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살면서 수없이 많은 문제를 풀었고 수없이 많은 오답을 냈지만, 유독 잊혀지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초등학교 2학년인지 3학년인지(어쩌면 4학년이나 5학년일 수도 있다) 시험에 이런 문제가 나온 적이 있다.
√ 다음 중 공통점이 없는 것을 고르시오.
① 곰 ② 말 ③ 해 ④ 개
누구나 알겠지만 (학교에서 원한) 정답은 ③번, 해다. 곰, 말, 개는 동물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해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짱구란 별명을 가진 내 짝은 ④번 개를 찍었다. 그것이 오답 처리가 되자 몹시 억울해 했고, 짱구답게 항의까지 했다.
"곰표 밀가루, 말표 구두약, 해표 식용유… 개표는 시장에 없잖아요."
불행한 사건이었다. 짱구의 항의는 폭소거리가 되었고, 별명도 개짱구로 승격되었다. 별명도 진화한다는 걸 알게 된 결정적 계기다.
짱구는 식료품점 아들이었고, 곰표 밀가루와 해표 식용유와 친하게 지냈던 게 문제였다. 그리고 그 문제가 두고두고 회자되는 것에 짜증이 났는지 또다른 항변을 했다.
“내가 동물이라는 공통점을 모른 줄 알어? 그건 너무 뻔했고 그렇게 쉬운 걸 문제로 내진 않았을 거라 생각했던 거라고.”
그때는 웃어넘겼다. 세월이 흐르면서 짱구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짱구는 억울했고, 개짱구로 별명을 승격시킨 것은 2차 가해가 분명했다.
#2
강원도 춘천에 살고 있던 짱구가 서울 모임에 왔을 때 잠시 실랑이가 일어났다.
한 친구가 "시골엔 언제 내려가냐?" 하고 물은 게 발단이었다. 춘천은 시골이 아니라 도시이고 지도상으로 보면 내려가는 게 아니라 올라가는 게 맞다는 주장이었다. 별걸 다 따진다고, 사소한 데 목숨 걸지 말라는 옆의 옆의 친구가 한 말이 또 불을 질렀다. 짱구는 분개했다.
"이건 사소한 게 아니라 중대한 거다. 모든 걸 서울 중심으로 생각하면서 일어나는 문제가 한둘인 줄 아냐. 너희는 시골의 반대말이 서울이라고 쓸 놈들이야."
듣고 보니 옳은 말이었고 중대하다면 중대한 것 같았다. 단어에 별스런 집착을 갖는 짱구에게 연민의 정을 느껴서였을까, 어느 날 국어사전을 검색하게 됐다(할일이 얼마나 없었으면...).
√ 시골 : 도시에서 떨어져 있는 지역. 주로 도시보다 인구수가 적고 인공적인 개발이 덜 돼 자연을 접하기가 쉬운 곳.
√ 도시 : 일정한 지역의 정치ㆍ경제ㆍ문화의 중심이 되는,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
과연 그런가 싶으면서도 사전의 정의이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에 적확한 정의인지 의심스러웠다. 왜냐하면 지금은 시골이 도시가 되고 도시가 시골이 되곤 하는 다이내믹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내친김에 또 찾아봤다.
√ 서울 : 1. 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는 곳. 2. 한반도의 중심부에 있는 도시.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 라고 씌어 있을 줄 알았다가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특히 한반도의 중심부에 있는 도시, 라는 2번 정의가 왠지 찜찜했다. 굳이 대한민국의 중심부에 있는 '도시'를 고르라면 춘천이 아닐까. 서울=춘천이 아닌 것은 명확한데, 이젠 사전도 미심쩍다. 나는 짱구를 닮아가고 있는 것인가.
#3
참고로 참과 거짓의 경계에 대한 의문을 덧붙인다.
곰표 밀가루는 곰표 밀맥주를 만들었고, 말표 구두약은 말표 흑맥주를 만들었다. 이 말은 참일까 거짓일까. 이 업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입장에서도 헷갈린다. 곰표(대한제분)와 말표(말표산업)는 상표권을 제공하고 수수료를 받을 뿐 직접 맥주를 제조하지 않는다. 브랜드 이미지를 절묘하게 혼용해(이를 콜라보레이션이라 칭한다) 소비자에게 어필하는 것뿐이다. 아, 물론 맥주맛만 좋으면 그만이지, 별걸 따 따지는 사람이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과 거짓의 모호한 경계를 애써 구분하려는 의지가 식지 않는 이유는 뭘까. 혹시 정의와 불의가 명확하게 구분되던 시대에 성장한 후천적 DNA 때문은 아닐까. 문득 이런 논담을 짱구와 나누고 싶은 충동이 일렁이는 한편에서 꼰대의 뒷모습이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