 물론 아래쪽으로 뻗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대여섯 발자국은 걸어야 만 할 것 같은 기분은 발 아래 꿈틀거리는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섬에 인기척이란 것이 느껴졌던 그 때부터 지금까지, 사람, 삶이란 단어가 심장 박동처럼 뛴다. 분명 예전에 비해서 약해지기는 했지만 태생에서 부터 서사를 만들고 자가호흡을 했던 힘이 빠지는 데는 지금까지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1988년 항공사진에 담긴 관덕정 일원과 원도심. 사진 = 국토지리정보원
제주 중앙로 사거리


△‘옛’에서 만들어진 길

그래서 원도심. 이 곳은 제주란 이름의 ‘핵’이다.

제주 원도심은 행정구역상 제주시 삼도2동과 일도1동, 건입동까지 포함된다. '중앙로' '구제주' 등으로 불리는 옛 시가지인 원도심 복판에는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관덕정이 있다. 남북 방향은 ‘한짓골’(남문골, 현재 남문로 南門路), 동서 방향으론 ‘칠성골’(현재 칠성로 七星路) 등 크게 두 흐름으로 나눠 읽을 수 있다.

옛 ‘칠성골’을 중심으로 형성된 ‘칠성로’는 여러 면에서 많은 역사와 사연이 깃든 곳이다. 제주지역 경제·문화·사회 중심지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칠성로라는 획을 놓고 보자. 고대 탐라국 때 제주 성내 7곳에 북두칠성 형태로 제단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삼을나의 추장이 부족의 번영과 나라의 융성을 기원했던 칠성단이 지금의 이름으로 남았다는 얘기도 있다. ‘탐라국 왕세기’에는 탐라국이 기원전 2337년에 건국했다고 적고 있다. 단군 조선보다 빠른 셈이다. 어디까지 믿을 것인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칠성단 만이 아니라 옛 제주성 안에 자리잡은 뱀신에 관한 칠성본풀이도 있다. 제주에선 뱀을 '칠성'(七星)이라고 했다.

뱀신인 칠성은 '풍요의 신'으로 이 뱀신을 잘 모시면 재물이 들어와 부자가 된다고 했다. 본풀이 중에는 칠성이 자신을 조상으로 잘 모신 제주성 안의 송대정(宋大靜) 집안도 부자가 되도록 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 송대정 집안이 있던 골목을 '칠성통'이라고 해서 지명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설도 있다.

제주 칠성대의 옛 흔적들에 세운 표지석

칠성로가 반듯한 만든 신작로가 아니라 사람 사는 흔적을 따라 구불구불 뱀 형태를 하고 있는 것에서 유래를 찾는 경우도 있다.

다만 어떤 말이 맞는지를 따질 필요는 없어 보인다. 조선시대 ‘성안’과 가까운 옛적의 중면, 제주읍과 근래의 작은 제주시, 오늘날 특별자치도 광역 행정시까지 그 존재감은 특별하다.

지나간 시절의 역사와 오늘의 시간이 어떠했던가, 그리고 그 다음은 어떠할 것인가를 섬 내 어느 다른 지역 보다도 진솔하게 말해주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이는 곳

더듬어보면 칠성로를 중심으로 한 원도심에는 늘 사람이 모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산지항과 가까운 이점으로 근대적인 상점들이 들어섰다. 유명 상점들이 거의 칠성로에 자리를 잡으면서 제주에 ‘상권’이란 개념이 만들어진 것도 이 때부터다. 다만 그 시대의 칠성로는 일본 자본에 사로잡혀있었다.

당시 큰 상점들은 일종의 종합상사여서 잡화와 문방구 등을 취급했다. 귀금속·시계류 판매업은 원조격인 미즈하시계점, 모리시계점 등이 자리를 잡은 이래 비슷한 전문점들이 모이면서 이제껏 칠성로의 전통처럼 남아있다.

칠성로 상권의 핵심은 옷가게였다. 1950년대 중반에 양장점 간판이 달린 이후 집안 큰 일은 물론이고 일생에 두 번 없을 일 같은 중요한 시점에 으레 찾는 곳이 된다. 양장점만 있던 것이 아니라 라사라고 부르는 양복점도 자리를 잡았다. 광복과 6·25 전쟁 후 1955년 무렵에도 칠성로 한양상회(잡화상)를 통해서 공무원들에게 급료 대신 양복천을 배급한 적이 있다고 한다. 동네 양장점에 가서 옷을 맞춰 입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1970년대를 지나 1980년대 기성복 시장이 열리면서 칠성로의 색깔도 조금씩 달라진다. 의류가 주를 이루던 사정에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다른 도시의 상점가와 비슷한 표정을 짓게 됐다.

그래도 원도심이라고 칠성로를 구분할 수 있었던 것은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1950년대 칠성통은 시대적 상황과 달리 문화가 꽃을 피우는 양면적 모습을 했다.

일제 강점기 제주 첫 극장인 ‘창심관’(현 제일은행 자리)이 들어섰고, 1947년 10월 7일 역시 제주에서 처음 ‘다과점’ 허가를 받은 칠성다방이 개업했다. 6·25전쟁 피란민 속에 학자와 예술 문화인들이 유입되면서 어느 순간 다방은 문화를 나누는 사랑방 같은 역할을 했다.

제주 문화의 산실로 자리잡았던 원도심 다방. 김순택 소장.
중앙극장 1956년 제주시 칠성로에 개관

제주 문학의 씨앗을 뿌린 계용묵 선생에서부터 강태섭·한병섭·김택화(이상 화가), 홍석표·고영일·부종휴(이상 사진가), 양중해·김종원·강통원·문충성(이상 시인) 등이 돌담처럼 제주 문화를 쌓아 올렸다. 사실 시대가 그러했다. 예술적 감성을 풀어내기에는 내일은커녕 당장 오늘도 가늠하기 힘든 전쟁 상황이었다. 길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먹고 살기 힘든 만큼 경계와 번민이 깊었다. 1951년 봄, 제주도로 피란 내려왔다가 아예 눌러앉아 ‘제주 사람’이 된 고 최현식 소설가는 당시를 ‘칠성통 엘레지’로 표현하기도 했다.     


△영원한 것은 없다

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 후반 칠성로로 이름이 바뀌면서도 ‘불경기가 없는’ 대표 상권의 자리는 내주지 않았다. 1970년대 접어들어 아리랑백화점이 입점(1973년)하는 등 칠성로의 번성은 끝이 없을 줄 알았지만 현실은 다른 선택지를 내놨다.

6·25전쟁 중 수립된 제주시 도시계획은 현장이나 지역에 대한 고민 없이 전시(戰時) 혹시 모를 상황에 대응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드러냈다.

사람 사는 냄새가 흘렀던 길은 책상 위에서 반듯하게 조각됐다. 관덕정에서 동문로터리까지, 그리고 지금 중앙로라 부르는 도로는 물류와 사람의 이동에 속도를 붙였다. 이후 이어진 도시개발사업을 통해 신산 지구와 서사라 등 새로운 주거지가 형성됐고 상점가도 이동을 시작했다.

원도심에 구멍이 생긴 것은 무게 중심의 이동 때문이었다. 원도심과 주변지역에 집중됐던 제주도청과 교육청, 경찰국 등 각급 기관을 비롯해 대학과 고등학교, 상업 및 금융 관련 시설 등이 하나둘 자리를 옮겼다.

제주시동문로터리 산지천 2층집


1980년에는 1952 건립된 제주도청사 자리로 제주시청이 이전했다. ‘시내 불리며 행정·경제·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 까지 길었던 시간과 노력은 새로  길을 따라 이른바 돈과 사람을 떠라 순식간에 움직였더.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서광로를 사이에  남북의 온도 차이도 컸다. 미처 체온을 챙기지 못한 탓이다.

한껏 멋을 내고 LP판을 정리하던 음악다방 DJ도, 주머니 사정이 빤했던 대학생들과 예술인 등 수많은 청춘들이 모이던 주점도, 인터넷 따위는 없어도 그 안에 있는 것만으로 세상에 일어나는 것들을 손금 보듯 알 수 있었던 과거의 모습은 대부분 기억으로만 남았다.

이용을 위해 만든 길은 오래된 도심의 힘을 가차 없이 쪼갰다. 돈과 일을 따라 사람들이 떠났고 벌이가 어려워진 상인들은 사업을 접거나 장소를 옮겼다. 빈 점포가 늘어나며 찾을 이유가 없어지는 공동화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재생이란 이름의 깃발을 올리다

2009년 마지막 구심점이던 제주대병원까지 옮겨가면서 위기감은 고조됐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공감대는 ‘제주시 원도심 활성화’라는 깃발을 들게 했다. 지난 2012년부터 2016년까지 문화예술거리 조성 사업이 진행됐다. 2014년부터는 빈점포 임대사업을 통해 예술가 입주를 유도했다. 2016년 원도심 도시재생 사업이 시작을 알렸고, 2017년에는 ‘오래된 미래 모관(城內)-옛것을 살려 미래를 일구다'를 비전으로 한 제주시 원도심 도시재생 전략계획이 나왔다. 덕분에 지금 칠성로는 따라 걸으며 그 노력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와 청년센터, 소통센터 등이 자리를 잡았고, 예술공간 이아나 산지천 갤러리 같은 이름이 익숙해졌다.

제주 북초등학교의 김영수 도서관, 철거 위기 고택을 리모델링한 제주책방, 옛 제주기상청 건물에 혁신창업 지원 및 스타트업 육성이란 쓸모를 입힌 ‘W360’, 원도심과 관련된 사업을 하거나 창업을 준비하는 사업자와 창업자들의 공유공간인 도시재생 디자인공장 등이 들어섰다.     

혁신창업거점 W360은 옛 제주지방기상청을 리모델링해 완성했다
2021년 12월 제주시 서부두 명품횟집거리에 문을 연 ‘끄티탑동’.

△‘잘 할 것’에 심장을 맞추다

다시 원도심에 사람이 모인다. 북적이거나 하는 느낌과는 다르다. 상권의 성격보다는 문화권이라 읽는 것이 훨씬 유연하다. 사이즈가 조금 큰 신발을 신을 것처럼 어딘지 헐겁고 어색하다. 그 편이 보다 안정감이 있다. 보기에는 좋지만 작은 신발은 길들이는 과정이 아프고, 잘 맞는다 싶은 순간 낡아 바꿔야 할지 모르지만 살짝 큰 신발은 많이 걷고 발이 부었을 때 오히려 편안해진다. 처음 뒤꿈치가 까이거나 무심결에 훌러덩 벗겨지는 시행착오를 거칠 수도 있지만 오래 신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느낌은 마음을 편하게 한다.

오늘 원도심의 시간은 한참 도시가 성장하던 때처럼 반듯한 도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 느려도 골목을 더듬어 간다. 원도심에는 아직 어느 시인이 담쟁이에서 봤다는 ‘퉁퉁 부은 발바닥’과 ‘글썽거리는 멍’이 남아있다. 인정을 하기 까지 많은 시간과 비용을 지불했지만, 넋을 놓고 놓치고 있던 것들이 보인다.


도시와 사람을 연결하려는 시도가, 지역의 강점을 끌어내려는 창업·창작자들이 원도심을 택한다. 아직 살아있다는 말이다. 정체성과 역사성 같은 것은 그림 속 꽃처럼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부르고 생활의 일부로 만들려는 ‘실패’ 사례를 쌓고 있다. 주저하거나 망설이는 대신 행동하고,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연대한다. 과거 외세의 침략과 일제 수탈, 4·3 광풍과 6·25 전쟁, 도시 개발의 상처까지 학습되지 않은 충격들에서 무너지는 대신 힘을 합쳐 일어났던 제주 공동체의 저력을 본다. 아직 미약하지만 제주 정체성이라 부르는 것들이 제주에 뿌리 내리거나 적어도 의지하려는 이들에게도 유효하다는 것을 원도심의 변화가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다음은 어떤 일이 생길지 기다려지고, 몇 걸음이라도 더 걷게 된다. 이제 ‘잘 될 것’이 아니라 ‘잘 할 것’이 원도심의 새 원동력이다.


* 이 글은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 <J-CONNECT> vol 21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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