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아이스크림의 유통기한

이혼 증인 전문가의 기억

by 포포

아이스께끼를 같이 먹으며 자란 친구가 결혼한 지 3년여가 지났을 때다. 아침 일찍 전화를 해 대뜸 주민등록번호를 부르라는 것이다. 얼떨결에 숫자를 불러주고 물었다.

-무슨 일이냐?

“우리 이혼하는데, 서류에 증인이 필요하다네. 네가 우리 이혼의 증인으로 낙점됐다.”

몇 년 뒤 그 친구는 또 한 번의 결혼과 이혼을 했고, 그때도 역시 증인을 섰으며(순전히 주민등록번호를 알려주는 것으로), 이후부터는 다른 친구들이 이혼할 때에도 증인으로 선정되곤 했다. 뭐, 이혼한 친구들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이후부터 나는 이혼 증인 전문가로 불렸다.


당사자들에게 묻지 않은 것은 아니다.

-왜 하필 나냐? (어쩐 일인지, 왜 이혼하냐고 묻질 않았다. 전화로 그 거대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노릇이고 제3자가 그것을 알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것이 이혼증인 전문가가 된 배경이다.)

“이혼한다 하면 다들 말리잖아. 다시 생각해 봐라, 참고 살아라... 착한 척들 하는데, 넌 그러지 않으니까. 쿨하잖아.”

그래서 잠시 쿨하다는 의미를 되새겨보기도 했다. 생각없이 사는 게 쿨이구나..


한세월 지난 뒤, 아이스께끼를 같이 먹으며 자란 친구가 세 번째 결혼생활에 안착했을(?) 때, 눈치를 보며 물었다. 이번 결혼생활은 괜찮은가 보다. 예전 아내들과 많이 다르니?

“달라서 잘 사는 게 아니라 포기하고 그냥 사는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스스로 깨달은 것도 있는 듯했다. 옛날 아내들이 잘못됐던 게 아니라 본인의 문제를 발견했다는 고백도 했다.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으면 대화를 많이 하라고 하잖냐. 그게 다 뻥이야. 내가 정말 대화를 열심히 했는데, 허구한 날 싸우게만 되더라. 전문가들 말 믿을 게 못돼.”

이혼증인 전문가의 자부심을 갖고 나는 쿨하게 응대했다.

-그건 그래. 우리 아버지들 대부분이 과묵했던 것도 이혼 안 하려고 그랬을 거야.

역시 생각없는 응대였는지, 세 번 결혼한 친구는 잠시 갸우뚱하면서 진지한 투로 말했다.

“내가 말이 많은 편이다보니, 대화가 대화가 아니라 잔소리나 훈시였던 모양야. 어느 날 집사람(세 번째 아내)이 강아지 한 마리를 들여 놨고, 내 관심이 온통 걔한테 쏠리면서 대화, 아니 잔소리가 줄어든 모양야.”


아이스께끼를 같이 먹으며 자란 친구는 이후 온통 개 얘기로 대화를 도배했다. 듣다 보니 이 친구는 아내와 사는 게 아니라 개와 사는 게 분명해 보였다. 그야말로 반려견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었다. (개를 키우지 않는 내게도) 개 관련 교육을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반려견 없이 어떻게 사느냐고 안쓰럽게 보기도 했다. 나는 쿨하게 받아들였고 덕분에 개들의 삶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게 됐다.


강아지용 유기농 아이스크림이 있다는 것, 유기농 강아지 옷과 유기농 강아지 장난감이 있다는 사실도 배웠다. 개에게 사용하는 모든 물품의 유통기한을 (사람보다)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과학적인 이유도 알게 됐다. 사람은 스스로 이겨낼 체력과 능력이 있지만 개는 그런 게 부족하다는 애견정신도 배웠다. 그런 과정에서 결혼을 많이 할수록 정신도 성장하고 포용력도 커지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도 일었다.


아이스께끼를 같이 먹으며 자란 친구는 ‘찢어진 난닝구’를 입고 자란, 공무원을 꿈꾸는 범생이였다(당시의 공무원은 지금과 달리 평범하고 소박한 직업이었다). 한 가지, 과한 걸 꼽으라면 순애보에 대한 집념이 남달랐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타나면, 사귄 지 한두 달 만에 ‘결혼하자’고 달려들곤 했다. 그래서 "이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할 때마다 이혼 증인 전문가는 쿨하게 주의를 줬다. 좀 사귀어 보면서 천천히 생각해보지 그러냐.


세월이 흘러 아이스께끼 대신 아이스크림을 같이 먹게 된 우리는 그 동안 사귀었던 여자들을 꼽아보았다.친구가 결혼하려고 했던 여자들의 이름과 얼굴을 하나하나 소환하는 중에 전혀 기억나지 않는 이들도 제법 많았다. 그들과 사귄 기간을 하나하나 헤아려보니 2~3개월 수준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쿨하게 합의를 봤다.

-사랑의 유통기한은 3개월이다. 사랑이나 아이스크림이나 유통기한은 비슷하다.


한 결혼중개회사에서 ‘사랑의 유통기한’을 설문조사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남자는 3개월, 여자는 1년이라고 답한 이들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비슷한 유통기한인데 달콤함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없지는 않다. 아이스크림은 냉동실에 넣어 놓으면 된다. 사랑도 박제화시켜 놓으면 된다. 그것은 사랑이었다고 기억을 박제화하면 무한유통시킬 수 있다. 어쩌면 우리들의 첫사랑, 열병을 안겨줄 만큼 지독했던 사랑의 기억이 모두 박제로 남은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든다. 무릇 의심은 불행한 것. 그러니 지금 당장 열심히 사랑하는 수밖에 없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잊힌 친구에게서 연락이 올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