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게 여친

어떤 선택의 미래

by 포포

선이는 거무잡잡한 얼굴에 눈이 컸다.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고 매사 명쾌했다. 가령 친구들이 모여 이러쿵저러쿵 의견이 갈리고 어물쩡거릴 때면 늘 선이가 나서서 결론을 내렸다. 똑부러진 성격에 공부를 참 잘했고 우쭐해하는 허영기나 가식도 없었다. 나는 선이를 은근히 좋아했지만 티를 내진 못했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을 때 나는 선이네 만화가게에서 하루종일 만화를 봤다. 가게 셔터를 함께 내린 뒤에는 호프집으로 가 술을 마셨다. 만화가게를 하기엔 뭔가 아까운 친구라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고, (누구나) 살아가는 과정에서 겪을 만한 경험이려니 생각하며 물었다.


"왜 만화가게를 하는 거니?"

선이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왜? 이상해? 만화가게 좋지 않아?"

"아, 나야 좋지. 내 말은 네가 이걸 하고 있는 게 이상하다는 거."


선이가 또 되물었다.

"내가? 나는 어떤 걸 해야 하는데?"

글쎄,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선이가 뭘 하는게 어울릴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다만 만화가게 주인은 아닌 것 같다는 내 생각도 어딘지 군색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날 우리는 재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게 술을 마셨다. 그리고 선이는 내게 읽을 만한 책을 빌려달라고 했고, 다음날인가 그 다음날인가 몇권의 책들을 (소설과 철학 부류였을 것이다) 갖고 만화가게를 갔다. 나는 만화를 보고 선이는 내가 준 책을 봤다.


군에 복귀하기 전날 선이네 만화가게 셔터 문을 내리고 집까지 배웅해줬다. 한적한 길을 걸으며 무슨무슨 얘기를 한참 동안 했는데 어떤 대화였는지 영 기억나지 않는다.


몇 달 뒤 전역한 뒤 나는 선이네 만화가게부터 찾아갔다. 멀쩡한 대낮인데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아예 문을 닫은 것인지, 잠시 문을 닫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음날에는 늦잠을 실컷 자고 오후 늦은 시간에 덜렁덜렁 만화가게를 찾아갔다. 박봉성이나 고행석의 신간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만화가게는 분명히 열려 있으리라, 열려 있어야 한다고 우기며 걸어갔다.


만화가게 셔터는 올라가 있고 사람도 있었지만 선이는 없었다. 만화책들도 없었다. 검정 모자를 쓴 아저씨가 줄자를 갖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걸 보고, 또 한 곳의 만화가게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한 곳의 만화가게가 다른 만화가게들과 얼마나 다른 곳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다음날인지 다다음날인지 선이네 집으로 전화를 했다(그때는 휴대폰이 없어서 집 전화를 해야 했다). 목소리가 비슷한 선이 동생이 전화를 받았다. 동생이 내 이름을 알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러잖아도 언니가 부탁한 게 있어요. 오빠한테 연락오면 꼭 전해달라고 해서 제가 잘 보관하고 있거든요."

좋은 예감보다 불길한 예감이 더 잘 맞는다는 법칙을 알려준 건 선이였다.


나는 선이 동생으로부터 예쁘게 개켜진 보따리를 받았고, 거기에 내가 빌려주었던 책이 들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책 한 권 한 권을 (어떤 기대감을 안고) 꼼꼼히 살펴봤지만 어디에도 내게 전달하는 메모나 어떤 형태의 메시지도 없었다.


선이 동생은 내게 보따리를 전하면서 괜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미안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보따리를 들고 돌아서는 내 등을 향해 모기처럼 가늘게 말을 했는데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 급하게 결정하긴 했는데, 그래도 잘 살거예요. 형부는 좋은 사람이에요.


선이가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한 배경을 지금도 알 수는 없지만, 세월이 지난 뒤 회고해보니 참 잘한 선택이었다. 좋은 아내, 좋은 엄마로 늙어가며 건강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을 확인하며 갖게 된 생각이다. 선이는 아름답고 똑똑하고 결단력 있는 여친이었고, 다른 직업으로 사회생활을 했다면 멋진 파워우먼이 됐을 거라는 확신이 있지만 그렇다고 인생이 행복했으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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