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죽을 먹으며

기능보다 추억이 건강에 좋다고요

by 포포

남도로 여행 갔다가 팥죽을 먹었다. 제대로 된 팥죽을 먹어본 지 참 오랜만이었다. 내 어렸을 때 별명이 '팥죽호랭이'였는데 성인이 되어 가면서 점점 팥죽 먹는 기회가 줄어들었다. 단팥죽은 차고 넘쳤지만 팥죽은 점점 사라져 갔다. 팥죽과 단팥죽은 완전 다른 죽이어서 나는 단팥죽을 죽으로 치지 않았다.


팥은 싫어하는데 팥죽은 좋고, 팥죽은 좋아하는데 단팥죽은 싫고, 단팥죽은 좋아하지만 팥죽은 싫어하는 이가 제법 많다. 팥은 좋아하지만 팥밥은 싫어하는 이도 있고, 팥이라면 뭐든 좋아하는 이들도 제법 많다. 팥죽, 팥빵, 팥밥, 팥차, 심지어 양갱에 이르기까지ᆢ 팥소가 들어간 모든 것을 좋아하는 팥광들이 있는데, 그들이야말로 귀신이 범접하지 못할 사람들이다. 호랑이는 곶감을 무서워하고 귀신은 팥을 무서워한다니까.


"팥죽 좋아하세요? 근방에 팥죽명가가 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군침이 돌고 허기가 찾아왔다. 일행 중 밭 알러지가 있는 이가 있었지만 다른 메뉴가 있으면 괜찮다고 해서 기어이 먹고야 말았다. 명가는 명가였다. 팥죽의 농밀함이 어린 시절 할머니가 쑤어주던 맛을 제법 구현해 낸 데 대해서 주인장에게 감사를 전했다. 무엇보다 옆에 동치미가 놓여 있어서 더욱 좋았다. 팥죽을 많이 먹으면 속이 시릴 수 있는데 동치미가 그것을 막아준다고 할머니가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팥죽은 확실히 귀해졌다. 다른 할머니들도 팥죽과 함께 돌아가셨는지 사회 전반적으로도 팥죽 보기 힘들어졌다. 할머니 대신 어머니가 팥죽을 쑤어주면 될 텐데 어머니는 ‘팥은 쉬 상한다’는 과학적인 이론과 ‘귀신 쫓는 의식은 미신’이라는, 당신의 의식과 전혀 무관한 대답을 하며 팥죽 쑤기를 기피했다.

나이 들며 음식의 이모저모를 알게 되면서 이해가 됐다. 팥죽이란 것이 참 골치 아픈 음식이었다. 팥죽은 다른 음식들처럼 ‘홈메이드’형 상품이 없고 만드는 과정이 여간한 정성이 아니면 만들기 어려운 음식이었다. 간단히 정리한 조리법을 봐도 알 수 있다.


1. 붉은 팥을 푹 삶는다(정말 푹 오래도록 삶아야 한다, 팥뿐만 아니라 찹쌀도 오래 불리고 삶아야 한다), 2. 체에 거른다, 3. 팥물에 불린 찹쌀을 넣고 약한 불에 끓인다, 3. 주걱으로 저어가며 뭉근하게 끓여야 한다. 4. 사전에 찹쌀가루를 반죽해 새알과 같이 동그랗게 뭉친 새알심을 많이 만들어 놓아야 한다, 5. 그 새알심(경단)을 죽이 거의 익어갈 무렵 팥죽에 넣어 또 끓인다, 6. 소금으로 적당히 간을 맞춘다…


뭉근하게 끓인다는 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영어에서는 boil이라는 단어와 cook, make 같은 포괄적 의미로 일괄해 끓임의 미세한 차이를 설명하기 쉽지 않다. 라틴어에서도 가열을 의미하는 단어는 ‘태운다’ 하나뿐이라는 말을 들었다. 우리의 가열용 단어는 수없이 많다. 굽기, 삶기, 볶기, 덥히기, 끓이기, 데치기, 지지기, 재지기, 달이기… 곤다, 찐다, 데운다 식으로 미묘한 의미의 말이 수도 없이 이어진다. 뭉근하게 끓이기는 시간과 정성의 합체가 필요한 은근한 가열이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끓인 팥죽은 쉽게 상하는 팥의 특성 때문에 오래 보관하지도 못하니, 들어간 노력을 감안하면 적잖이 억울하고 허망할 법도 하다. 자식이 나이 먹는 만큼 어머니 나이도 들어가고 있었고 옛날처럼 궂은 일 대신해주는 딸이나 며느리도 없는 시대이니 아쉽지만 팥죽은 잊어야 했던 것이다.


팥죽을 우리나라 대표음식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팥죽은 할머니와 동지섣달, 호랑이, 초승달, 동치미를 떠오르게 해주는 겨울철 대표음식 정도는 된다. 음식은 육체뿐이 아니라 마음을 살리는 역할도 한다는 것을 팥죽이 가르쳐 주었다면 지나친 의미 부여일까. 팥죽 회상을 끝까지 들어준 음식 동행자가 이렇게 위로해 주었다.

"간에 좋다, 해독 효과 있다, 다이어트에 좋다 하는 지식들은 어떤 점에서 하찮은 거죠. 기능보다 추억이 건강에 더 좋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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