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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py Feb 11. 2023

그 때의 너는, 지금의 나는 [헤어질 결심]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참 매력적이다. 어떤 이들은 '배운 변태'라고도 한다. 단순한 스토리나 배우들의 연기만을 가리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치밀하게 구성된 컷, n회차 관람을 하다 보면 보이는 박찬욱 감독만의 미장센 등이 '깐느박'을 이루게 되었을 것이다.


처음 박찬욱 감독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방구석 1열'이라는 tv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부터였다. 영화 [아가씨]의 연출들을 되짚어 보며 등장인물들의 감정선, 작가가 살리고자 했던 여러 미장센들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흥미가 돋았다. 아직 [아가씨]를 보지는 못했지만, 박찬욱 감독 특유의 어두우면서도 매혹적인 미장센은 나를 항상 설레게 하는 것만 같다.


박찬욱 감독의 대표작은 '복수 3부작'이라 할 수 있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와 같이 인간의 복수를 파헤치는 방식이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는데, 사실 아직 나는 이 중 아무것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유일하게 제대로 본 깐느박의 작품 [헤어질 결심] 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 싶다.




영화 '헤어질 결심' (2022)

(스포가 포함되어 있음)


장거리 부부인 형사 해준은 어느 날 살인사건의 용의자 서래를 마주하게 된다. 아름다운 외모의 서래,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경찰서에 붙잡혀 왔다. 서래를 보는 해준의 분위기는 여느 용의자를 향한 조사의 시선 그 이상인 듯 하다. 첫만남부터 고급 초밥을 대접하는 해준, 이후 둘은 조사를 핑계로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된다.


해준은 자신에게 '프라이드'가 있는 형사이다. 청렴하고, 공정한 형사라는 자부심은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러나 서래를 만난 이후, 해준은 선을 넘지 않기 위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하며 결국 그는 그녀의 남편이 평소처럼 등산을 즐기던 중 실족사한 것이라며 사건을 종결짓게 된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바라본 사건에서는 볼 수 없었던, 보지 않으려 했던 진실들이 서래가 범인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결국 해준은 서래 앞에서 이 모든 것들을 털어놓는다. 청렴한 경찰이라는 자부심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그리고 자신이 결국에는 얼마나 붕괴되었는지를 말이다.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난 후, 서래와 해준은 또다른 살인사건으로 재회하고 그는 서래를 차갑게 대한다. 변해버린 해준의 모습에 실망감을 느끼는 서래. 이후 사건 속의 내막을 조금씩 파헤쳐가며 서래는 해준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해준을 붕괴 이전으로 돌이키기 위해 자신의 사라짐을 결심하는 그녀. 바닷속으로 들어가 다시 물 속에 잠기고, 뒤늦게 도착한 해준은 그녀를 애타게 찾지만 이미 바닷물은 모든 것의 자취를 감춘 뒤였다.





  1.붕괴와 데미안


이 영화를 보면, 정말 움직이는 시를 보는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화면 구도 속 주인공들의 눈빛, 그리고 그들이 내뱉는 대사가 정말 일품이다. 이번 영화에서는 '붕괴'였다. 자신은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말하는 해준의 표정에서는 대부분의 멜로 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별한 로맨틱함마저 느껴진다.


박찬욱이 쓰고 박해일이 완성한 '해준'이라는 캐릭터는 어린아이 같다. 그는 자신이 청렴하고 올바른 경찰이라는 점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 온 인물이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청렴한 경찰'이라는 알 속에서 그는 행복해하고, 만족한다. 하지만 그랬기에 서래를 만났을 때부터 해준은 횡설수설하기 시작한다. 어린아이가 완전히 새로운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어쩔 줄 몰라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건의 진실을 알아차린 후 서래에게로 향해 자신의 붕괴 사실을 고백하는 해준의 모습은 혼란스러워 보인다. 자신의 알이 깨졌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태도이다. 그리고 알을 깨야 한다는 것도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손 뻗는 공간 안에서 모든 것이 충족되었던 지난날과는 달리 서래는 알을 깨게 만드는 여자이다. 과거 삶의 방식과는 다른 길로 나를 살아가게 하는 여자를 만나고 사랑하게 되며, 고통스런 알깨기를 시작한 것만 같다.



해준은 서래를, 사랑을 제대로 겪어보지 못했다. 내 방식을 포기해야만 하는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 해준은 횡설수설한다. 그리고 무작정 서래에게 가서 흥분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주인공 싱클레어가 방황하던 시기의 혼란이 내게는 해준의 '붕괴'와 겹쳐 보였다.




2. 떫거나 썩었거나

해준은 자신의 붕괴를 고백하며 서래를 사랑했노라고 말한다. 그러나 서래는 그들이 다시 재회하고 나서야 해준의 사랑을, 그리고 해준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영화에서는 이렇게 어긋난 타이밍의 비극성을 극대화해 보여준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한다. 해준은 서래의 범행을 덮어 주었다. 덕분에 서래는 전과자가 되는 일 없이 남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서래는 해준을 붕괴 이전으로 되돌리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택한다. 자신으로 인해 붕괴된 해준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흔적을 지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에 이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이유를 타이밍에서 찾았다. 처음에는 서래가, 마지막에는 해준이 늦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처음에는 해준이, 마지막에는 서래가 너무 빨랐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들은 서로를 사랑하고는 있지만 자꾸만 어긋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는 타이밍이 아니라 성숙도의 문제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유튜브에서 사람들에게 첫사랑이 기억에 남는 이유를 물어 본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대답은 제각각이었지만 내가 가장 적절하다고 느낀 답은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고 상처를 줘서 (받아서)' 였던 것 같다. 과일을 너무 빨리 따면 떫고 너무 늦게 따면 이미 썩은 후다.


나는 서래와 해준의 사랑이 성숙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성숙도나 타이밍이나 뭐가 다르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묘하게 다르게 다가오는 건 사실이다.


타이밍도 사랑하는 이들의 관계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성숙도이다. 해준과 서래는 사랑하기에 성숙하지 않은 기분이다.



앞서 말했듯이 해준은 자신의 사랑을 '붕괴'로밖에 설명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해준의 감정을 완전한 타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관객은 이것이 해준만의 사랑고백임을, 그래서 더 로맨틱하게 다가옴을 알 수 있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은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서래는 사랑에 익숙치 않아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상대방에게 호감은 가지지만, 적어도 설명을 하지 못할 뿐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린 해준과는 달리 자신의 감정을 쉬이 정의내리지 못한 인물이다.


해준이 자신의 붕괴 사실을 울분을 토하듯이 고백한 후 퇴장하고 나서야 번역기에 돌려 말뜻을 헤아렸던 것처럼 서래에게 사랑은 아직 서툰 한국말 같다.




그렇다면 이들의 사랑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얼마나 성숙해야 하고, 어떤 타이밍이 필요했는가? 라고 물어본다면 나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비극을 볼 때, 인물들의 문제점은 찾을 수 있지만 희극과는 또 다른 비극만의 엔딩과 매력이 있었던 것처럼 서래와 해준도 나에게는 결이 비슷하게 다가온다. 아무튼 나는 답을 찾기 위해서만 이런 글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살짝 길이 샌 것도 같지만, 어쨌든 이들의 관계는 삼키키에 너무 떫거나 썩었다.




3.여담과 폭풍의 언덕

'헤어질 결심'의 배경 중 하나

원래 맨 마지막에 하고 싶은 말들을 글에 쓰려고 하는 편인데, 오늘은 조금 가볍게? 마무리를 할 것 같다.


[헤어질 결심]을 보면서 스토리나, 배우들의 연기 등 많은 것들에서 감탄할 수 있었지만 이 영화를 정말 기억에 남게 만든 것들은 특유의 미장센이었다.


서래의 집, 해준의 집, 경찰서와 그 외 다양한 장소들까지. 박찬욱 감독만의 미장센은 보는 이까지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기분이 든다. 특히 서래의 집에서 붙여 있던 벽지와 조명은 '수수께끼 같은 여자'인 서래의 이미지를 한층 더 확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위의 사진과 같이 특이한 벽지, 현실과 비슷한 듯 하면서도 어딘가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은 배경들. 경찰서도 여느 영화와 같이 '정신없고 허름한 경찰서'가 아니라 뭔가 재해석된 느낌이다.


특히 '안개로 뒤덮인 도시'라는 공간적 배경이 주는 느낌이 참 좋았다. '오만과 편견'같이 햇살 내리쬐는 곳이 아니라,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광적인 사랑이 펼쳐지는 어둡고 세찬 바람이 부는 요크셔 주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비극적인 사랑으로 끝을 맺는다는 점에서, 흐릿한 배경 속 [헤어질 결심]과 [폭풍의 언덕]은 아주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를 보다 보니 조금씩 느끼는 점이 생긴다. 특히 단순히 영화만 감상하는 게 아니라 글로 정리하면서 나도 몰랐던 생각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곱씹을수록 더 맛있어지는 영화를 만날 수 있어서 좋다.



마지막으로,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대한 나의 느낌을 말하며 끝내고 싶다. 그의 영화는 어딘가 자각몽같다. 현실 같지만 꿈이란 것을 알 수 있는 꿈 속 세계! 영화 속에서도 마블 영화처럼 CG로 만들어진 확실한 꿈 같은 세계가 아니라, 우리와 어딘가는 맞닿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영화 속 배경이 그렇다.


우리가 생활하고, 익숙해 보이는 집이기는 하지만 벽지와 분위기는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꿈 속 현실 같은 현실에서 박찬욱 감독은 우리가 평소 잘 알아차리지 못했던 현실을 보여주는 듯 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깨어날 수 있는 자각몽 속 미스티한 미장센까지!


이런 자각몽이라면 몇 편 더 감상하고 곱씹고 꿈꾸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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