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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py Feb 10. 2023

이열치열, 미친 놈을 위해 미쳐라 [Whiplash]

데이미언 셔젤 감독 作


내 인생은 '이것'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인생을 설명하는 퍼즐에서 '이것'이 없으면 내 인생을 완성시킬 수 없을 만큼 소중하고, 중요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이것'이 인생의 퍼즐이 되기까지 그 사람은 어떤 일들을 겪었을까?


오늘 소개할 영화 Whiplash는 드럼을 통해 인간의 열정 그 이상의 광기와 집착으로 퍼즐을 완성시켜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감독 Damien Chazelle, 2014



(스포가 포함되어 있음)


주인공 앤드류는 드럼을 사랑하는 소년이다. 늘 그렇듯 예술가로서, 음악인으로서 밥 벌어먹고 살기란 참 힘들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드럼을 치는 건 그의 인생의 일부이다.


그러던 그는 어느 날 악명 높은 플레처 교수가 담당하는 스튜디오 밴드에 입단하게 된다.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기쁨도 잠시, 강도 높은 폭언과 폭행에 시달리는 앤드류. 이쯤되면 합주를 위한 건지, 학생들의 혼을 빼놓으려 하는 건지 모르겠는 분위기가 지속된다.


구박도 받고 때로는 인정도 받으며 팀의 메인 드러머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앤드류. 극한의 환경에서 끊임없이 그를 몰아붙이는 플레처. 결국 앤드류는 플레처에게 격분하며 달려들게 되고, 이 사건으로 앤드류는 제적당한다. 앤드류의 증언으로 인해 플레처 역시 스튜디오 밴드에서 물러나게 된다.


시간이 흘러 우연히 만나게 된 두 사람. 플레처는 앤드류에게 무대를 제안하게 되고, 드럼이 그리웠던 앤드류는 그 제안을 수락한다.


하지만 만만히 물러날 플레처가 아니다. 무대 시작 직전, 그는 이 무대가 '앤드류 물먹이기' 작전임을 말한다. 전혀 알지 못하는 곡을 연주하고, 그를 관객들 앞에서 신랄하게 조종한다. 당황한 앤드류는 무대를 제대로 망치게 되고, 이런 아들을 본 아버지는 아들을 안아 주며 이제 그만 집에 가자고 위로한다.


하지만 앤드류는 다시 공연장으로 뛰어들어간다. 그리고 자신이 피나게 연습했던 '캐러밴'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폭발적인 그의 드럼에 단원들은 당황하고, 플레처는 '눈깔을 뽑아 버리겠다'고 협박하지만 앤드류는 굴하지 않는다.


결국 밴드는 그에 맞추어 캐러밴을 연주하기 시작하고, 합주가 끝난 후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광기어린 드럼 솔로가 펼쳐진다. 이제는 오히려 그에게 맞추어 주는 플레처와 앤드류. 플레처는 이제 앤드류를 인정했다. 무대 위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는 장면을 끝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1) 이열치열, 미친 놈에게는 미친 놈으로 맞서라

합주실에서의 플레처와 앤드류

플레처 교수는 미친놈이다. 그는 학생들의 음악적 능력을 키우기 위한 자신만의 지도 방식을 자랑스러워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 실상은 폭력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의 전 제자는 그의 정서적 학대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플레처 교수의 모습은 앤드류의 첫 합주에서도 잘 드러난다. 박자가 틀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를 가스라이팅하며 결국 자신의 의견을 학생에게까지 관철시킨다. 또, 조금이라도 박자가 맞지 않으면 앤드류에게 의자를 집어던지는 등 육체적/정신적으로 모두 높은 폭력성을 띠고 있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혀를 내두를 만한 장면이 있다. 첫 합주날의 쉬는시간, 난폭하던 모습과 다르게 플레처는 앤드류를 불러 다정하게 이야기를 건넨다. 그의 가정사는 어떤지, 개인적인 질문을 통해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처럼 앤드류에게 다가간다,


하지만 바로 다음 합주, 그는 앤드류에게 들었던 그의 개인사를 앤드류를 힐난하는 도구로 삼는다. '지나치다'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를 비난하는 플레처의 모습은 교육이라는 목적과 훈육이라는 수단이 도치된 것 같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영화의 어린 양 앤드류, 처음에는 이런 플레처의 모습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만의 방식으로 연습하지만, 플레처에서 돌아오는 것은 인정과 칭찬이 아닌 힐난과 경멸이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앤드류는 조금씩 달라진다.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하고, 스틱을 쥔 손에서 피가 날 때까지 드럼을 친다.


그는 미친놈을 상대하기 위해 자신도 서서히 미치고 있었다.


앤드류가 '이열치열'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 것은 마지막 카라반 합주에서였다. 이제 앤드류는 플레처가 제시한 로드맵을 따라가지 않는다. 플레처는 자신의 로드맵을 얼마나 충성스럽게 따라왔는가로 포인트를 매기지 않기 때문이다. 들쑥날쑥한 그의 평가 기준에, 앤드류는 이제 자신을 그에게 맞추기보다는 광기에 맞서는 광기로 자신을 선보인다.


처음으로 플레처의 방식을 거절하고, 그의 광기로 연주를 진행시키는 앤드류의 모습에 플레처는 이내 자신을 앤드류에 맞추기 시작한다. 이열치열의 승부, 카라반에서는 앤드류의 승이었다.




2) 나를 뜨겁게 했을 때 남는 것은 화려한 불꽃인가, 한 줌의 재인가?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드럼 연주를 준비하는 앤드류

앤드류는 극중 누구보다 많은 변화를 겪은 인물이다. 드럼을 사랑하는 순수한 소년이 광기 어린 눈빛으로 드럼을 바라보는 순간까지, 앤드류는 플레처라는 인물에서 지속적인 영향을 받으며 변해 간다.


앤드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카라반에 이어 드럼 솔로를 연주하며 '환상적인' 연주를 보여준다. 그야말로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다. 결국 앤드류는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플레처를 압도하며 영화는 막을 내리게 된다. 


앤드류의 신들린 연주를 보다 보면 전율이 느껴진다. 하나에 그렇게 미치도록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모습. 자신을 불태워 누구보다 화려한 불꽃을 무대 위에서 피워냈을 때의 모습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황홀한 느낌에 더 가깝다. 영화 개봉 당시, 영화관에서 보았을 때의 내 느낌도 그랬다. 나도 앤드류처럼 무언가에 나를 온전히 부을 수 있는 경험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지금은, 이 영화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졌다. 자신을 화려하게 불태우는 불꽃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느 분야든, 화려한 불꽃은 영원토록 지속될 수 없다. 한 줌의 재로 남지는 않았을까? 어떤 이들은 말한다. 인생에 단 한 번 뿐이라도, 화려한 불꽃을 피워낼 수 있다면 그건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말이다.


나는 불꽃의 가치에 대해 논하고 싶지 않다. 화려한 불꽃을 피워내는 건 물론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인생은 불꽃이 타오르는 순간만으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다. 인생은 장기전이요 마라톤이다.


그래서 다시 이 영화를 떠올렸을 때, 내가 집중했던 부분은 앤드류의 연주나 연습보다는 주변인들과의 관계, 그리고 변화하는 앤드류의 모습이었다.


영화 초반의 앤드류는 음악을 사랑하는 평범한 대학생에 가깝다. 여자친구를 통해 알 수 있다. 좋아하는 여자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여자친구와 행복한 데이트를 즐기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때까지 음악은 사랑하는 존재이지, 전부가 아니었다. 앤드류에게는 음악 외에도 연인이 존재했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앤드류는 조금씩 바뀐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친구를 차버리며 온전히 드럼에만 몰두하고자 한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드럼만 친다. 손에서 피가 나면 얼음물에 손을 담구어 가며 연습을 계속한다. 이제 음악은 그의 전부가 된다. 그렇게 전부가 된 음악은 '카라반'에서 그에게 화려한 불꽃을 안겨 준다.


나는 어쩐지 이제 앤드류는 한 줌의 재가 될 것 같다고 느낀다. 카라반을 연주한 이후, 앤드류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연주자로 인정받는 것, 플레처에게 인정받는 것 등 다양한 기쁨이 그를 기다리고 있겠지만 앤드류가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제 그에게는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다양한 기쁨 속 그에게 행복을 줬던 드럼은, 이제 유일한 선택지가 되어 그를 옥죄어 올 수도 있다.


물론 이건 오로지 내 생각에 불과하다. 그는 훌륭한 연주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행복하게 드럼을 연주할 수도 있다.


하지만 플레처 교수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는 분명히 열정적인 음악인이지만 음악을 할 때 행복해 보이는지는 잘 모르겠다. 완벽한 음악을 추구하는 사람이지만, 행복한 음악을 추구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플레처를 보고 연주를 하고,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또 다른 플레처처럼 연주하는 앤드류의 모습이 겹쳐 보여 이런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3) 미생과 완생

tvN 드라마로도 방영된 '미생'


이 영화에 대한 감상평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미생'과 '완생'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아직 완전해지지 않았다는 의미의 미생, 이제 완전해졌다는 의미의 완생. 사람들은 완생을 추구하고, 더 완전한 자신이 되기를 바란다.


위플래쉬에서의 앤드류는 드럼에 있어서는 이제 미생보다는 완생에 가까워진 듯 하다. 자신을 온전히 내던질 수 있는 능력, 연습 과정에서 흘렸던 수많은 땀방울과 핏방울. 자신을 극한에 몰아넣으며 한계치를 뛰어넘는 모습들은 앤드류가 드럼 연주자로서 정말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그럼 그의 인생 역시 완생에 가까워졌을까? 이 질문에 대해 나는 부정적이다. 왠지 모르게 그의 삶은 공허해진 듯 하다. 드럼으로 꽉꽉 채운 그의 생활 속 다른 존재는 감히 침범하기 어려워질 것만 같다.


사람들은 말한다. 내 인생은 미생 같다고. 광기어린 천재를 부러워하기도 한다. 어떤 분야에 자신을 온전히 쏟아부을 수 있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니 말이다. 그리고 모든 분야에서 그저 그런 미생을 살아가는 평범한 자신을 때로는 미워한다.


여기서 미생이 우월하다고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나도 완생이 좋다! 더 완전해질 수 있는 기회는 굳이 거절하며 멀리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미생이 열등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미생 역시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보면 각자 한정된 용량 안에서 자신의 인생을 배분하는 것만 같다. 에너지 100을 어떻게 쓰는지에 대한 게 인생 같다는 말이다. 어떤 이는 회사에 70, 가정에 20, 친구에 10을 쓰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가정에 60, 회사에 20, 친구에 20을 쓴다. 그런데 이 에너지는 사람마다 다르게 주어질 수도 있다. 에너지 200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가장 적게 배분하는 회사에, 에너지 100이 쏟아붓는 70을 사용할 수도 있다. 이걸 가지고 아등바등, 자신이 열등한지 물을 필요는 없다. 그냥 에너지가 다른 것 뿐이다.


앤드류의 에너지가 100이라고 해 보자. 그는 영화 말미에 드럼에 자신의 용량 100을 쏟아부었다. 이제 드럼에 있어서는 완생일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앤드류는 다른 분야에서는 미생일 것이다.


미생인 사람들을 살펴보자. 이들은 참 많은 방향으로 에너지를 분출하고 있다. 골고루 30씩 에너지를 쓰다 보면, 그리 못나지도 않았지만 특별히 잘나지도 않은 '평균의 미생'으로 살아가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만큼 더 다양한 색깔을 띤 사람이 될 수 있기도 하다.


이 영화 감상을 마치며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거다. 앤드류는 멋있다. 자신의 에너지를 한 곳에 쏟아붓는 건 물론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평균의 미생도 멋있다. 특별히 모난 부분 없이 삼삼하게 살아가는 것도 미생의 용기가 필요하다.


그니까 결이 다를 뿐, 누가 압도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 나름대로의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열치열, 미친 놈을 위해 미친 놈이 되는 용기와 뜨거움 앞에서 '앗 뜨거!'를 외치고 미친 놈 앞에서 살살 비켜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용기는 모두 가치있다.


모든 완생은 없다. 우리는 어딘가에서는 모두 미생이다. 미생임을 인정하고, 조금씩 완생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은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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