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맛
어릴 때는 낯선 것을 두려워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호기심이 더 커졌고, 그러자 맛있는 것들이 늘어났다. 낯선 음식을 앞에 두고 ‘맛없으면 어떡하지?’ 걱정하는 것과 ‘얼마나 맛있을까’ 상상하는 것의 차이는 크다. 그것을 깨달은 뒤부터 낯선 음식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씩 떨쳐내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음식이 바로 중국 취두부다.
대만을 여행하면서 하루에 한번은 취두부를 접했는데 그때마다 난감했다. 코 딱 막고 먹어보면 의외의 맛을 느끼게 되고 그 맛에 길들여진다는 조언을 못 받은 건 아니다. 삭힌 홍어의 역겨운 첫맛을 극복하고 오묘한 맛 세계를 찾고야 만 경험을 떠올리며 과감하게 도전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그래도 함께 하는 일행들에 대한 예의를 생각해 맛있게 먹는 척 애를 썼다.
하지만 입맛은 숨길 수 없다. 세상에 숨길 수 없는 것은 재채기와 사랑의 눈빛뿐만이 아니다. 명품으로 불리는 음식은 모두 비밀을 갖고 있지만 입맛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당황스러웠지만 일행들은 나를 배려해 줬고, 더 좋은 맛을 권하며 입맛을 추스려 줬다.
귀국하자마자 거제도 일정이 생겼다.
바닷가에 가면 회를 먹게 된다. 나름 맛있는 음식을 준비한 호스트에게 차마 ‘회맛을 모른다’고 말할 수 없어 감사한 표정으로 열심히 먹었다.
생선회의 호불호는 낯선 음식과는 차원이 다르다. 의식을 바꾼다고 해서 체질이 바뀌지는 않으니까. 차라리 알레르기라도 있다면 선택이 명료할 텐데, ‘날것’ 흡수력이 약한 체질은 설명도 애매하고 이해도 어려운 영역이라 양을 조절하며 맞출 수밖에 없다.
열심히, 맛있는 척, 곁들이(츠키다시) 안주발로 위장했지만 그는 대번에 알아채고 말했다.
ㅡ오늘의 메뉴는 실패, 다음에는 육류로 합시다.
아, 숨길 수 없는 맛의 표정이라니.
우리는 정직과 솔직을 올바른 가치로 공유하며 살아왔다. 정직은 태도이고 솔직은 태도를 발현하는 행동이다. 정직은 스스로에게 중요하고 솔직은 상대에게 중요하다. 돌아보니 정직할 때보다 거짓됐던 때가 많았고 솔직할 때보다 솔직하지 않던 때가 많았던 것 같다(누구나 그럴 것이라 추측하지만 아닐 수도 있겠다). 맛은 정직한 것인데 입맛은 솔직하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도같다.
자책하는 것은 아니다. 솔직한 것이 늘 바람직한 결말을 내지도 않는다. 솔직 때문에 낭패를 겪기도 하고 정직이 일을 꼬이게 하는 경험도 많이 해봤다. 그러며 자위한다. 가릴 것은 가리고 숨길 것은 숨기자고. 그렇게 하나둘 비밀들이 쌓인다. 비밀은 왠지 음험한 느낌을 주지만 한편으론 신비한 매력을 주기도 한다.
비밀이 많은 사람은 가까이하기 꺼려지고, 비밀이 없는 사람은 심심하다. 사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 그리고, 인류가 비밀을 토대로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자산 중 하나인 비밀투표 선거가 끝났다. 개인의 비밀들을 모아 거부할 수 없는 끄집어낸 제도, 비밀투표는 솔직하기 힘든 이들의 심경을 단순하게 그러모아 강력한 힘을 부여하는 놀라운 제도다. 이 놀랍고 비밀스런 표들의 지시는 무엇인지, 봄나들이 강행군을 하면서 음미해 봤다. 요즘 세상에 숨길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나도 모르는 내 마음속까지 노출되는 시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