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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py Dec 20. 2023

데일 만큼 화끈하게 [장고:분노의 추격자]

영화 리뷰

  우리는 흔히 거침없고 속 시원한 것들을 일컬어 '상남자다' '화끈하다' '롸끈하다' 등의 용어를 사용하곤 한다. 통쾌함보다는 답답함이 더 많을 현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이런 현실은 가볍게 무시하는 듯, 중력의 영향 따위 받지 않는다는 듯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며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중에서도 오늘은 데일 만큼 화끈한 '장고 : 분노의 추적자'를 살펴보려 한다.

 (줄거리, 스포o)

  때는 미국이 남과 북으로 이념이 나뉘어 노예 제도를 두고 갈등하던 때. 노예 '장고'는 어느 날 현상금 사냥꾼 '닥터 킹'을 만나게 된다. 수배 대상을 가리기 위해 임시 팀이 된 그들이지만, 타고난 헌터인 장고의 실력은 그들을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는 현상금 사냥꾼 콤비로 만든다.

  장고의 목표는 오직 하나. 바로 헤어진 아내를 찾는 것. 그들은 아내가 '미스터 캔디'의 노예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목숨을 건 적진에 들어간다. 이들은 과연 장고의 아내를 찾고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까?


(1) 쿠엔틴 타란티노의 묘미

  <저수지의 개들>, <펄프 픽션>, <킬 빌> 등으로 잘 알려진 쿠엔틴 타란티노는 어쩌면 B급 감성을 가장 잘 살린다고 생각한다.


  나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을 참 좋아한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확실한 잔혹함과 액션씬을 정말 잘 살리는 감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 영화를 보면서도 느꼈다. 신사처럼 다가와 소음기(?) 를 낀 채로 조용히 암살하는 영국의 제임스 본드보다는, 사냥개처럼 거침없이 물어뜯는 거침없는 타란티노의 감성이 나에겐 더 잘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타란티노 감독의 장점은 이 영화에서 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거침없이 흩날리는 피들과 몸의 일부 (...) 들을 보고 있으면, '이게 진정한 처절한 액션이지!' 싶다. 특히 캔디의 집에서 벌어지는 총격전은 날것의 서부 감성이 들어 있는 것 같이 긴박하면서도 투박하다. 자칫 뻔하고 과장된 액션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들도 잘 살려내는 타란티노 감독의 묘미는 이 장면에서 진가를 발휘했다고 생각한다.



(2) 소름끼치는 '너'와 '나'

 극 중 배경은 흑인 노예제를 바탕으로 미국이 남북으로 나뉘어 분쟁하던 시기이다. 대규모 농장 산업이 주가 되었던 남부에서는 노예가 필수적이었고, 대규모 저택과 농장을 운용하는 가운데 노예들에게도 서서히 계급이 생기기 시작한다.


 집 바깥에서 말 그대로 '농장 일'을 하는 흑인들과, 집안에서 주인 식구의 시중을 드는 비교적 '상류'에 속하는 흑인들, 그리고 더 나아가 완전히 백인이 된 것처럼 행동하는 흑인들까지.

 사실 이들이 어디에 속해 있던 근본적인 차이는 거의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같은 집단 내에서의 계급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이 영화에서는 다시 한 번 느끼게끔 해 준다.


 장고와 닥터 킹은 노예로 팔려 간 장고의 아내를 찾기 위해 그녀를 현재 소유하고 있는 대지주 '캔디'와 접촉한다. 이들이 만딩고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정보를 흘리자, 캔디는 아무런 의심 없이 이들을 자신의 저택으로 초청하고  손님으로 대접한다. 장고와 닥터 킹의 목적은, 만딩고 선수를 사는 척 캔디의 호감을 끈 후, 이후 돈을 지급하겠다고 하며 장고의 아내 브롬힐다만 먼저 몸값을 주고 빼내오는 것. 하지만 이들의 계획은 다름아닌 같은 흑인인 캔디 가문의 집사 '스티븐'에 의해 발각된다.


 극 중 장고가 캔디랜드에 입성하기 위해, 본인을 만딩고 전문가로 위장한 점도 빼놓을 수도 없다. 만딩고는 흑인 노예들이 서로 격투를 하게끔 만드는 일종의 스포츠 사업으로, 옛날 로마의 '검투사'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둘 중 한 명은 죽을 때까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서로의 목을 조르고 몸을 부러뜨리는 일은 잔혹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런 흑인 노예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같은 흑인일 것이다. 이로 인해 장고는 같은 흑인 노예들끼리 가장 혐오하는 '백인의 편에 선, 흑인을 죽이는 스포츠의 전문가'로 캔디월드에 입성하게 된 것이다.


 또한, 캔디의 집에서 아름다운 외모를 바탕으로 오히려 캔디 같은 대지주들과 함께 사치스런 생활을 누리고 있는 흑인 여성들이 보이기도 한다. 이들은 고급 의상을 입고 화려한 치장을 했으며, 대지주들과 함께 담배를 피우곤 한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무서웠던 것은 캔디보다도 바로 이들이었다. 가장 잘 알기 때문에 가장 무서운 이들. 캔디는 전혀 눈치채지 못할 때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직감을 이용해 같은 동족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은 악질 중의 악질일 것이다. 이들은 다른 흑인들에 대한 비하 발언 (n word) 을 들을 때조차도 어떠한 불쾌감도 내보이지 않는다.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철저한 '너'와 '나' 의 분리이다. 같은 인종으로서, 그리고 같은 인간으로서 핍박받고 있는 거대한 공동체의 일원임을 의식하지 않는 분리이다. 지금 '나'의 상황과 흑인 노예로서 처절하게 살아가고 있는 '너'의 인생은 철저히 다르다는 선긋기이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그러면서도 같은 흑인 노예로서 공유하고 있는 직감을 '적'에게 알리며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그들의 모습은 편협한 분리가 얼마나 소름끼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3) 나쁜 놈에게는 더 나쁘게

 영화 포스터를 보면 각 캐릭터를 가장 잘 나타내는 한 문장이 쓰여 있다. 여기서 나에게 가장 인상깊었던 문장은 닥터 킹을 설명하는 문장이었다.

 '그의 사냥엔 이유가 있다!'


 이들의 학살이 영화가 되고 장고가 로맨티스트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의 사냥에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상금 사냥꾼으로서, 과거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과거의 흔적은 그 댓가 없이는 지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나쁜 놈에게는 더 나쁘게! 이것이 이들의 방식이고, 해결 방법이다.


 그런데 때로는 '이게 맞나' 싶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나쁜 놈에게는 더 나쁘게... 그렇게 나쁜 놈들을 대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더 나쁜 놈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처럼, 과연 그 사람을 처벌로, 죽음으로 단죄해야만 속이 후련해질 수 있을까? 어떤 처벌이 과연 그들을 '처벌'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영화 속 '장고'도 똑같은 고민을 한다. 본인에게 누구보다 가혹했던 브리틀 형제를 처단할 때에는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지만, 과거 마차 강도 사건을 일으키고 현재는 조용한 시골에서 아들에게 농사 일을 가르치며 단란하게 살아가고 있는 한 남성에게는 쉽사리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이 때 망설이는 장고에게 닥터 킹은 다시 한 번 그의 범죄 이력을 상기시켜준다. 지금 저 자리에서 좋은 아버지로 살아가고 있는 남자가, 과거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범죄를 저지르며 그들을 고통스럽게 했는지 말이다. 결국 장고는 방아쇠를 당겨 범죄자를 처단한다.


 이들의 해답이 언제나 옳다고 할 수는 없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보면, 사적 보복을 해서라도 단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하지만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나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고 수많은 나라의 법들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타란티노식' 해결 방식도 필요할 때가 있다. 내 옷에 흙을 묻혀서라도 너에게 똥을 묻히겠다는 타란티노식 해결 방법은 우리에게 묘한 쾌감을 선사한다. 법으로는 해결되지 못하는 어떤 카타르시스를, 타란티노는 철저한 악인들을 대상으로 해 시청자들에게 제공한다.

 이유 있는 사냥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타란티노가 꼭 필요하다.


(4) 때로는 이런 것들이 필요해

 타란티노의 영화는 어쩌면 길티 플레저 같다. 평소에 쉽게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액션과 언행들, 사실 난 타란티노의 영화에서 길티 플레저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타란티노의 영화는 분명 길티 플레저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고민하는 존재다. 설령 악역이라 할지라도 방아쇠를 선뜻 당기지 못한다. 그리고 재미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찾기 위해서 행동하는 줏대가 있고 생각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이런 타란티노의 장치가 그의 영화가 B급이 아닌 A급이 될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유 있는 길티 플레저가 필요할 때, 타란티노를 찾아가 보는 건 어떨까?



(무려 2달에 걸쳐서 수정을 반복한 글... 두서가 없어도 그러려니 하고 봐주세요 ㅎㅡ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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