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이 오면
#1
“라면 먹고 갈래?”
“그럴까?”
여자 사람 친구의 집에서 라면을 맛있게 먹고, 맥심 커피를 또 맛있게 마신 뒤, “그럼 갈게” 하고 나온 적이 있다. 전혀 이상하지 않았고 어색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얼마 뒤 <봄날은 간다>란 영화가 히트 치면서 “라면 먹고 갈래?”가 유행어가 되었다. 이후 라면을 먹을 때 간간이 (결코 자주는 아니다) 이영애가 떠오르거나, 20대 시절의 여자 사람 친구가 떠오르곤 한다.
여사친의 이름은 영미였다. 흔하지만 고급스럽다 여겼다. 흔해 빠진 영자나 영숙이 들에 비해 얼마나 고급스러운가, 하고 생각했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긴 하다. 라면 영미. 보고 싶지만 멋쩍고 찜찜한 추억의 친구. 언제 다시 영미를 만나게 되면 묻고 싶다. 그냥 라면만 먹고 가서 서운했었니? 너도 <봄날은 간다>를 보면서 당황했었니?
#2
세계 역사에서 서민들이 즐겨 먹던 음식은 국수다. 서민 음식은 구하기 쉽고, 고로 값이 싸며, 양이 쉽게 부풀리는 것들이다. 언젠가부터 그 상징이 라면으로 바뀌었다. 라면도 국수의 일종이긴 하지만 간편성과 자극성이 추가로 장착되었다. 특히 한국의 라면이 종주국(일본) 라면보다 인기가 높아진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라면도 그 나라 사람들의 특성을 닮는다. 우리들의 라면은 싸고, 자극적이며, 다양하게 베리에션할 수 있는 응용음식이기도 하다. 누구나 자기 나름의 라면 조리법을 갖고 있으며 라면에 얽힌 추억 한두 개는 뱉어낼 수 있는 나라. 1인당 소비량은 연간 90개에 육박할 수준이니 넘사벽 1위이다. 참고로 라면의 원조국 일본은 40~50개 , 중국인들은 30개 수준이라고 한다. 1인당 소비량이 한국 다음으로 많은 곳은 네팔(60개), 인도네시아(50개) 순이란다.
#3
라면을 자주 먹으면 건강에 안 좋다고 말리던 일도 요즘은 별반 볼 수 없다. 라면의 품질이 좋아진 것인지, 건강에 좋은 음식들이 차고 넘쳐서 굳이 말릴 필요가 없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라면 시장이 크게 성장했고 수출 또한 역대급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라면 좋아하는 우리의 입맛이 만든 결과라고 자부한다. 매운맛 좋아하는 습성까지 세계에 수출하며, 그 와중에 영화의 도움도 받고 있단다. 별걸 다 자부하고, 별게 다 시장을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별 생각을 다하는 겨울이다. 따끈한 라면 한 그릇 먹고 푸지게 낮잠에 빠지면 영미가 나타날까. 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