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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포포 매거진 Feb 07. 2024

보드게임 최약체의 고민


우리 가족은 여유 시간이 있을 때면 보드게임을 즐겨 한다. 둘이 있을 땐 2인 보드게임, 3명이 모두 모이면 다인용 보드게임을 하는데, 때로는 게스트를 한두 명 초빙해 평소에는 인원수 허들에 걸려 도전하지 못했던  4인용이나 5인용 보드게임을 즐기기도 한다. 크리스마스 이브도 예외는 아니다. 이번에는 한 번 판을 깔면 3시간은 기본이고 4시간 이상이 걸리기도 하는 보드게임을 펼쳤는데, 언제나 서로 머리를 풀가동해 그렇게 열심일 수가 없어서 이틀에 나누어 플레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보드게임이 끝나고 나니 너무 피곤해 드러누워야 할 판이었다. 


보드게임은 저마다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특히나 우리 가족이 사랑하는 전략 게임들은 스토리도 탄탄하거니와 세심하게 설계된 규칙들이 유기적으로 함께 작용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다 보니, 플레이를 하다 보면 보드게임 판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실제 현실의 인생살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와 함께 보드게임을 하다 보면 그 사람의 선택과 플레이 방식을 통해 일상생활 속에서는 사회화되어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았던 본질적인 됨됨이를 엿보게 되고는 한다. 어찌 되었든 게임이기에 감정은 느슨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득점과 생존에 따라 승패가 갈라지기에 제법 현실적인 긴장감이 감돌기 때문이다. 


정말 마음에 들어 꼭꼭 씹으며 읽었던 책 <태도의 말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이 하나 있다. 정신과 전문의 김병수 님의 ‘성격은 생존 본능과 연결되어 있다.’는 문장이다. 목표점을 하나 정하면 오직 그 목표 한 가지를 위해 가장 효율적이며 공격적인 전략으로 과감한 플레이를 펼치는 아이, 언뜻 아주 편안해 보일 정도로 잔잔하게 움직이지만 나중에 알고 보면 그게 다 목표를 위해 그려둔 밑그림이라 뒤늦게 눈치채도 차마 극복하기 어려운 갭을 만들어 내고는 하는 남편은 둘 모두 나와 몹시 다르다. 그래서인지 보드게임을 할 때마다 나는 우리들의 서로 다른 생존 본능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그 배경에 대해 생각해 보고는 한다. 덕분에 가족과 즐기려고 시작한 보드게임을 통해 예상치 못하게,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나의 성격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전략 게임을 내 식대로 나눠보자면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플레이어 간 상호작용이 많은 게임과 자신의 플레이에 집중하면 되는 게임. 나는 후자를 선호한다. 상호작용이 많은 게임을 할 때면 상대방이 무엇을 하는지, 왜 그것을 했는지,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의사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게 참 부담스럽다. 남이 뭘 하든 말든 ‘이유가 있겠지’하며 그냥 내 갈 길 가는 것이 마음 편하고 좋다. 게다가 목표를 하나 정했다가도 여기도 기웃, 저기도 기웃거리며 다소 분산된 플레이를 펼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보드게임의 승리는 대개 남편 또는 아이의 것일 때가 많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나의 면면이 실제 생활에서도 자주 보인다는 점이다. 한 우물만 파지 못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나의 모습을 나는 보드게임을 통해 처음으로 제대로 인지했다. 정신 바짝 차리고 목표 한 가지만 생각하자, 목표를 위한 액션 플랜만 생각하자 되뇌다가도 잠깐 한 눈 팔고 나면 정신줄 놓고 우선순위 없이 이것 했다 저것 했다, ‘꼭 공격을 해야 하나’, ‘그냥 나는 다른 방법으로 이기고 싶은데’ 따위의 생각에 마음을 쓰는 나는 도대체 왜 그럴까.  


이것은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한 문제다. 성격은 생존 본능이라는데 이런 내 성격은 일단 보드게임 판에서는 꼴찌로서 우스개 소리지만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고, 현생에서도 그다지 이로울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나는 왜, 개구리처럼 목표 지점에 탁 혀를 뻗어 먹이를 잡아야 하는 상황에서조차도 뚜렷한 목표와 우선순위에만 집중할 수 없는 것일까.


사랑하는 엄마가 보드게임 최약체인 것을 아는 아이가 은근슬쩍 봐줬음에도 불구하고 여지없이 꼴찌를 해버린 오늘, 나름 이겨보려고 애를 쓴다고는 썼는데 지나고 보니 뾰족한 전략이 없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나니 나의 성격은 정말 무엇에 이로운 생존 본능인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냥 두뇌 싸움에서 밀린 건데 성격 탓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내일 보드게임에서는 전략이라는 것을 좀 짜볼 수 있을까? 푸념하듯 생각을 이어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격으로 어찌어찌 현생에서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살아왔다는 사실에,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생존을 했으니 정말 생존 본능이긴 한가 보다, 하며 내일 먹을 크리스마스 메뉴나 고민하자며 서둘러 생각을 접는다. 


그럼,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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