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차창 너머로 표지판들이 차례로 넘어간다. 자주 들어 익숙한 지명 사이에 처음 보는 이름이 드문드문 튀어나온다. 표지판 속 낯선 지명들을 골라 일부러 소리 내어 읽어본다. 평생 한 나라에서만 살아왔는데 아직도 생소한 지명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이 오늘따라 유난히 새롭다. 새로이 알게 된 그곳에는 어떤 볼거리가 있는지, 괜찮으면 나중에 한번 놀러 가볼까 하는 마음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검색을 하며 운전석 옆자리를 지킨다.
매일의 어느 한순간을 그림으로 남기기 시작한 요즘, 입안에 굴려보는 오늘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소중하다. 이응이 귀여운 ‘ㅗ’를 만나고, 서글서글한 ‘ㅡ’가 니은과 리을을 만나게 하는 단어, 오늘. 그림일기를 십여 일 넘게 그리고 나서야 오늘 하루의 인상을 결정하는 일이 오롯이 내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오늘’은 바로 나의 것이었다. 차를 타면 잠시 풍경을 즐기다 휴대폰을 보거나 잠들기 일쑤였던 조수석 지기의 눈에 표지판이 들어온 것은 어쩌면 진정 나의 것이 된 오늘에 대한 들뜬 마음의 발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의 시작 혹은 끝에서 그림일기로 남길 순간을 선택한다. 책장을 넘기듯 그날 하루의 여러 순간들을 머릿속으로 하나씩 넘기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압도하듯 덮쳐오는 단어나 이미지가 있다. 아니 사실은 하루를 되감기 하기 훨씬 전부터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던 감정이나 생각들이 머릿속 자리를 꿰차며 버티고 선다.
오늘은 뭘 그릴까?
언제나 내가 가장 먼저 건져올리게 되는 순간은 바로 힘들고 우울한 순간들이다. 그것은 마치 아주 오래되어 이미 몸과 마음에 배어버린 슬픈 버릇과도 같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하루를 거르고 걸러 가장 농도 짙은 우울을 추출하고 저장해왔다.
오늘이 없다.
그러다 깨달았다. 언제나 나의 두 발이 아주 조금 허공에 떠 있는 이유를. 늘 크고 작은 불안을 안고 사는 이유, 복기하며 외우다시피한 기억들을 제외하고는 과거 어느 사소한 날들의 기억이 거의 없는 이유, 나아가기보다 뒷걸음질이 더 친숙한 이유를 드디어 알게 되었다. 나는 과거 어느 시점에 닻을 내리고는 그것을 거두지 않은 체 표류하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오늘은 대부분 분명히 있으나 사실은 없는 것과 같았다.
아침 일기를 쓰며 오늘로부터 나아가 맞이할 내일에 대해 생각했다면 그림일기를 그릴 때는 오늘을 확실히 그러잡고자 노력했다. 오늘은 숨만 쉬고 있다면 당연히 주어지는 내 것인 줄로만 알고 살았는데 아니었다. 오늘은 나의 두 손으로 직접 꽉 잡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그렇게 잡은 시간이야말로 나의 오늘이라 말할 수 있다.
하루의 기억을 깨우고 핀셋을 든 연구자처럼 가장 기억하고 싶은 좋은 순간을 골라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쓴다. 미처 몰랐는데, 좋은 순간을 기록하는 일은 나에게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나의 우울은 대부분 밖에서 들어온 자극에 대한 기민한 반응이었으나, 나의 행복은 이미 처음부터
내 안에 있었다.
매일 그림은 그렸지만 종종 오늘의 장면이 빠져있던 나의 그림일기에 가장 기억하고 싶은 하루의 장면을 남긴다. 다소 심란하고 괴로웠던 지난 몇 주 동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웃고, 잘 먹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 장면들이 나의 바람막이가 되어준 덕분이다. 심란했지만 심란하기만 하루는 아니었고, 괴로웠지만 그보다 더 큰 행복을 안겨준 순간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 사실을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분명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내가 서 있는 곳 깊숙이 두 발을 단단히 박아 넣을 수 있도록 큰 힘을 주었다.
우울과 불안은 나의 피부와도 같아 완전히 떼어내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앞으로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을 것 같다. 두 발이 땅에 내려와 오돌토돌한 땅의 질감과 차고 더운 온도며 흙의 향취를 이제 온전히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직은 작고 가느다란 오늘의 순간들이 오래오래 길게 뿌리를 내려 내가 흔들리는 순간마다 나를 지켜줄 것이다. 나의 오늘은 ‘내 꺼’. 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