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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포포 매거진 Dec 12. 2022

Supermarket

나의 취향을 발견하고 만들어진 곳

section03

MY NEW UNIVERSE 

p.152~165



내가 좋아하는 것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대학에서 미술을 배우고 그림책 삽화가가 되고 싶 

다고 줄 곧 생각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1학년 때 삶의 터전을 일본으 로 옮기며 미래와 진로 

에 대한 생각의 큰 전환기를 맞이했다. 낯선 문화를 경험하면서 문화, 언어, 인문학 등 여러 

학문에 호기심이 생겼다. 무전공으로 입학해 여러 분야를 배울 수 있는 대학으로 진학을 결 

심했다. 학부 3학년 때 전공을 정해야 했는데 단순히 책 읽는 것이 재미있다는 이유로 역사 

를 전공으로 선택했다. 


대학을 다니는 내내 요리책을 찾아보고 핀터레스트에서 음식 일러스트를 검색해 저장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전공과는 거리가 먼 요리책(cookbook)에 대해 졸업논문 

을 적었다. 취업을 위해 전략적으로 대학 생활을 보내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하 

고 싶은 것을 열심히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주말에는 화방에 가서 다양 한 화구를 구경하고 

평일에는 도서관 컴퓨터로 일러스트 사진을 열심히 찾아보고, 취미로 그림을 꾸 준하게 그리 

는. 학업보다 취미에 충실한 학생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졸업 시즌이 왔고 나는 아무것 

도 결정하지 못한 채 백수 라이프를 맞이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림 그리는 것보다 재미 

있는 것을 찾지 못했지만, 막상 그림만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남들 다하는 직장생활을 

해야 한다는 강박과 경제적 독립에 대한 압박으로 백수 생활을 6개월 만에 종식하고 취업 

을 했다. 출퇴근 시간에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뭘까?’라는 출구 없는 

질문을 매일 했다. 도쿄라는 큰 도시에서 남들처럼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자부심이 나 

를 더이상 전진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사직서를 내고 한국에 귀국해 조용한 

고향 집으로 향했다.   

길 위에서 배운 아트


시끌벅적 놀 것도 할 것도 친구도 많은 도쿄라는 큰 도시와는 달리 조용하고 아는 사람 하 

나 없는 고향에서의 삶은 안식과 외로움 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퇴근 후 고독한 시간을 보내 

며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고민을 다시 진지하게 시작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 

하지 않았으니 나는 그림으로 먹고살 수 없어.”라는 변명으로 여태껏 버텼지만, 울리지 않는 

조용한 휴대폰과 남아도는 시간 앞에서 더는 그 변명이 이유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뒤늦은 

미술학도가 되기로 결심했다. 퇴근 후 포토샵을 독학으로 공부하고 레퍼런스가 될만한 책 

들을 아마존에서 열심히 찾았다. 인근 도시로 캘리그라피와 레터 프레스를 배우러 다니기 

도 했다. 주말마다 그림을 그려서 인스타그램에 열심히 업로드했다. 


혼자서 하는 작업이 고독해지고 내 그림이 사회와 연결되었으면 좋겠다고 진지하게 고민하 

고 있을 무렵, 일러스트 의뢰가 들어왔다. 줄 곧 일이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 순간을 맞이하니 기쁨보다는 내 그림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 있다는 안 

도감이 먼저였다. 그러면서 대학생 때부터 그려왔던 그림을 모아둔 파일철과 기록으로 남겼 

던 인스타그램 피드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대학 4년 동안 꾸준히 검색했던 음식 일러스트, 

요리도서관에서 수없이 뒤적이던 요리책, 19세기에 출판된 빈티지한 고서(古書). ‘나는 왜 

이런 그림을 그리는가? 내가 좋아하는 그림 스타일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을 나 자 

신에게 던졌다. 직장에서 만난 고객이 펠트 아티스트였는데, 그분의 작품에 큰 영향 을 받았 

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직장 근처에 위치한 감각적인 카페와 샵. 출퇴근길, 장보는 시간, 주 

변 사람들과 함께한 식탁, 지나쳤던 많은 시간이 곧 배움의 순간이었다. 내 안에 저장되어 

있던 그 모든 것을 기록하고 내 스타일로 만들어 온 것이다. 그래서 내 일상을 더 열심히 살 

아내고 싶다. 일상의 작은 발견을 통해 새로운 창작의 시도를 지속해나가고 싶다.

슈퍼를 투어하다


돌이켜보면 어릴 때부터 엄마를 따라 슈퍼에 가는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슈퍼에 가는 것 

을 좋아하는 부모님의 영향을 받았는지 나도 슈퍼에서 구경하는 것을 즐겼다. 신상품이 나 

오면 먹어보고 싶고, 신기하게 생긴 채소를 보면  요리해보고 싶고, 예쁜 패키지가 있으면 일 

단 사보고 싶은 마음이 마구 생긴다. 지역의 소도시에 오랫동안 살았던 나에게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시작된 대도시에서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새로운 발견이었다. 한국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항상 가는 슈퍼가 정해져 있었는데 자취를 하면서 내 취향과 내가 찾 

는 식료품이 있는 슈퍼를 고를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메리트였다. 그래서인지 유명한 레스토 

랑이나 카페보다 동네방네 슈퍼를 찾아다녔다. 가격보다는 식료품의 다양성(약간은 특이 

한), 제품 패키지, 매장 디스플레이, 분위기가 독특하고 예쁜 곳을 좋아했다. 심지어 매장에 

서 쓰는 쇼핑카트와 물건을 샀을 때 담아주는 쇼핑백에도 관심이 많았다. 


넉넉하지 않던 유학생 주머니 사정에 어떻게 하면 저비용으로 다양한 식료품들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을지 고민하다 아르바이트가 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집에서 1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전철을 무려 2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이탈리아 수입 식료품 마켓 치즈와 샤퀴테리 코 

너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내 주머니 사정으로는 살 수 없던 다양한 외국 식자재를 맛 

보며 직원 할인의 혜택까지 호사를 누렸다. 하는 일은 간단했다. 커다란 유럽산 치즈 덩어리 

가 매장에 도착하면 작은 사이즈로 잘라 포장하고, 프로슈토 주문이 들어오면 돼지 뒷다리 

를 슬라이서에 장착 시켜 자르고, 와인 문의가 들어오면 냉장고에서 와인을 꺼내는 등의 업 

무였다. 체더치즈가 뭔지 로제와인이 뭔지 몰랐던 나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세계였지만, 

새로운 것들을 하나하나 맛보며 배워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슈퍼라는 곳의 매력뿐만 아니 

라 고단함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값진 경험이었다. 


졸업 후 취업을 하고 나서는 본격적인 회사원 버전의 슈퍼투어를 시작했다. 회사가 외국인 

이 많은 동네에 있어서인지 인근 슈퍼에는 평소 잘 보지 못하는 이국적인 제품들이 많았다. 

점심시간이면 슈퍼로 산책하러 자주 나갔고, 월급날이면 바구니 한가 득 음식을 채워 계산 

대로 향했다. 보통 퇴근하고 나면 체력이 방전돼 흐느적거리며 귀가를 하고는 했는데, 쇼핑 

백을 가득 채워 집으로 향하는 날이면 퇴근길이 왜 그렇게 신이 났던지. 슈퍼라는 공간은 

그 지역에 머무는(꼭 거주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과 일상의 식탁을 보여주 

는 곳이 아닐까.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일상적인 곳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발 

견이 넘치는 곳 말이다. 그래서 새로 생긴 슈퍼나 집에서 먼 슈퍼를 구경할 때면 여기엔 어떤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긴다. 내가 자주 가는 익숙한 슈퍼라 할지라도 

그 어느 곳보다 다양한 디자인, 컬러, 모양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 가까이 있어 친근 

하고, 때로는 맛볼 수 없기에  상상하게 되고, 때마다 행복의 순간을 선사해주는 것들이 가 

득한 곳. 그렇다. 일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지만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두근거림 

으 로  가득한. 슈퍼를 투어하는 재미는 바로 이런 거다.  



writer 이한나 

9년간 일본에서 살다 2년 전 조용한 고향으로 돌아왔다. 평일에는 회사원으로 일하고, 

주말에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수채화, 펠트, 레고 등 여러 재료로 음식에 관련된 

재미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hannalee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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