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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Apr 17. 2023

기억 투쟁, 나 아플 수 있어 다행이어라

그냥 제주 살아요 : 30th 제주4.3미술제


무서운 것은 지력도 아니고, 하물며 무력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이의 인격입니다. 제노사이드_다카노 가즈아키


기억투쟁의 대열에 서서


기억투쟁. 

<순이삼촌>의 현기영 소설가는 자신의 문학을 가리켜 “기억(의) 투쟁”이라고 했다. 

독재정권에 의해 “생존자의 기억을 강제로 지우려는 기억의 타살행위”가 행해지는 동안 “너무 두려워 스스로 그 기억을 지워버리려는 기억의 자살행위”도 있었다. 그렇게 지워진 기억들을 소환하고 진실을 구해내려는 ‘기억투쟁’의 기록. 그것은 동시에 “내 존재의 일부가 불타버린 듯한 기억상실”을 극복하고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지를 해명”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소설가의 방식이다. 활자로 각인한 것은 쉽게 바꾸기 어렵다. 기억을 기록하는 일의 의미다. 기록의 방법은 더 있다. 제주 4·3에는 ‘붓의 저항’이 있었다.

고 김현돈 미술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막힌 가슴을 뚫고, 상극의 빗장 열어 상생의 아름다움을 지향한 신명나는 예술적 제의’다.

제주 4·3의 이름을 내걸고 가장 처음 마련한 공식적인 자리는 '41주기 4·3추모제'다. 1989년 서울에 살고 있는 제주 출신 지식인들의 모임인 제주사회문화협의회(제사협)이 제주의 여러 단체에 문서를 보내 4·3민중항쟁 기념행사를 공동개최하자고 제안하면서 결실을 맺었다. 

6월 항쟁 등의 영향으로 4·3 40주년인 1988년부터 4·3에 대한 진상규명 운동이 본격화 한 때였다.

앞서 1987년 제주대학교에서 약식 위령제가 봉행됐고, 같은 해 이념 갈등의 서슬이 퍼렇던 1957년 재일 소설가 김석범씨가 제주 4·3을 세상에 알렸던 소설집 <까마귀의 죽음 鴉の死>이 한국어로 번역돼 국내에 소개되기도 했다.

한번 터진 4·3의 물꼬는 쉽게 닫히지 않았다.

이듬해인 1990년에는 제주지역 10개 단체가 모여 4월제 공동위원회를 구성해 '42주기 4월제' 를 꾸렸다. 

그리 좋은 시절은 아니었다. '붉은'프레임에 갇혀 수십년 고통받았던 기억은 사람들의 손을 붙들었고, 오래 천착해 가시지 않는 비극의 고통은 뇌를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심장이 뛰었다, 뜨거운 피가 흘렀다


하지만 심장이 뛰었다. 오로지 피가, 뜨거운 피가 흘렀다. 그 말 말고는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제 해보자’하고 무작정 주먹을 쥐었는가 하면 그 이면에 무수히 많은 움직임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붓’이다. 1987년 제주 출신 미술작가들로 구성된 그림패 보름코지는 ‘4·3 넋살림’전(1989)을 개최했다. 1990년 서울 인사동 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박경훈 목판화‘전시와 1992년 강요배의 역사그림전 ’제주 민중항쟁사‘의 전국 순회 전시가 파문을 던졌다. 작가 개인의 시도와 더불어 제주 미술 단체 '탐라미술인협회'는 망각을 강요받았던 진실을 드러내고 규명하며, 상처를 치유하는 작업에 천착했다.

그렇게 ‘4·3 미술’이라는 유래없는 영역이 만들어졌다.

4·3미술은 1948년부터 이 땅 제주지역에서 벌어졌던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다양한 양식과 표현 매체를 벌어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미술(고 김현돈 미술평론가)이다.

기억 투쟁 이라는 예술 실천과 예술적 제외라는 미학적 화두로 국내외 인정을 받고 있다.

그리고 30년의 시간을 타고 익어갔다. 4·3을 바로 알리고 기억하자는 취지로 출발점에 섰던 작가들은 기억, 투쟁, 저항, 해원 상생, 공동체 등의 키워드 아래 자신 그리고 연대의 영역을 공고히 했다. 이해하고 이해를 구하는 모든 것들이 손끝을 통해 세상을 향했다.     

그 시간 안에서 단단히 뿌리 내린 작가들이 다시 뻗을 자리를 만들고, 내준다. 쉽지 않았던 만큼 굴곡지고 옹이 진 모든 것들이 예술의 이름 아래 뭉쳤다. 



다시 기록한다의 의미를 읽다


30th 4·3 미술제는 그 궤적 안에 있다.

‘기억의 파수’와 ‘경계의 호위’로 나눠 깊게 숨을 들이키고 또 뱉는다. 걸어온 길을 되집고 다시 멀리 걸어가기 위한 의식이다. 잠깐 휩쓸린 사이 몇 번이고 정신을 놓쳤다. 

감당하기에 그 안의 파동이 묵직하다. 무딘 날을 세운 톱니바퀴가 거칠다 못해 짓눌릴 것 같은 호흡으로 지난을 토해낸다. 

마주하는 일,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무너진다. 몇 번인가 추스러 일어서는 것만으로도 주변 공기가 눅진해지고 간신히 제자리를 맴도는 나를 본다. 다시 기록한다. 다만 할 수 있는, 제의다.

전시는 이미 시작됐다. ‘기억의 파수’는 지난 3월 7일 개막해 5월 21일까지 제주현대미술관에 자리를 잡는다. 지난 30년 간의 4.3미술제 역사를 재조명하기 위해 주재환, 홍성담, 고길천, 부양식, 강문석, 강요배, 강태봉, 고혁진, 김수범, 김영훈, 송맹석, 오석훈, 오윤선, 이경재, 이세현, 정용성, 이명복, 박영균, 양미경, 박경훈 등 1987년 ‘그림패 보롬코지’부터 현재까지 활동 중인 작가 26명의 작품이 모였다.

‘경계의 호위’는 4월 1일 예술공간 이아와 산지천갤러리 등지에서 시작됐다. 제주와 비슷한 기억과 아픔을 공유한 국내 지역을 포함한 4개국 작가 77명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4월의 묵직한 울림을 뭉쳐 던지는 미디어아트 전시 ‘기억의 파수’도 시작됐다. 4월 말까지 제주현대미술관 본관 건너편에 위치한 문화예술공공수장고 영상관에서 만날 수 있다. 4.3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전시장에 갈 것을 귀띔하지만 미디어아트 전시 역시 쉽지 않다. 일단 전시장을 둘러본 뒤 감상하기를 권한다. 준비없이 마주하면 며칠 정신없이 소리지르고 운 것처럼 온몸이 아프다.

전시 공간을 조심스레 돌면서 조금 더 친철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30년의 길을 걸어온 작가들의 눈빛에 흔들렸다. 여전히 간절했다. 4.3이 단순한 지난 역사가 아니란 것을 느껴줬으면 하는 바람이 짙게 깊게 감돈다. 그러니 난 얼마나 다행인가. 기억투쟁 안에 서 있으니. 그 대열에서 벗어나지 않고 다음을 지켜볼 수 있으니. 부디 그럴 생각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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