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기억. 도무지 그에 걸맞은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기억력이 좀 나쁘기는 하다. 겨우 기억나는 때가 고등학교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렇다 할 기억은 없다. 단편적으로 첫 남자 친구와 걷던 모습, 순대촌에서 놀던 모습이 십 초짜리 동영상처럼 남아있을 뿐이다. 부모님과의 추억도 마찬가지다. 소중하게 남은 것이 없다. 분명 부모님은 나와 동생들을 위해 차가 거북이걸음을 하는 여름휴가 기간에 바다에도 가고, 당신들은 좋아하지도 않는 놀이동산에도 갔을 텐데, 부모님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혀 기억나는 것이 없다. 기억이라곤 아빠는 모래사장에 깐 돗자리에서 내내 낮잠을 잤고 엄마는 모래 한 톨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쓸고 닦으며 참외나 수박을 꺼냈다는 것뿐이다.
나는 늘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이 부러웠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뭐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인간적이라고 생각했다. 기억한다는 행위는 그것에 마음을 쓰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좋든 나쁘든 지난 일은 까맣게 잊는 나는 세상 만물과의 관계에 관심이 적고 지금 그리고 나에만 집중하는 무심한 사람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여섯 거북살 때 일도 기억한다는 동생이 '언니 기억 안 나?'라고 물으면 나는 괜히 부끄러웠다. 내가 동생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기억을 못 하는 나는 그저 마음이 없는 기계처럼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왜 기억하지 못할까, 고민하던 차에 어디선가 인간이 기억을 없애는 건 방어기제의 하나라는 글을 읽었다. 그래서 내가 기억이 없는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내게는 따뜻한 기억보다는 슬펐던 기억이 더 많이 남아있는데. 사실 '소중한 기억'에 대해 생각하자마자 떠올린 건 예전 남자 친구와 언약식을 준비하던 밤이었다. 이미 헤어졌고 나는 결혼해서 아이들 낳고 잘살고 있는데, 왜 남편과의 추억이나 아이들의 탄생과 같은 기억이 아니라 마음 아프게 헤어진 사람과의 밤이 생각나는 것인지 의아했다. 한참을 생각하고 내린 결론은 소중한 기억이라고 해서 꼭 따뜻하거나 기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늘 어딘가 가볍게 우울한 사람이었다.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도 그럴 수 없었고, 굳이 그러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다. 누군가는 우울은 전염성이 강해서 거기에 빠지면 빠질수록 헤어 나올 수가 없다고, 원래 우울한 사람은 없다고, 마음을 먹고 떨쳐내면 할 수 있다고도 했지만, 나는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냥 이렇게 태어난 것 같았다. 물론 거기에는 자라온 환경과 경험들도 한몫했겠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자석에 이끌리듯 우울하거나 가라앉은 것들에 끌렸다. 그것이 나 같았다. 그러니까 그런 나에게 '소중한 기억'은 따뜻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따뜻하지 않다고 해서 내게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