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제주살아요 -제주시 원도심을 걷다
마침 정신분석 전문의 김혜남의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을 읽던 참이었다. 수은주와는 별도로 찬 기운이 단단하게 자신의 스텝을 밟아가는 중이다. 이대로 나갈까 말까. 한 5분 쯤 망설이다 길을 나섰다. 옷이 조금 가벼워졌다는 핑계를 대고 뚜벅뚜벅 원도심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세월을 거치며
단단해진 나 자신이 좋고, 세상에 대해 좀 더 깊은 이해를 하게 되고, 웬만한 일들은 수용할 수 있는 여유로움을 갖게 된 지금이 좋다.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게 무엇인지 볼 수 있는 눈 또한 세월이 내게 준 소중한 선물이다’
책에서 읽은 문장이 눈 앞에 펼쳐진다.
매년 피는 꽃에서 같은 향기가 나고, 오래 묵은 먹도 나름의 향내를 품고 있는데, 그 소중한 것이 사람 사는 곳이라고 없을까.
언젠가부터 목에 걸린 가시마냥 신경이 쓰이는 곳 '원도심'에 코를 박아 본다. 특별한 것은 없지만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에는 '그냥'사람 냄새가 난다. 어떤 느낌이라 특정할 수는 없지만 공간 사이, 골목 사이, 사람 사이를 돌고 돌아온 것들에는 그리움이 묻어난다. 누군가의 말처럼 살면서 문득 사람 냄새가 그립고, 바둥 바둥 세상살이에 마냥 서러운 날 원 없이 얼굴을 비비고 악악 소리를 질러도 좋을 느낌이다.
먼지가 묻으면 묻은 대로 비가 씻어 주면 또 그런대로. 누군가 실수로 커피를 쏟으면 원두의 짙은 향이 입혀지고 한창 멋 부릴 20대 젊은 무리가 지나가면 물큰한 인공의 느낌이 섞여도 어색하지 않다.
# 동경과 기억이 어우러진
원도심에 갔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의 구분은 행정에서나 할 일이다. 마음 속 원도심은 그렇다. '어릴 적 동경'이, '지난 기억'이 기가 막히게 어우러지는 공간이다. 무작정 길을 따라 걷다 만나는 것들이 한없이 반갑고, '분명 여기가 맞는데…' 몇 번을 중얼거리다 머쓱 머리만 긁적이다 돌아와도 좋을 정도의 시.공간을 원 없이 누빈다. 낯익은 것들은 한없이 고맙고, 낯 선 것들이 고개을 들이밀어도 받아줄 여유가 생긴다. 그 곳이여서 가능한 일이다.
임대 시세가 얼마고 하는 얘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줄잡아 수 백년의 시간이 응축된 곳에서는 적당히 눈치를 보며 원하는 줄을 대는 것이 상책이다.
반듯하게 각을 잡고, 한 눈에도 비싸 보이는 외장을 하지 않더라도 쿨럭쿨럭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마른기침을 쏟아내며 세상 소풍 끝낼 일을 기다리는 아슬아슬한 행색을 해도 '그립다' '그리웠다' 한마디에 소생한다. 원도심이 지닌 마법이다. 오죽하면 꾹꾹 발도장을 찍는 것 만으로 일기장 하나를 다 채운 듯 꽉 찬 느낌이 들까.
# 시간도 숨을 고르는
원도심은 그런 곳이다.
슬쩍 발을 들이미는 순간 숨 가쁘게 앞만 보고 달려가던 시계 바늘이 '똑~딱~'하고 알아서 숨을 고르고, 치열했던 현재도 마치 어제 일처럼 멀어진다. 도심의 북적거림과 비교하면 한낮의 게으름이 눈에 띨 정도지만 그 게 오히려 정겹다.
평범하다 못해 소박한 일상 속 환한 웃음으로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들을 찾는 동안 시간만 제 갈 길을 간다.
그래서 더 텅비어 보이지만 사실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새 계절과 ‘사람’을.
한때는 예술 좀 한다는 사람들이 휘청거렸고 먹고 살 마음에 늦은 밤과 이른 새벽 사이를 비집은 인기척이 술렁였다. 도시라 부르기에는 어딘지 모자란 느낌들이 어색하게 자리를 잡다 이내 짐을 싸고, 사람의 영역을 빠름과 편의의 도로에 내어주며 새 도심에 역할을 건넸을 뿐이다. 소중한 것은 그때도 지금도 그대로다. 그리웠던 것을 찾고, 새로운 것들을 알아채는 재미가 곁들여졌다.
다만 한꺼번에 품을 수 없어 머뭇거리는 사이 서두르라는 성화에 밀려 시종 헛기침을 한다. 그냥 고개 한 번 기웃거린 것으로 이내 발이 묶였다. 내심 즐겁다.
'도시 재생'에 '문화 회복' 같은 좋은 말이 꼬리를 물지만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느껴보는 것만한 것은 없겠다 싶다.
원하는 것을 얻은 후의 느낌은 환상이다. 없는 것을 가지려 애를 쓰다 보면 무엇을 원했는지 방향을 잃기 십상이다. 분명이 있는 것을 가지고 누리고 느껴보는 것이 먼저다.
# 언젠가 아물 파경같은
그래서 원도심이다. '원래 잘 나갔다'는 의미는 조금 낡았다. 그 곳은 물잔에 떨어진 잉크 한 방울처럼 세상을 바꿀 수도 있는 '티핑 포인트'일 수도 있다. 그러니 오래됐지만 기분 좋은 파동의 진원으로 원도심을 보면 분명 뭔가 있다.
행복했던 시간들도 뒤집어보면 곳곳에 꾸깃꾸깃 접힌 자국이 있다. 한껏 어깨를 부풀린 요즘식 건물들이 햇살의 길을 바꾸고, 날카로운 경적 소리가 그리 오래지 않은 기억들마저 잊으라 강요한다. 투자바람, 개발바람에 한시도 편하지 않은 일상도 원도심이 지닌 정(情)의 파동을 막지는 못한다. 지나간 시간을 모아 한땀 한땀 연결한 조각보의 담담한 매력처럼 그것을 허물기에 약속한 규칙도, 일부러 자극할 약점도 없다. 바쁠 것도 없고 사념 따위는 아예 내려놓은 언젠가는 아물 파경(破鏡)같은 공간이다.
책의 맨 앞장에는 제목과 똑같은 시가 나온다. 나딘 스테어의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이다.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이번에는 용감히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리라.
느긋하고 유연하게 살리라.
그리고 더 바보처럼 살리라.
매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더 많은 기회를 붙잡으리라.
더 많은 산을 오르고, 더 많은 강을 헤엄치리라.
아이스크림은 더 많이 그리고 콩은 더 조금 먹으리라.
어쩌면 실제로 더 많은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일어나지도 않을 걱정거리를 상상하지는 않으리라.
어쩐지 원도심을 향한 마음을 닮았다…..아하 이런, 원도심의 마법에 빠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