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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포포 매거진 Dec 12. 2023

어쨌든 결정


장장 5년에 걸친 이사 고민에 드디어 종지부를 찍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순식간에 이사에 필요한 기본 절차를 마쳤다. 이사를 가고 싶은 이유만큼 가지 않는 것이 더 좋은 이유 또한 많았는데, 그 덕에 갖가지 이유를 양손에 들고 저울질하느라 늘상 1mm쯤 발바닥이 허공에 뜬 것처럼 살았다.


아이와 내가 함께 사랑해 마지않던 대상이 동네에서 사라지고 나자, 아이는 이사를 가도 상관없는 마음이 되었다. 그러자 나는 늘 그랬듯 제대로 된 건수 하나를 잡은 사람처럼 이러한 일상의 작은 이슈 하나까지도 이사를 가라는 하늘의 게시처럼 받아들이고, 아무래도 이사를 가야겠다, 습관처럼 되뇌었다.


나쁜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는 것이라고 했던가. 유난히 그 말이 귀에 쏙쏙 들어오던 어느 날, 이제는 어찌 되었든 결정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소 성급하게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이사를 위한 절차들을 진행했다. 5년 동안 묵고 묵은 ‘이사 바라기’의 힘은 참 강했다. 모든 것이 짜 맞춰진 듯 큰 이슈도, 긴 고민도 없이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평소 직접 운전하는 것보다 조수석에 앉는 것을 선호하고, 숲보다 나무, 아니 그 나무에 낀 이끼에도 마음이 요동치는 내가 끝끝내 이사를 결정했다. 이사 갈 집에 계약금을 넣고도 한동안은 마음이 몹시 싱숭생숭했다. 과연 이사를 가는 것이 잘 한 결정인지, 이사 갈 집을 너무 쉽게 결정한 것은 아닌지, 지금 집도 이렇게 평화로운데 꼭 이사를 가야만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그런데 결정에 따르는 무거운 책임감을 한 꺼풀 들고 보니 그제야 내 마음에 작은 설렘이 깃든 것이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나는 정말로 이사를 가고 싶었나 보다. 결정을 내리는 것이 두려워 이사를 가지 않는 것이 좋은 이유들을 방패 삼아 진심을 겹겹이 싸고 숨겨왔나 보다. 


"나, 정말 이사를 가고 싶었나 봐."


마치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듯 말하는 나를 대문자 T인 남편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바라본다. 응, 자기는 늘 이사를 가고 싶어 했지. 나는 분명 내가 이사를 가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5년간 알아왔는데, 사실은 스스로의 마음을 전혀 알아주지 않았다. 알지만 모르는 것과 같았고, 들을 수 있었지만 들으려 하지 않았다. 소중한 가족의 일상이 걸린 중요한 이슈이기도 했지만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나는 나의 마음을 당연한 듯 일축시켜왔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나에게 나의 존재가 너무나 가벼웠던 것이다. 


아침 일기를 쓰며 다짐하듯 소리 내어 말했다. 내가 내린 결정이다. 그러니까 믿을 수 있다. 설혹 나의 결정에 부족함이 있어도 좋은 결정으로 만들어 버리면 그만이다. 이건 내가 정말로 원하는 일이다. 이런저런 문제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를 간다는 사실이 나는 정말로 좋다. 최소한 나 자신은 5년간 다스려온 그런 나의 마음을 인정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의심하지 말고 못 먹어도 고(Go). 간다,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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