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길'에서 묻다 - 중산간 잣성 따라 읽는 제주 '말'문화
바람이 불고 비까지 내리는 날에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대록산과 소록산 사이에 난 길을 따라가면 볼 수 있다는 말만 믿고 산을 탔다. 오랜 역사 속에 원형 그대로 보존됐다는 흔적이다. 아니면 요즘 스타일로 길이 쭉 하고 나있어 차로 코앞까지 갈 일이다. 다행히 ‘손전화’라는 것이 있어 멀리에서나마 왼쪽 오른쪽 하는 방향 지시가 가능하고 세계 구석구석을 손바닥처럼 보여준다는 구*맵도 있다. 몇 번이고 ‘돌아갈까’를 반복하다 다시 걷기를 수 차례, 잡풀쯤은 무시하고 날 선 가시나무를 빗겨 찾은 그 곳에 ‘시간’이 있었다. 줄잡아 600년 묵은 시간이다. 세월의 더께는 푸른 이끼를 회색으로 만들었다. 누군가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원래 그 모습이었던 것처럼 자연 위장을 한 그 것, 잣성이다.
제주의 역사를 말하면서 ‘말(馬)’을 빼놓으면 어딘지 서운하다. 제주마 때문만은 아니다. 제주는 말의 수호신인 방성(房星)이 임하는 곳이다. 석기시대 말기나 청동기시대부터 제주에 말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그 만큼 말과 관련된 이야기나 유적도 많다. 온전히 ‘길’을 따라가겠다고 시작한 길에 말까지 얹으려니 고민이 적잖다. 순간 무엇인가 머리를 후려친다. ‘지금 어디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휘파람 하나로 말떼를 몰고 다니며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었던, 지금은 기억으로 남은 테우리들. 그들과 함께 호흡했던 잣성을 잊고 있었다.
제주도 목장의 공식적인 유래는 몽고마 160마리가 1276년 고려 충렬왕 2년에 지금의 성산읍 수산리인 당시 수산평 지역에 도착한 것부터 시작한다.
이렇게 고려말 원나라 간섭기부터 제주에 대규모 목마가 시작된다. 1년 내내 목축이 가능한 제주도는 자연스럽게 원의 말 사육 거점이 됐고, 당시는 해안가 평야 지대에 목장을 조성됐다. 이후 100여년에 걸친 말 조공은 제주의 문화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역사적으로 제주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외부 세력으로 인한 크고 작은 변화를 겪어왔다. 그 까닭에 다양한 경로의 외부문화가 수용되어 토착·융합화 등의 과정을 거치게 됐고 그런 복합성은 종종 제주만의 특이성이란 말로 설명되어 진다.
그런 특성은 제주여성의 삶을 통해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이 시기 삼별초의 제주 입거와 몽골족의 제주지배 속에 만들어진 ‘아기업개’ 전설도 그 중 하나다. 다른 지역 여성과는 차별화되는 삶을 살았고 외부세력의 진입으로 야기된 여러 문제의 해결에 앞장서기도 한다. 제주 말(言) 중 말(馬)과 관련된 말에는 유독 몽골어에서 유래됐거나 유사한 표현이 많은 것도 이 시기와 무관하지 않다.
이후 원이 망한 뒤 이곳에 사육되던 말들이 고려에 귀속됐고, 고려가 쇠한 뒤에는 조선조에 인계된다.
이후 조선 선조 27년 1594년에는 남원읍 의귀 출신 김만일이 제주마(濟州馬) 500마리를 조정에 진상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탐라순력도 ‘공마봉진(나라에 필요한 말을 고르다·숙종 28년 1702년)’은 나라에 필요한 말을 보내기 위해 각 목장에서 고른 말들을 제주 목사가 최종 확인 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조선 시대 신분을 상징하던 수단 중 하나였던 갓의 대부분이 제주에서 만들어졌다. 여기서 ‘왜?’라고 물으면 하수다. 당연하지 않은가. 말이 많았기 때문이다. ‘요망진’(영리하고 재주가 좋은), 아니 요망져야 했던 제주여성들은 손을 쉰 적이 없다. 바닷가 마을에서는 물때에 맞춰 물질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밭일을 했다. 상대적으로 살림이 박했던 중산간 마을 여성들은 일감을 찾아 더 부지런해야 했다. 그 중에서도 비교적 전문적인 일을 했던 이들이 말총을 다루는 여성들이었다. 전통적으로 제주에서 총모자와 양태를 만들면 통영이나 거제의 입자장이 이를 하나의 갓으로 완성 시키는 구조였는데 그 작업이 여간 까다롭지 않다. 솜씨가 좋은 이들이 동네 일청(모여서 하는 작업장)에 모여 호롱불빛 아래서 새벽까지 말꼬리털(말총)을 결었다. 말꼬리털을 꼬아 엮어가며 갓의 머리 부분인 총모자를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말꼬리 10가닥 가운데 총모자 작업에 쓸 수 있는 것은 2~3가닥뿐이다. 한가닥 한가닥 집어 올려 팽팽하게 당겨서 강도를 느낀다. 도중에 한 올이라도 끊어지면 다 풀고 처음부터 다시 짜야 한다. 언젠가 국가무형문화재‘망건장’이수여 명예보유자(2020년 별세)를 인터뷰할 당시 “굳은살은 물론이고 작은 거스러미 하나도 벌이에 영향을 미쳐서 ‘소소한 집안 일도 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오래된 얘기기는 하지만, 한동안 우리 옛 소리를 찾는 라디오 캠페인을 통해 ‘어려려려~’ ‘휘루루루~’하는 테우리의 음성이 흘러나왔던 일도 있었다. 지금도 박물관 수장고나 방송국 자료실 어딘가에서는 찾을 수 있다.
제주특별자치도가 2014년 우리나라 첫 말산업 특구로 지정된 일도 이런 사정들과 연관이 있다. 전국 말산업 특구로 지정된 제주, 경북, 경기, 전북 등 4곳이다. 특구 진흥계획의 부합성과 추진 사업의 우수성, 집행의 적정성, 특구 발전의 효과성 등 총 4가지 항목에 대한 평가에서 제주는 꾸준히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말 거점 조련센터 운영 활성화, 마육과 마유를 활용한 특구사업의 균형적·체계적인 추진, 말산업 전문인력 양성 등에 국비를 포함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지만 문화 얘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로지 ‘말’만 있다.
물론 매년 가을이면 제주마를 테마로 한 축제가 열린다. 2017년 제주의 10월을 '말(馬) 문화 관광의 달'로 지정하기도 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는 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래서 다시 돌아 잣성으로 왔다. 과거 말을 풀어놓고 기르기 위해 한라산 허리를 두 번이나 감아가며 쌓아 올린 것이 다름 아닌 잣성이다. 잣성은 말을 기르던 목마장 경계에 쌓은 담장을 말한다.
군사상·교역상 마필의 중요성을 인식해 마정(馬政)의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 세종 7년(1425년). 당시 해안가 마을들에서 농작물을 뜯어내는 말로 인한 민원이 거세지며 고득종이란 인물이 목장을 한라산 중턱으로 옮기고 경계에 돌담을 쌓을 것을 건의하면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중산간 목장지대가 만들어진다.
세종 11년 1429년 8월 국마장이 설치되며 목장을 10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하는 10소장 체계가 갖춰진다. 잣성은 그 경계의 역할을 했다.
왜 잣성이라 불렀을까. 사실 제주말 ‘잣’은 ‘널따랗게 돌들로 쌓아올린 기다란 담’을 뜻한다. 아마도 여기에 국가가 관리한다는 무게감을 더해, 아니면 그 정도로 규모가 있다고 해서 ‘성(城)’이란 말을 얹었는지도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장원(牆垣)’이라 불렀던 내용이 나온다. 지역에서는 ‘잣’또는 ‘잣담’이라 했고, 목장에 쌓은 성이라 ‘장성(場城)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1970년대부터 제주도의 지형도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용어로 현재는 학술적인 측면에서 통용해 쓰이고 있다.
잣성은 쌓인 위치에 따라 ‘하잣성’, ‘중잣성’, ‘상잣성’으로 구분된다. 시대순으로는 ‘하잣성’, ‘상잣성’, ‘중잣성’의 순이다.
하잣성(해발 150~250m 일대)은 세종대 축조된 것으로 해안지대의 농경지와 중산간 지대의 방목지와의 경계 부근에 돌로 쌓은 담이다. 일단 말들로부터 농작물을 막기 위한 목적이나 중산간 지대에서 부분적으로 행해지던 농경지 개간을 막고 안정적으로 말을 사육할 목마장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해석하기도 한다.
상잣성(해발 450~600m) 1780년대 중산간 지대의 방목림과 산림지대 경계를 구분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말들이 산림지역으로 들어가 동사하거나 잃어버리는 사고를 막기 위한 ‘보호용’ 돌담이다. 중잣성(해발 350400m일대)은 1860년대 농목교체형 토지이용을 위해 출현한 것으로 구분한다.
이외에 간장(間場)이라고 불리는 잣성도 있었다. 대부분 목장들이 하천을 중심으로 자연 경계를 이루곤 했는데 제주 지형 특성 그러지 못한 곳에서는 경계 구분 용도로 돌을 쌓았다. 간장은 조선 후기 설치된 산마장 침장, 상장, 녹산장에서 확인된다.
잣성의 흔적을 찾아 표선면 가시리를 찾았다. 목축문화를 중심으로 한 테마마을이다. 날씨 탓에 마을 어르신을 직접 청하지 못하고 안내만 받는다. 일단 길 안내가 걸쭉하다. “일단 사잇길로 쭉 올라강 보믄 왼편에 무덤 같은 게 이실거라. 그 안터레 강 살펴봐봐. 뭐 보이지 안암서. 무슨 표지가 이실거라. 무슨 표시냐고? 그냥 옛날부터 있던거난 이섬신가 하주”.
다만 이 곳 잣성 역시 시간을 거스르진 못했다. 일부가 품고 있는 것이 전부다. 중산간이 개발되면서 제일 먼저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 잣성이었다. 오래전부터 제주 잣성을 연구해온 강만익씨가 지난 2010년 발표한 논문 ‘조선시대 제주도 잣성 연구’(제주대탐라문화연구소 「탐라문화))에 따르면 잣성의 총길이는 해발 150~250m에 위치한 하잣성 43㎞, 해발 350~400m의 중잣성 13.4㎞, 해발 450~600m 일대 상잣성 3.2㎞ 등 약 60㎞에 이른다.
선형(線形)유물로서는 제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에 남아있는 역사유물 중에서도 가장 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이 잣성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가 되기도 전에 소리 없이 훼손되고 있다. 우후죽순 자리를 잡은 골프장이 가장 큰 이유가 됐다. 실제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잣성을 탐사한 결과 산간지대에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것이 확인됐을 뿐 도로 건설과 농경지 확대로 인한 훼손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 강씨의 지적이다. 일부 지역은 소멸에 가까운 상태로 안타까움을 샀고, 현재도 진행형이다.
잣성은 조선시대 대규모 공사가 제주에서 이뤄졌음을 입증해주는 유적이자 제주 목장사와 목축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다.
제주의 1만 8000 여 신들 주에는 말을 중심으로 목축을 관장하는 ‘테우리 신’도 있다. 테우리라고 불리던 말몰이꾼에게는 매년 치러야 할 중요한 의례가 있었다. 테우리 신에게 목축과 관련한 여러 가지 도움을 청하는 ‘테우리 코사’다. ‘테우리 코사’는 ‘쉬멩질’, ‘테우리 맹질’, ‘백중제’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제주도 여러 지역에서 목축업, 축산업 관계자들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는 ‘테우리 코사’는 키우고 있는 음력 칠월 보름 백중날 ‘테우리’들이 떡과 밥, 술 등 제물을 가지고 자기 소와 말을 가꾸는 목장의 망을 보는 테우리 동산으로 가서, 차려간 제물을 조금씩 흩뿌리며 한 해 사고 없이 좋은 결실을 맺기를 기원한다.
역시 음력 7월 장마철 곰팡이가 슬어 눅눅해진 신당과 신의(神衣)를 꺼내 말리는 제주 전통 마을 의례인 마불림제도 ‘말을 불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원형이 남아있어 유산적 가치가 있는 잣성 중 가시리 대록상 중잣성은 ‘갑마장길 기행’등으로 존재 의미를 더하고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말인 ‘갑마(甲馬)’를 키워낸 국영목장 ‘갑마장’은 따라비오름, 큰사슴이오름, 번널오름 등을 연결하는 가시리 일대 들판에 있었다. 가시리는 이를 테마로 ‘갑마장길’과 ‘쫄븐갑마장길’을 개발, 2012년 3월 공식 개통했다. 총길이 20㎞로 6시간이 걸리는 ‘갑마장길’은 가시리 방문자센터(가시리사무소)를 출발해 당목천을 거쳐 따라비오름, 큰사슴이오름, 유채꽃프라자, 행기머체와 조랑말박물관까지 이어지는 경로다. 이보다 짧은 ‘쫄븐갑마장길’은 총길이 10㎞, 3시간 코스다. 제주말로 ‘짧은’을 뜻하는 쫄븐길로 갑마장길을 다 걷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는 용도로 기획했다. 행기머체와 가시천, 따라비오름, 잣성, 국궁장, 큰사슴이오름, 유채꽃프라자, 꽃머체를 거쳐 행기머체로 이어진다. 또 하잣성•중삿성•상잣성 등으로 구분되는 ‘잣성길’도 있어 30~40분 정도 산책을 겸해 둘러볼 수도 있다.
다만 전체 잣성을 향토 또는 민속자료로 지정하는 작업은 다소 더디다.
개인 재산 침해 등의 이유로 시도하지 못했던 일들이 점점 더 어렵게 된 탓이다. 제주의 상징인 환경자산이나 경관자산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서두르지 않는다면 얼마 없어 증강현실 프로그램의 하나로 내가 말이 된 양 잣성을 넘나드는 체험을 할지도 모를 일이다.
제주 말문화를 알고 싶다면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마을 조랑말체험공원이나 남원읍 의귀리 헌마공신 김만일 기념관을 둘러보는 방법도 있다. 각각 조선시대 최고의 말을 사육한 ‘갑마장(甲馬場)’이 있던 전통과 80여년 일생동안 수천마리의 말을 나라에 바쳤던 신념을 중심으로 제주마를 풀어내고 있다. 말을 중심으로 제주 역사와 문화사를 볼 수 있다. 다만 잣성의 흔적을 더듬고 돌아오는 길. 자꾸만 물음표가 떠오른다. 이게 최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