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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포포 매거진 Nov 28. 2023

어느 재취업자의 썰

첫 번째 회사에서 퇴사한 뒤 꽤나 긴 수년의 경력 공백기를 지나 두 번째 회사, 그리고 지금의 세 번째 회사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 줄로 요약된 이 간단한 문장은 언뜻 보기에는 좋을지 모르나 사실은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체감상 직장인으로서 제대로 일하기 시작한 지 이제 4일 남짓 되었다. 세 번째 회사에서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한 것은 올해 여름부터이지만 ‘어영부영, 우당탕, 어리바리’ 3개의 부사로 간추려지는 지난 5개월의 시간을 꽉 채워 일하고 나서야 이제 겨우, 일다운 일을 하는 방법을 겨우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부드럽게 표현하면 경력 보유 기간, 거칠게 표현하자면 경력 단절 기간을 지나 재취업을 한 1인의 마음을 지배해온 감정은 다름 아닌 두려움과 불안이었다. 뿌듯한 성취감과 두근거림이 지나간 자리에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앉은 지도 오래. 


‘난 사실 회사란 조직에서 일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지도 몰라.’ 

‘이건 내게 맞는 직무가 아닐지도 몰라.’ 

‘아무래도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와야 하는데 내가 회사에 민폐를 끼치고 있는 건지도 몰라.’


무수한 가정과 억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마침내 이 두려움과 불안의 민낯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인정받았던 과거의 나를 가까스로 방어하고자 앞으로 투입해야 하는 시간과 노력을 애써 외면하는 무책임함이었다. 또한 필요한 강의를 듣고 책을 읽으며 전력투구해도 모자란 판국에 과거와 달리 회사 일을 아이보다 우선순위에 놓고 싶지 않은, 애매하기 짝이 없는 마음가짐 그 자체였다.


내려놓아야 할 것이 많았다. 인정해야만 했다. 내가 몸담은 직무는 누구보다 빠르게 세상의 변화를 파악하고, 변화를 즐겨야 하며, 이제는 데이터를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 줄 알아야 하는데, 지금의 나는 마치 신입 티를 갓 벗은 사회 초년생처럼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말이다. 회사 일에 골몰하는 시간에 비례해 집은 더러워지고 잘하고 싶어 몸부림치는 마음은 종종 아이에 대한 잔소리로 구현되었다.


생각이 너무 깊어지면 곧 수렁이 된다. 첫 회사를 나오고 그랬던 것처럼 자는 시간이 늦어졌다. 한동안 최선을 다해 도망치듯 크게 즐겁지도 않은 스마트폰 세상에 빠져 즐거운 척하느라 시간을 잔뜩 허비했다. 열심히는 일했지만 즐겁지 않았고, 오래전 수강권을 끊은 온라인 강의는 아직도 다 듣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아이와 쿵짝이 맞아 우리 오늘부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자는 약속을 덜컥하고는 인생 도피처와도 같은 웹툰 앱들을 모두 다 지웠다. 약속의 날 하루 전, 해외 출장 전날 밤 병이 나 링거를 꽂고 누워 있는 남편의 곁에서, 독감의 탈을 쓴 감기에 걸린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책을 읽었더랬다. 병원 책장에 꽂혀있던,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난다는 한 변호사의 책이었다. 링거 방울이 다 떨어져갈 즈음 그냥 다 내려놓고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 첫번째가 일찍 자는 것이었다. 


아침 일찍 숙제를 끝내고 하교 후에 바로 게임을 하고 싶었던 아이와 나의 서로 다른 니즈(Needs)가 일찍 자고자 하는 의지로 공교롭게 맞아떨어진 것은 참으로 감사한 우연이었다. 스마트폰 대신 책을 손에 들고 밤 9시 30분이 되면 잠자리에 들었다. 평소보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아무런 생각 없이 밥을 하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니 몸이 가뿐하다며 아이와 너스레를 떨다가, 혼자된 시간에 문득 아침 일기를 쓰고, 구글 캘린더로 회사 일과 개인 일을 나누어 일정을 정리한 다음 업무를 시작했다. 


해야 할 일은 언제나 많고, 제대로 끝나는 일은 적다. 어차피 이럴 거면 슬랙과 노션, 카카오톡, 즐비하게 늘어선 탭들 사이를 분주하게 떠돌지 말고 딱 하나만 생각하기로 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일하자, 나에게는 성장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되뇌었다. 이제는 잘할 수 없는 퇴물이 아니라 커리어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어느 재취업자 1이 되자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보자고 작성했던 이력서로 덜컥 제2의 커리어를 시작했듯 어차피 완벽히 모르는데 천천히 하나씩 알아가 보자고, 그냥 그렇게 될 대로 되라는 듯 붕 뜬 마음을 바닥에 털썩 아주 편하게  내려놓았다. 


나는 구멍이 숭숭 난 재취업자다. 하지만 내일도, 모레도 바람이 드나들 구멍이 그렇게 많을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우선 일찍 자고자 할 때 일찍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스스로가 자랑스럽다. 이번 주 딱 한 번, 겨우 20분이지만 듣고자 하는 강의를 마침내 들었다. 아직 멋진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성과를 내는 일에 가까워지는 길은 찾았다. 수년의 경력 공백기를 겨우 1년여 만에 회복하려 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빠르게 달리고, 우승을 하고, 완주를 하는 것 대신 나는 우선 아주 천천히라도 앞으로 달려나가는 법을 먼저 익혀야 한다. 그걸 이제라도 알았으니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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