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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Dec 29. 2022

제주에 산다, 제주가 된다

그냥 제주 살아요-워케이션, '자발적 유배'는 어때?

어디서든 일한다. 놀면서 일도 한다. 무슨 말인지 이해는 되지만, 사실 어렵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급부상한 워케이션 얘기다. 지방소멸 고민을 해결할 대안으로 꺼낸 개념이 코로나19 상황을 거치며 급부상했다. 사무실을 고집하지 않는 새로운 근무 형태를 통해 국내관광 수요를 새롭게 창출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현재는 기업 복지 시스템 적용과 지자체 유치 경쟁에 힘입어 무섭게 달궈지고 있다.

셈이 복잡해진다. 출퇴근 없는 재택근무와 휴양의 개념이 포함되면 워케이션인가. 일과 휴식을 양립할 수 있을까. 업무 시간에 집중해서 일하고 남는 시간 숙소 근처 바다에서 서핑을 하거나 숲길을 걷거나 하는 등 도시 생활에서는 할 수 없었던 여가를 즐긴다면 되는 것일까. 최적지의 기준은 어디에 둬야 하는 걸까. 그래서 지역이 얻는 효과는 무엇인가.

이런 복잡한 조건을 걷어내고 찬찬히 들여다보면 제주는 원래 워케이션의 섬이었다.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워케이션의 핵심을 짚어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워케이션이란 단어 안에 ‘쉰다’는 의미가 들어 있기는 하지만, 일을 한다는 것이 기본이다.

그 전제 조건에 효율과 집중, 무엇보다 결과가 있어야 한다. 일적인 측면에서 ‘나’에 집중할 수도 있겠지만 지자체가 희망하는 관계 인구 개념에서 볼 때 지역과 호흡을 맞추는 무엇도 필요하다. 생소하게 느껴지겠지만 제주는 이미 여러 차례 경험을 했다. 관점만 조금 달리 놓고 보면 답이 나온다.     


제주성지. 오현단
추사 김정희가 제주 유배살이를 했던 곳이다. 추사적거지

유배를 간다, 제주를 누렸다


‘유배’는 무거운 죄를 지은 자를 멀리 보내 격리시키는 벌로, 사형 다음 가는 무거운 형벌이었다. 역사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부터 유배가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 시대 유배를 더 많이 기억하는 것은 15~16세기 이름난 벼슬아치치고 유배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던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유배와 관련한 내용 5860건을 분석했더니 40여곳의 유배지 중 가장 많이 지명된 곳이 제주도였다고 한다. 기록으로 파악한 유배인 700여 명 가운데 260여명이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왕이 있는 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인데다 변방의 방비(防備)를 위한 조직이 있어 통제가 가능했고, 경제적인 여건이 유배인의 의식주를 책임질 수 있는 수준이었다는 합이 맞은 결과다. 유배 관련 연구 자료들을 보면 제주로 유배를 온 사람들 중에 종종 교육자 또는 자기 완성자로서 이름을 남기는 경우가 숱했다.

1637년(인조 15년) 광해군과 1647년(인조 25년) 소현세자의 세 아들 등 왕족부터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1614년(광해 6년) 동계 정온, 1618년(광해 10년) 간옹 이익,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1840년(현종 6년) 추사 김정희 등 당대의 저명한 학자까지 다양한 인물이 중앙 정계의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제주로 쫓겨왔다.그리고 제주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쳤다.

유학 불모지였던 제주에 수학(修學)의 기틀이 된 '귤림서원'(橘林書院)이 현종∼숙종대에 걸쳐 세워졌다. 귤림서원에는 김정, 정온, 송시열 등 유배인과 송인수, 김상헌 등 제주로 부임한 목사 등 5명이 모셔져 있다.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귤림서원이 헐리게 되자 1892년 그 터에 이들을 기리는 조두석 5기를 세워 제단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오현단이다. 이들이 뿌린 씨앗은  제주 교학 발전의 뿌리가 됐다.

추사 김정희는 1840년부터 1848년까지 8년 3개월 동안 제주 유배 기간에 추사체를 완성했다. 국보 ‘세한도’도 제주에서 그렸다.     


제주시 칠성로 옛 모습


피난을 왔다, 문화를 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당시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로 건너왔다. 1951년 5월에는 피난민 수가 당시 토착인구의 절반이 넘는 14만8794명에 이르렀다는 집계도 있다. 말 그대로 혼란의 시기였지만 이 시기 제주에는 문화예술의 한 획이 시작됐다. 피난민 가운데는 문화 예술인이 상당수 섞여있었고, 그들은 길고 짧은 피난 기간 동안 칠성통 다방을 중심으로 예술 활동을 가지면서 지역민들의 예술 문화 요구를 자극했다.

당시 제주로 피난 온 예술인들은 계용묵, 장수철, 옥파일, 김묵, 최현식, 김영삼, 문덕수(이상 문인), 이중섭, 장리석, 홍종명, 최영림, 김창열, 이대원, 최덕규, 구대일(이상 미술인), 김국배, 계정식, 이성재, 이성삼, 변훈, 박재훈, 김금환, 고희준(이상 음악인), 송훈, 이배정, 가칠성, 김광빈(연극·영화인) 등 당대를 대표했던 이들이 두루 거론된다.

 전쟁은 삶의 가장 밑바닥까지 타격을 줬지만 그렇다고 다 주저앉은 것은 아니었다. 피난민이 몰려들며 제주시 원도심 칠성로 일대에 이들을 대상으로 한 다방이 하나 둘 문을 열었다. 새로운 정보와 뉴스에 목말랐던 이들이 모여 신세 한탄만 했다면 사정은 달라졌겠지만 이 곳을 통해 제주 문화예술 껍질을 벗고 나온다.

소설가 계용묵은 동백다방에 머물면서 양중해, 김종원, 고순하 등 제주의 20대 문학청년들과 종합교양지 ‘신문화(新文化)’(1952)를 창간하고, 문학동인지 ‘흑산호(黑珊瑚)’(1953)를 발간한다. 문학 지망생 모임 ‘별무리’도 지도했다. 계용묵에게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 제주 문학계의 1세대들로 다음을 이끈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렇게 물꼬를 튼 다방문화는 이후 미술 전시 공간으로 꾸준히 화룡되며 지역 미술사의 여러 장을 장식한다. 1970~80년대 DJ와 함께 하는 음악다방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 조금씩 퇴색한다.     

그리고, 지금 제주. 제주특별자치도는 국내·외 여행 수요를 지속적으로 창출하고, 잠재적 투자기업의 관심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워케이션 선도지역 조성을 선언했다. 업무만 볼 수 있는 전용 공간을 구축하고 제주도와 투자협약을 체결한 기업이나 잠재투자기업 등을 대상으로 ‘제주 워케이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읍·면 권역별로 농어촌 빈집이나 유휴시설 등을 활용한 체류형 워케이션 시설을 구축하고, 워케이션 공간과 여가활동을 묶은 관광 상품도 기획하고 있다.

이미 기업 차원에서 자체 공간을 마련해 워케이션을 하는 경우도 있고, 공간 수요가 이어지면서 민간에서도 워케이션 공유사무실을 활발히 운영하고 있다.

제주가 가진 자연·문화 자원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흐름이지만 결과는 조금 지켜봐야 하겠다.

‘유배’와 ‘다방’ 키워드는 현재 워케이션과 맞물린다. 서울이나 수도권 등 사무실에서 멀리 떨어진, 그러나 기본적일 삶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여건을 가지고 있다. 커피 등 음료를 앞에 두고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고 창작 활동을 하는 것은 익숙한 ‘카페 워크’의 모습이다. 도시의 특성에 더해 멀지 않은 곳에 천혜의 자연과 다양한 즐길거리까지 갖추고 있다는 점은 ‘최적’이란 표현이 아깝지 않다.     

제주문화관 내 계용묵 선생 관련 전시 자료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공간’으로


그렇다면 다음은 어떨까.

지금과 달리 ‘비자발적’이란 수식어가 붙기는 했지만 유배를 통해 제주에 온 이들 중에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수양과 소통에 쓴 경우가 적잖다. 유배인의 일방적인 시혜적 문화가 아니라 지역 주민들과 상생해 쌓은 문화다. 휴식과 회복, 창조 등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개념으로 변모하고 있다. 제주 유배문화에 깃든 민족사의 정신을 재조명했다.

한국전쟁 직후의 다방문화는 시대를 풍미하던 예술인들의 영향을 받은 지역 예술인들의 자각을 불렀다. 1950년대에 제주문인협회, 제주미술협회가 생겨났고 그 후 계속해 성장하는 배경이 됐음이다.

그런 관점에서 워케이션은 자발적 유배나 피난으로 해석하는 것은 뭔가 느낌이 있다. 대상이 디지털 노마드를 비롯한 원격 근무 지원이 가능한 기업이라고 하지만 필요에 의해 ‘오고 가는’대상지가 아니라 ‘마음을 두고 머무르는’ 공간으로 풀어간다면 그 안에 끌어낼 시너지는 무한하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마지막 작품인 「노인과 바다」는 문학적 완성도와 퓰리처상·노벨문학상이라는 명예에 더해 쿠바의 작은 어촌 마을 코히마르를 남겼다. 그 마을을 배경으로 작품을 썼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안에 살면서 사람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며 일부가 됐던 모든 것들이 만들어낸 결과다. 

헤밍웨이 마을이라고도 불리는 코히마르의 본래 뜻은 '전망 좋은 곳'이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차로 20여 분을 달리면 만날 수 있는데 번잡하고 복잡하고 시끄러운 아바나와는 정말 다른 조용하면서도 여유로운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헤밍웨이의 오랜 친구이자 소설 속 노인의 모델인 그레고리오 푸엔테스의 생가가 남아있다. 푸엔테스는 2002년 104세로 세상을 떠날 때 가지 헤밍웨이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옛날 그와의 추억담을 들려주거나 함께 사진을 찍어주며 생활했다.

워케이션을 희망하는 기업들이 후보지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숙박시설과 이용가능한 편의 시설을 먼저 찾는다는 말을 들었다. 주민등록을 옮길 정도의 정주는 아니지만 인연이 관계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지역에서 살아낸 노하우와 힘에 각각의 기업이 지난 장비와 선행적 경험이 어우러질 조건이 충분하다.

비현실적인 것 같지만 가장 현실적인 일이다. 제주는 이미 해봤다. 더 할 일만 남았다.

소설가 헤밍웨이가 사랑한 쿠바 코히마르 풍경


* 이 글은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 J-Connect 매거진 '겨울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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