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제주 살아요-원도심에서 찾은 다방, 담론 그리고 오늘
매일 반복되는 속에서 속박과 답답함을 느낄 때, 뭔가 갈망하고 갈증을 느낄 때, 사람들은 자유정신이 살아 숨 쉬는 공간에서 더없는 해방감을 느낀다. 자유정신 속에는 파괴성과 창조성이 공존한다. 파괴성이란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불행이 닥칠 것이라는 불행에 대한 인식이며, 창조성이란 이제껏 자신이 해온 역할에 대한 사회적 가치를 더 높이는 것이다. 이럴 때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거나 또 풀어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살롱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 이상의 ‘담론(談論) 철학’을 품고 있다.
담론(談論)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논의하는 것을 말한다. ‘주고 받으며’는 중요한 의미를 품고 있다. 이런 과정 속에 경청(鏡聽)과 상호존중, 다양성의 인정은 물론이고 새로운 방향의 합의나 발전의 기회 등이 싹텄고 열매를 맺었다.
역사적으로 살롱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에서 찾을 수 있다. 기원전 4~5세기 그리스 아테네의 젊은 귀족들은 스포츠를 통해 몸과 마음과 정신력을 일깨우는 동시에 문화 모임으로 지적 욕구를 충종했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저서 「향연」을 보면 지식인들은 당시 화제가 되던 정치, 문화, 철학의 주제에 대해 와인을 즐기며 담론과 토론을 나누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이러한 문화는 로마 시대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대화의 장이던 플라자(Plaza)와 포럼(Forum)으로 이어졌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종교인과 지식인이 예술가들과 함께 아름다운 산문과 시, 음악을 향유하던 무젠호프(Musenhof)를 거쳐 프랑스의 살롱(Salon)이 생겨나는 토대가 됐다.(「살롱과 클럽, 절도 있는 미학」 참조)
유럽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프랑스,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의 살롱과 클럽은 사람을 모이게 하고 의견을 나누며 담론을 펼치는 장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프랑스의 살롱은 우아하고 교양 있는 귀부인이 문화의 주류였다. ‘파리의 여제’로 불린 조프랭 부인의 살롱은 18세기 지식인과 교양인의 사교 중심지가 였다.
독일도 안나 아말리아 공비, 샤를로테 왕비, 크레옌 부인 등의 살롱과 함께 베를린 최초의 살롱을 만든 유대인 여성 헤르츠 부인, 또다른 베를린 대표 살롱을 만든 라헬 부인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오스트리아에서도 발레리나 출신인 비젠탈 부인의 살롱은 히틀러 치하에서도 반독일적 모임을 지속했으며, 박해받는 사람들의 피난처이자 반나치활동가들의 구심점이 됐다.
유럽에 한정해 볼 수 없는 것이, 살롱에 이어 등장한 초창기 카페 문화가 있다. 이스탄불에서는 서민이 이용하는 카페와 고급카페가 나뉘긴 했지만 전 계층이 카페를 즐기며 담론을 나눴다. 런던의 커피하우스는 처음은 여성을 배제했지만 조금씩 문호를 개방하며 민중의 열린 배움터이자 정보센터로, 근대 저널리즘 탄생의 요람으로 발전한다. 계몽의 세기를 상징하는 파리 최초의 카페 프로코프에서는 신분과 종파, 이데올로기와 직업을 가리지 않고 담론을 즐기고 혁명의 중심 역할을 한다.
하나 더 짚고 넘어갈 부분은 과거 담론을 주도했던 카페들이 아직까지도 운영되며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역을 찾았을 때 꼭 들러야 하는 명소로 자리를 잡은 것도 있지만 그곳에 심어져 있는 담론 문화가 세대를 넘어 전달되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물론 그 배경 중에는 가장 솔직한 감각을 자극하는 커피 또는 차 문화가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우리나라 밖의 사정이 뭐가 그리 중요하랴. 하지만 우리에게도 그런 담론을 쌓았던 공간이 있었다. 국내에 유입될 당시 조금 다른 의미로 자리를 잡았던 것을 이해하고 보면 여러 사람이 자주 오가며 낸 길이 보인다.
유럽에서의 카페가 간단한 식사와 커피 또는 차를 제공하는 곳이었다면 1920~1930년대 우리나라 카페는 기본적으로 술을 파는 곳이었다. 당시 유럽 카페가 하던 역할을 했던 곳은 다방이다. 카페가 우리나라에 유입되며 서양식 술집 성격을 띤 것은 일제 강점기라는 사회 배경을 통해 살펴보면 이해가 쉽다.
그 시절 다방은 ‘차만 파는 곳’보다는 ‘차를 마시며 기분을 파는 공간’이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였던 북촌에 형성된 다방들이 그러했다. 차를 마시는 외에 ‘기분을 파는’-달래는의 의미에 가깝지 않을까-‘다방’은 귀족적이고 폐쇄적이고 고답적이며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등의 고전음악을 들려주는 대신에 찻값은 비쌌다.
'차를 파는 다방'에 상인, 관리, 회사원 등이 출입한 것과 달리 이들 '차를 마시는 기분을 파는 다방'에는 주로 예술가, 길거리의 철학자, 실업자, 유한마담, 여급, 대학생들이 드나들었다. 다방별로 주 이용객이 달랐던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과 어떤 곳에서 어울리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정체성이 규정되기도 한다. 장소가 사람을 규정하며, 1930년대의 다방에서도 그런 특성을 살펴볼 수 있다. 사람들은 무리를 형성하고 그들만의 아지트를 만들어 그 안에서 교감하고 소통했다. 이른바 '다점 순례'가 일종의 취미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다점 순례가 일종의 취미로 여겨질 정도로 보편화하며 이른바 '살롱 문화'를 지향하면서 문화 예술인들의 문화 공간으로 기능을 했지만, 곱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다방을 전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벽화’나 ‘금붕어’같은 말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럼 제주는 어땠을까.
제주에서 다방이란 말이 등장한 것은 우리나라의 다방 역사의 시작점보다 훨씬 뒤였다. 척박한 환경으로 먹고 살기도 힘든 섬에서 ‘다방’이란 호사는 환영은커녕 관심을 끌지 못했다. 1947년 10월 7일 제주에 ‘다과점’ 허가를 받은 칠성다방이 문을 열면서 제주 다방문화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1948년 4.3 광풍이 몰아치고 1950년 6.25 전쟁의 포화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사정들 속에서 다방 간판은 살아남았다. 오히려 6·25전쟁 피란민 속에 학자와 예술 문화인들이 유입되면서 '제주 문화'라는 영역이 만들어졌다. 다양한 가능성과 사람, 정보가 모이고 또 퍼지며 커갔던 것들이 없었다면 오늘 제주를 말하는 것 중 여러 군데 이가 빠졌을지 모른다.
역사의 험난한 고비들도 잘 넘겼던 다방이지만 자본의 흐름은 이기지 못했다. 사람이 떠나면서 한 때 성업을 이뤘던 다방 역시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이후 그 빈 자리를 채운 뒷주머니에 도끼빗을 끼운 채 한껏 멋을 내고 LP판을 정리하던 음악다방 DJ도, 주머니 사정이 빤했던 대학생들과 예술인 등 수많은 청춘들이 모이던 주점도, 인터넷 따위는 없어도 그 안에 있는 것만으로 세상에 일어나는 것들을 손금 보듯 알 수 있었던 과거의 모습들이 시나브로 기억으로 남았다.
원도심의 저력은 그 기억을 뿌리로 다시 일어서는 힘이다. 뭔가에 홀린 듯 사람들은 여전히 원도심을 찾는다. 옛 향수 만으로도 좋고, 너무 빨리 각박해진 환경 속에서 사람 냄새를 찾을 수 있음에 안심한다. 거대해진 도시 속에서 일부러 걸을 수 있는 공간이 몇이나 될까. 머물 수 있는 기회는 또 얼마나 될까. 원도심은 그 모든 것들에서 답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