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아버지의 맛
날씨가 더워지면서 불을 쓰는 요리가 점점 하기 싫어지고 입맛도 없어졌다.
하지만 나는 가정주부로써 가족의 끼니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다. 더욱이 아직 두돌이 안 된 아이를 키우다보니 매일같이 뭘 해 먹여야 하나 고민의 시간을 보낸다.
여름이 다가올수록 쉽게 보이고 가격이 낮아지는 야채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단연 '오이'다!
초록색 오이에 붙어있는 가시를 굵은 소금으로 박박 문질러 씻고 댕강댕강 썰어서 식탁에 놓으면 나와 아이는 생으로 와그작 와그작 씹어먹고 남편은 쌈장에 찍어서 와그작 와그작 씹어 먹는다. 또한 채썰어놓고 김밥에 넣거나 샐러드에 넣거나 국수의 고명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어슷하게 썰어서 고추가루를 뿌려 빨갛게 무쳐먹기도 하고, 소금에 절여 오이송송이를 만들어 여름 내내 먹기도 한다.
그렇게 오이는 반찬으로, 간식으로 어느 덧 우리집 식탁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그 날도 '뭐 해먹지'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여전히 날은 덥고 입맛을 돋게 할 새콤한 무언가가 없을까...
번뜩! 그것이 떠올랐다.
미역과 오이가 후루룩 입에 딸려들어오며 얼음 동동 띄워진 국물을 들이키면 입안 가득 시원해지는 바로 그 맛. '오이 냉국' 이다!
그러자 자연스레 옛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여름이면 아버지께선 항상 오이냉국을 한 통 가득 만드셔서 냉장고에 넣어두셨지. 내가 열 살 무렵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고 쭉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할머니께 조금씩 배우신 서툴고, 가끔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요리들을 먹고 자랐다. 그 당시엔 별 생각없이 먹기 바빴으나 주부가 된 지금 그 음식들을 생각하면 왠지 마음 한 구석에 찌릿해지는 것이다.
어쨌든 그 시절, 아버지가 해주신 오이냉국을 사실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달고 쌔그러운(새콤한) 국물의 맛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 후로도 숱하게 요리를 했지만 오이냉국을 만들어 먹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오이냉국이 떠오른 걸까.
아무튼 오이냉국 만들기에 착수한 나는 미역을 불려서 살짝 데치고, 오이를 채썰고, 설탕, 소금, 식초, 간장을 넣어 조물조물 무친 다음 생수를 부었다. 아이가 먹을 양을 따로 덜어놓고 어른이 먹을 냉국에는 청양고추를 썰어 넣었다. 휘휘 저은 다음 맛을 보니, 아! 맛있었다. 냉장고에 넣어놓고 식사 때가 되어 국그릇에 던 다음 얼음 몇 개를 동동 띄웠다. 다시 한 모금을 들이켰다.
아! 시원했다.
이 맛이구나. 이거, 어른의 맛인 건가.
아삭아삭한 오이와 미끌하고 꼬독한 미역이 씹혔다. 짭짤하면서 새콤달콤한 게 자꾸 당겼다.
그렇게 시원한 오이냉국을 먹은 다음 날.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더운데 시원하게 오이냉국 해먹어라" 고 하셨다. "어! 안그래도 어제 오이냉국해먹었는데. 예전에 여름에 아빠가 맨날 해주셨잖아요~ 진짜 시원하고 맛있던데. " 반가운 마음에 나는 내가 한 오이냉국 자랑을 실컷 했다. 아버지는 가지를 삶아서 찢어넣어도 맛있다는 팁을 주시며 전화를 끊으셨다.
역시 여름엔 오이냉국이다. 가지를 찢어넣은 오이냉국을 아버지께 해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