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섭이의 미래
동섭이는 책을 참 빨리 읽었다. 후르륵 후르륵 국숫물 마시듯 글이 좔좔 흘렀다.
아이들이 하나둘 따라하기 시작했다. 빨리 읽기 시합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6학년 3반 담임선생님은 그것을 내버려두었다. 빨리 읽기 경쟁에 들어간 아이들이 흥미로운지, 어쩐지 더 자주 더 많은 아이들을 일으켜 세웠다. 다음 단락은 태수, 다음 단락은 선옥이, 다음 다음 다음 누구도 천천히 또박또박 문맥에 맞게 읽으려는 아이는 없었다.
그 반 전체가 빨리 읽기 중독이 되어 있었다. 나는 중학교에 들어가 비로소 각성을 하게 되었다. 응식이와 정남이가 책을 읽으면 소리가 또박또박 들리고, 쉼표와 마침표가 왜 있는지 알게 되었다. 빨리 읽기에 목매었던 초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면서 1년 내내 어이없게 보낸 게 아니었나 싶었다.
동섭이는 2반, 나는 5반, 떨어진 때문인지 그절친도 바뀌었지만 관심이 없지는 않았다. 먼 발치에서 2반 아이들을 곁눈질하거나 거기에서도 빨리 읽기 시합이 일어나는지 궁금해 했다. 물론 알 리 없었다. 남의 반에 들어가 공부할 수도 없었고, 그 반 아이들에게 빨리 읽기를 묻자니 왠지 유치해 보였다.
세월이 흘러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머리칼 휘날리던 멋쟁이 선생님이었는데 영정을 보니 머리 반쯤은 벗겨져 있었다. 향을 올리고 절을 하는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왜 제지를 안해 주었을까? 빨리 읽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음미하며 또박또박 읽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1년 내내 안하고 보낸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혼자 답을 내렸다. 당신도 고민을 했겠지. 읽는 데 정석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빨리 읽기 경쟁이 만든 장점도 많았다. 쉬는 시간 아이들은 다음 과목 책을 열심히 읽었다. 한번이라도 읽어본 뒤와 그렇지 않고 읽을 때가 달랐다. 그래서 우리 반 아이들은 대부분 예습을 한 셈이다. 일부는 책읽기의 즐거움을 맛보았을 것이고, 일부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꼈거나 나처럼 쓸데없는 궁금증을 수십 년 안고 살기도 했을 것이다.
동섭이는 왜 그렇게 빨리 읽기에 능했을까. 훗날 녀석의 인생을 보니 어렴풋이 짐작이 됐다. 동섭이는 회계사가 되었고, 숫자 달인이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주산을 했고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 손가락을 쉼없이 움직이던 모습이 선하다. 눈동자는 45도 사선으로 허공을 보고 피아노치듯이 손가락을 꼬물거리면 뭔가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연필돌리기도 잘했는데 어떤 때는 양손을 다 사용해 돌리곤 했다. 그때 이미 녀석의 미래가 결정되었던 걸까.
언젠가 전자계산기와 주산의 경기가 TV로 중계되었는데, 그때 나는 무조건적인 확신을 했다. 주산이 이길 거야. 흠흠. 그때는 확실히 주산이 이겼었다. 그때는 그랬다. ㅎ,ㅎ, 그나저나 지금도 주산학원이 있나? 주산, 주판이란 기구는 골동품으로나 존재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