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내고 정리해야 생겨나는 빈 공간
공간(空間)
한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비어있는 사이", " 물체나 존재들 사이에 빈자리"라는 뜻이다.
비워야 채울 수 있고, 바람이 통하며 무게가 가벼워진다.
오늘도 역시 빈 공간을 만들려고 무던히 노력 중이다.
[목차]
1. 갤러리 사진 37,963장 (아직도 빠르게 증식 중...)
2. 나중에 볼 영상 600개 (feat. 좋아요 테러에 나락 간 알고리즘)
3. 2년 이상 안 입은 옷과 물건은 안녕(주변 나눔, 물물교환)
4. 진짜인맥 구별하기
5. 규칙적인 방해금지모드 (=비행모드)
갤러리 37,963장 (아직도 빠르게 증식 중...)
사진을 찍으면 눈과 마음이 아닌 기기로 기억한다. 정말 열심히 사진을 찍었는데 뒤돌아보면 내게 남는 게 없다.
예쁜 카페를 가도, 공간을 가도, 언제나 핸드폰이 내 눈보다 먼저다.
공연이나 축제 때는 약간 기괴한 광경이 펼쳐진다.
다들 핸드폰을 거쳐서 그 작은 화면으로 무대를 본다.
직접 눈으로 바라보는 이를 찾기가 어렵다.
오히려 촬영이 불가능했던 공연들은 기억하기 위해 초 집중하느라 기억이 더욱 선명하게 난다.
나중에 갤러리에 들어가서 추억을 회상할 일이 얼마나 될까.
이제는 상황 별로 좋아하는 1~2장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휴지통으로 보내준다.
나중에 볼 영상 600개 (feat. 좋아요 테러에 나락 간 알고리즘)
지금은 보기 싫고, 그렇다고 지나치기는 아깝고.
그렇게 저장하고 좋아요를 눌러둔 영상만 600여 개.
이것도 몇 달 전에 리셋했던 거라는 게 소름 돋는 부분.
언제 이렇게 사람들을 좋아했다고 구독을 하는 사람들이 몇백 명.
그들은 나를 알지도 못하는데 나 혼자 내적 친밀감만 쌓여간다.
넷플릭스도 동일하다. 나중에 볼 영화에 하나, 둘 찜해두면 점점 쌓여서 결국 세상 모든 영화들이 내 찜을 당할 것 같은 느낌이다.
좋아요를 눌러서 나의 호불호를 따지는 것도 좋지만. 그리 영양가 없는 내용은 지나갈 용기도 필요하다.
어쩌다가 빠른 도파민이 필요할 때 힐끗 본 숏츠에 햄토리 궁둥이 영상이나, 애기 동물들 걷다가 넘어지는 걸 보는 날에는 이미 떡밥을 집어삼킨 것이다.
그렇게 좋아요 몇십 개 실컷 누르고 어찌어찌 빠져나온 현실세계는 이미 기존 알고리즘이 파괴되어서 동물들 천지가 된다.
요즘 되도록 숏츠를 실눈을 뜨고 빠르게 지나가 버린다. 오늘은 유튜브의 낚시질에 걸리지 않겠다는 의지로.
지금 구독하는 사람들도 가끔씩 다시 돌아가서 확인해 보자. 내가 더 이상 흥미를 잃은 내용이라면 과감하게 삭제하기.
2년 이상 안 입은 옷과 물건은 이제 안녕.(주변 나눔, 물물교환)
아무리 마음속의 빈방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현실의 빈 공간도 중요하다. 물건들로 꽉 막힌 곳에서 생활하다 보면 마음에 여유도 서서히 잃어가기 마련이다.
이전에는 굉장히 자주 입었던 옷.
5kg만 빼고 입으면 기가 막히게 잘 맞을 거 같아서 아직 남겨둔 옷.
옛날옛적 누군가 선물해 준 옷 등등
아직 그 옷에 미련이 남아서 버리지 못한 것들은 과감하게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건 실제로 현실의 빈방을 만들 수 없게 하는 주범이다.
그 기준을 나는 2년으로 정했다. 1년은 뭐 어찌어찌 발견을 못해서 못 입었다고 치자. 그런데 2년이나 그 옷이나 물건을 찾지 않았다는 건 그냥 기억에서부터 남아있지 않는 상태인 거다. 실물이 없으면 마음에 생각도 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면 뭔가 아쉬워서 버리지 못하는 아이러니.
중학교 때 만들었던 토끼인형이 있었다. 한때는 애착이 가는 인형이라 출장을 갈 때도 데리고 다녔다. 그런데 점점 이런저런 인형들이 늘어나고 내 공간이 없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결국 여러 인형들과 작별을 했다. 굿즈를 만들고, 상품을 만드는 사람이지만 요즘에는 어떤 물건을 만들어야 버릴 때도 미안한 마음이 없이 버릴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최근에 너너도나도 키링인형을 달고 다니는데 그 인형이 과연 가방에 몇 년 동안 달려있다가 버려질까. 그 인형들은 어떻게 소각될까, 뜯겨서 재활용이 될까 등등 물건을 만드는 사람의 역할을 다시 한번 재정립해본다.
내가 현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물건을 사지 않고, 샀다면 최대한 깨끗하게 잘 사용하고, 쓸모가 없어지면 주변 사람에게 나눔 하기. 혹은 물물교환도 좋다.
물건, 사람, 집은 인연이 있다고 주변에 누군가 그랬다. 그 물건들은 이제 나와의 인연이 다했으니 더 잘 사용해 줄 사람에게로 움직이는 것이다. 아까워할 필요도, 아쉬워할 필요도 없다.
진짜인맥 구별하기
자신의 카톡 연락처에는 900명의 친구가 있다며 자랑을 했던 사람이 있었다.
내가 “이 많은 사람 중에 연락을 자주 하는 사람이 누구야?”라고 물었는데 예상외의 질문이었는지 대답을 두루뭉술하게 얼버무렸다.
사실 그 사람은 속으로 꽤나 외로웠을지도 모르겠다.
몇백 명의 많은 사람 중에 실제로 교류하고 마음을 다해서 소통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참 다행이다.
다른 어떤 사람은 말만 하면 “내가 아는 사람이~ ” “내 친구의 지인이~ ”라면서 주변에 인맥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본인의 이야기가 아닌 일을 마치 본인의 것인 마냥 신나게 이야기를 한다.
처음에는 와.. 그런 인맥이 있구나 하고 지나갔지만 매번 동일한 패턴이 반복될수록 ‘우리끼리 나누는 대화에 얼굴 한번 본적 없는 사람을 끌어와야만이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그것도 실질적인 이득은 하나도 없이 인맥자랑일 뿐인 이야기라면 더욱 공감이 안된다. 이게 나만의 자격지심일지도 모르겠지만 뭔가 부럽지가 않다.
학생 때는 연락처에 사람이 많은 게 무조건 좋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생각이 다르다.
연락처에 몇 사람이 없어도 언제든 전화를 바로 걸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언제 연락을 해도 서먹하지 않게 대화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내가 누군가한테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나에게 그렇게 해줄 마음의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규칙적인 방해금지모드 (=비행모드)
출장을 다니면 비행기를 타게 되는데 그때부터 강제로 방해금지모드가 된다. (사실 요즘은 기내 와이파이가 되지만 한 번도 써본 적 없다. 그냥 순간을 즐긴다.)
오롯하게 느끼는 고요함. 데이터 전송속도에 집착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만끽한다. 이땐 약간의 따분함까지 사랑스럽다.
꽤 오래전부터 저녁 식사시간 이후에는 방해금지모드를 사용한다. 방해금지 모드를 켜면 모든 알람이 해제된다.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화벨도 울리지 않게 설정해 둔다.
그리고 핸드폰을 어느 구석에다가 방치해 둔다. 아예 덮어두고 보지 않는다. 모든 알림이 무음이기 때문에 다시 해제되는 시간까지는 진정한 나만의 고요한 시간이다.
가족, 친구, 연인 등등 주변의 모든 인간관계를 형성할 때 주의할 점이 있다. 본인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을 반드시 확보할 것. 그 공간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과 만나는 것이다.
아무리 배려가 넘치고 사랑이 튀어도 언젠가 뜨거운 마음은 식고, 이전에 비해 미지근해질 수밖에 없다. 그때 관계를 유지해 줄 수 있는 건 각자만의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각자 즐기는 것들은 너무나 다양하다. 책, 영화, 유튜브, 운동, 모임, 게임, 수면, 여행 등등 본인만의 취향이 존재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나와 취향마저 같았으면 좋겠지만 다를 수도 있고, 설령 같다고 해도 서로 떨어져서 오롯이 혼자가 되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강아지도, 어린이도 각자 방이 있고 울타리가 있다. 일부가 말하는 '모든 공간을 공유하고 전부 오픈이 되어야 진정한 사랑'이란건 아직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서로 협의가 된다면 어떤 방법이든 좋겠지만 자기만의 확고한 마지노선은 분명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본인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 진짜 사랑은 아낌없이 본인을 갈아서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게 아니라, 서로 영역을 지키며 같이 잘 살아가는 법을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한 줄 일기
: 날이 추워져서 쑥갓 어묵탕을 해 먹었는데 예상보다 더 맛있어서 두 그릇을 먹었고,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서 책냄새 실컷 들이켰으며 동네마트에서 산 대추가 아삭거리는 식감에 기분이 좋았고, 중국에서 사 온 크래커에 네모치즈 한 장 , 후추만 있으면 근사한 간식거리가 된다는 발견을 하고 괜히 주변 사람들한테도 맛 보여 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나 혼자 다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