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yeongChang 2018’이라고 쓰여 있는 단체 점퍼만 걸치고 컴컴한 길을 지나 익숙한 발걸음으로 호텔 프런트 건물로 걸어간다. 전화한 사람의 여권 상의 이름과 프런트에서 가지고 있는 러시아어와 영어로 적혀 있는 명단을 확인시켜준다. 왜 매번 이렇게 확인을 받는지...
도착한 사람을 배정받은 방이 있는 건물까지 데려다준다. 이젠 이 사람은 옵저버도 아니면서 왜 굳이 여기까지 왔는지, 내가 왜 이 사람의 체크인을 돕고 있는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눈을 붙인다.
씻고 밥 먹으러 나가려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IOC의 애나다.
“하이 쏠, A가 프로그램 시간에 맞춰 오지 않았대. 왜 그런지 확인 좀 해줄래?”
프로그램이 시작하기로 한 8시가 넘었다. A에게 연락해보니 길을 헤매고 있다.
“지금 헤드쿼터로 가고 있는데 조금 늦는 것 같아. 우리 통역이랑 연락해서 통역이 데려가도록 할게”
방을 같이 쓰고 있는 지니 언니가 옆 침대에서 대신 투덜거려준다.
“아침부터 또 뭔 일이라니”
아침을 먹고 있는데 스포츠매니저가 다가온다.
"저 오늘 업그레이드 카드 쓰면 안 돼요?"
업그레이드 카드는 내가 관리하고 있는 옵저버들이 가지고 있는 ‘O’ 카드 외에 여기저기 경기장을 무한정 다닐 수 있는 추가 카드다. 'U'라고 적혀 있다. 지정 좌석은 없지만 마음만 먹으면 U카드를 목에 걸고 피겨 여왕 김연아의 우아한 경기도 볼 수 있고, 빅토르 안의 쇼트트랙 경기도 볼 수 있다. IOC는 평창올림픽 옵저버와 섀도우를 위한 업그레이드 카드를 달랑 5장만 발급해 줬다. 오로지 IOC의 학습 프로그램을 위해 쓰기 위함이기에 매우 충분한 숫자이며, 소치 이후의 올림픽을 개최하고 운영할 담당자들이 꼭 필요할 때만 써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평창동계올림픽대회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매일 혹은 매 시각 이 5장의 업그레이드 카드를 사용하기 위한 눈치작전이 벌어진다. 뭐 개인적 사유야 많겠지만, 그 눈치작전을 보고 있으면 피로가 더 몰려온다. IOC는 내게 업그레이드 카드로 무료 경기를 보는 한국인이 있다면 모두 압수할 것이니 그런 줄 알라고 수시로 경고하고 있다. 설마 그럴까 싶지만 빌려가는 사람을 한번쯤 의심하며 슬며시 U카드를 내준다.
“꼭 다녀오신 뒤 반납해 주세요. 또 쓰실 분이 있으니까요.”
또 어디선가 전화가 온다.
“러시아 대사관입니다. AD카드 발급 안 될까요?”
Admission Card를 AD카드라고 부른다. 올림픽 대회용 신분증을 통틀어 AD카드라고 부른다고 생각하면 된다. 내게는 옵저버를 위한 AD카드 발급 권한이 있다.
“아니 러시아 대사관은 옵저버도 아니시면서 왜 저에게 옵저버 카드를 받으려고 하세요? IOC 규정에 따르면 불가합니다. 여긴 이미 다 신청해서 발급을 마친 상태라고요.”
“저희가 AD카드 할당된 게 없어서 옵저버의 O카드가 아니면 방법이 없어요. 부탁드려요.”
“...... 조금이라도 틀리면 다시 작성해야 하니까 정확한 정보 보내주세요”
나는 한숨을 쉬며 올림픽 AD카드를 담당하는 엘레나에게 메일을 쓴다.
"항상 도와줘서 고마워. 우린 여기서도 얼굴을 못 보는구나. 평창조직위는 또 AD카드 변경사항이 생겼어. 부탁할게."
분실해서 AD카드를 재발급받아야 하는 옵저버 여럿을 포함, 모아둔 인적정보를 엑셀 배치파일 형식에 담아 보낸다. 엘레나 같은 사람만 있으면 올림픽은 성공 개최다. 내가 이 올림픽 대회 참가자를 통틀어 가장 맘에 드는 아이다. 빠르고 정확하고 친절하기까지 하다. 사진 형식이 틀리면 에러가 나고 다시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그간 사진 거부당한 사람만 30퍼센트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그럼 연락해서 다시 정보를 받아 입력하는 건 다시 나의 몫, 검증하고 시스템에 올리는 것은 엘레나의 몫이다.
하아... 또 옵저버 호텔과 싸워야 하는 날이다.
향후 올림픽을 개최할 평창과 같은 개최도시 조직위에게는 특권이 있다. 옵저버로서 혹은 섀도우 업무 담당자나 대회 관리자로서, 이전에 개최되는 다른 개최도시의 올림픽에 참가하여 어떻게 운영과 관리하는지 관찰하거나(옵저버) 직접 담당자를 따라다니며(섀도우) 일 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참여하는 조직위와 개최도시 인력이 숙박시설을 정당하게 부여받을 수 있는 방법은 단 두 가지. 고위급 인사여서 올림픽 패밀리 호텔(OFH)에 묵거나 IOC가 인정해주는 옵저버로서 옵저버 호텔에 묵는 것이다.
물론 올림픽에 참여하는 사람은 많다. 선수, 대한체육회, 언론사, 스폰서 그룹 등. 당연히 이들이 올림픽의 중심이고 이들을 위한 제도는 따로 마련되어 있어 AD카드 체계도 다르고 숙박 체계도 다르다.
그 외에 인정 못 받는 사람들은? 관광객이나 시청자다. 나름의 방식으로 소치로 와서 돈 주고 입장권을 사서 경기를 보고, 호텔도 개별적으로 예약해서 묵으면 된다. 그것도 아니라면? 집에서 TV로 보면 된다.
근데 삼수만에 동계올림픽을 개최하게 된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가 혹은 이와 관련한 개최도시 관계자들이 소치 올림픽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딱히 없었고, 유일한 끈은 이 옵저버 프로그램이었다. 섀도우 업무는 업무적 연관성이 전혀 없고 영어도 안되니 아예 접근도 못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해서든 이 옵저버를 통해서 오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AD카드부터 시작이었다. 아무나 AD카드를 받으려고 전화를 해댔다. 옵저버의 O카드. 옵저버가 아닌 사람들이 이 O카드를 받으려 난리인 것이다.
옵저버 프로그램에는 실제 대회 준비에 있어 관련 업무를 맡은 사람들이 프로그램 당 1명에서 6명 정도씩 참여한다. 대상은 조직위 직원 및 개최도시 공무원들로 교통 및 수송담당자, 이벤트 담당자, 경기운영담당자, 대회계획 담당자 등 다양하다. 섀도우는 보통 한 명 정도며 직접 1대 1로 역할을 배정받아 일을 한다. 모든 프로그램은 IOC가 소치 대회 조직위와 논의하여 확정하고 인원 역시 IOC에 의해 승인이 된다. 또한 우리가 프로그램 참여 인력에 대한 약식 프로필을 보내면 그에 대한 참여 승인 및 거부권도 IOC에게 있다. 때로는 해당 경기 연맹에서도 관여를 한다.
담당자였던 나는 조직위에 들어간 순간부터 강원도 시민단체, 옵저버 프로그램도 없는 기상청, 심지어는 남들 가는 해외 출장 한 번도 못 가봤다며 이번에는 제발 좀 보내달라는 옵저버 프로그램과 아무 관련 없는 기록관리 담당자에게까지 소치를 보내달라거나 AD카드를 발급해 달라는 압박을 받았다. 1분에 부재중 전화는 3통이 넘었으며, 사무실 전화로 통화 중이라 전화를 받지 못하면 휴대폰으로까지 전화를 해댔다. 이 뿐이랴. 300 명 이상의 AD카드, 220개 비행기 좌석 예약 및 계약, 옵저버 호텔 계약 및 관리, 200여 명의 옵저버와 섀도우 관리, 90여 명의 조직위 옵저버 참가자 출장비 계산, 70개의 옵저버 프로그램 배정 등 모든 실무 업무는 옵저버 프로그램 담당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연스레 내게 떠넘겨졌다. 이 외에도 나는 각종 올림픽 지식이전 및 전수 업무를 수행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옵저버 호텔. 이 호텔도 몇 달 전 옵저버와 관련도 없는 AD카드 발급자들의 수요까지 고려하여 인원수를 산정하여 날짜별로 블록을 잡아놓고 돈까지 송금했다. 돈 계산하고 계약하고 송금하는 업무 하라고 강원도에서 파견된 공무원도 있는데 왜 내가 해야 하는지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지만 결국 두 손 든 내가 했다. 바쁜 와중에 러시아에서 항공으로 보내온 계약서를 들고 직접 서명을 해가며 몇 단계의 구식 수작업 결재라인을 거쳐 강원도에 소재한 농협은행을 통해 러시아에 송금까지 해 가면서 이 호텔을 예약했단 말이다. 오기 전날까지 남들은 설 연휴를 맞이하여 고향에 내려갔건만 난 텅 빈 서울 사무실에서도, 집에서도, IOC와 소치에서 요구하는 호텔 예약시스템에 호텔에 들어갈 사람들의 정보를 날짜에 맞추어 미리 입력도 했다. 향후 소치에서 수정도 그 시스템 안에서 하면 된다고 했는데 웬걸! 그건 모두 IOC의 규정을 따르는 시늉을 했던 소치올림픽조직위의 자작극이었다. 지금 내가 와있는 옵저버 호텔 담당자들은 그 시스템의 존재조차 모른다. 프론트에 항의하면 호텔 오피스에 가라고 이야기만 한다. 한꺼번에 한국에서 20명 이상 들어오는 날이면 체크인에만 한 시간이 넘게 걸리고 그중에 다섯은 “지금 방에 가봤는데요, 누가 이미 있어요”라고 말한다.
하긴. 처음 소치에 도착한 날이 생각난다. 호텔로 들어오자 총까지 들고 있던 군인 복장의 경비가 금속 탐지기로 가방을 스캔하더니 가방을 열라고 위협했다. 탐지기에서 금속 물질이 잡히고 있다는 거다. 그리고 신원이 확인될 때까지 들여보내 주질 않았다. 영어는 당연히 통하지도 않았다. 소치올림픽조직위의 옵저버 호텔 숙박 담당 타티아나에게 전화로 메일로 항의한 것도 한두 번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난 대회 전 11월에 방문했을 때 이후로, 지금 올림픽 시점에서는 타티아나의 얼굴 조차 본 적이 없다. 개선 사항도 없다.
어제저녁 IOC 애나에게 장문의 이메일로 이 상황을 고했다. 돈도 지불했는데, 예약시스템에 입력까지 했는데 방을 쓸 수가 없고, 누가 쓰고 있는 방을 주다니 이게 말이 되느냐며 말이다. 타티아나에게 전화가 온다.
"쏠!!!"
매우 화가 나있다. 애나가 뭐라고 했나 보다.
다행히 나는 그 시각 한바탕 하러 옵저버 호텔 오피스에 와 있다. 황급히 말을 돌린다.
“저기, 타티아나. 나 지금 호텔 오피스인데 얘네 말이 안 통해. 너무 힘들어. 네가 좀 얘기해 줘.”
타티아나와 오피스 담당자가 러시아어로 한참 통화한다. 오피스 한쪽 구석에서는 또 다른 담당자가 내가 제출한 소프트카피를 한참 동안 출력한다. 출력물이 참으로 기다랗다. 통화를 하던 오피스 담당자가 타티아나를 바꿔준다. 타티아나는 이제는 변경사항이 있으면 본인을 참조로 해서 이 호텔 오피스 담당자에게 엑셀로 메일을 보내라고 한다. 그럼 오피스 담당자가 자료를 프런트에 준다고 했다. 그러긴 하겠다만 이럴 거면 그간 무엇하러 그리 생고생을 시켰냐며 한국말로 중얼거린다.
애나가 손을 쓴 것인가? 호텔 앞을 지키던 경비는 이제 양복으로 갈아입었고, 러시아 미녀 자원봉사자 대학생 3명이 프런트에서 항상 대기하고 있다. 영어가 안 통하는 호텔에 영어 자원봉사자를 붙여줬다. 역시 최고 갑은 IOC다.
그럼에도 3일에 한 번씩 나는 러시아 미녀 영어 통역 자원봉사자와 오피스에 가서 이제는 엑셀 서류를 확인해주느라 고군분투한다. 하루에도 여러 번 호텔에 대한 불만은 터져 나오고 여전히 내가 이름 확인을 해 줘야 하며, 새로 배정받은 방은 먼저 온 누군가가 쓰고 있다.
소치는 원래 러시아의 휴양도시다. 소치는 올림픽을 개최한다면 겨울이면 산에는 눈이 쌓여있고 산 아래는 비교적 따뜻한 이 멋진 기후 조건의 휴양도시를 올림픽을 위한 새로운 도시로 재개발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새롭게 바뀌었다. 지난 11월에 왔을 때는 지금의 올림픽 패밀리 호텔(OFH)만 있었고 도시 전체가 전쟁터를 방불케 하던 공사판이어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은 스노경기가 열리고 리프트가 생길 거라고 하던 산 중턱의 허허벌판에도 정말 리프트가 생겼다. 내 업무 하느라 바빠 실제로 경기를 본 적은 없으나 스노보드 경기도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흙판이었던 도로도 이제 버스와 열차가 다닌다.
그러나 경기장 외의 기타 인프라는 마련할 계획도 없고 비용과 향후 사용 용도에 대한 대안도 없었을 터. 옵저버 호텔은 기존의 요양병원을 임시로 옵저버 호텔로 지정하여 활용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2016년 리우하계올림픽,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2020년 도쿄하계올림픽 옵저버가 모두 함께 생활한다. 2인실의 침대는 내 몸이 겨우 들어가는 간이침대고 당연히 프런트나 오피스는 현대화가 되어있지 않다. 올림픽 개막식 전까지만 해도 불청객마냥 취급했던 호텔 사람들과 동네 주민들도 TV에서 개막식을 보고서야 올림픽을 인식한 듯 우리에게 조금 친절해진 정도다. 그 어떤 국가라도 옵저버 호텔은 이곳 소치보다는 괜찮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 와중에 내게 AD카드를 받아갔던 ‘아무나’ 부류들이 이젠 묵을 곳이 없어 호텔에서 묵겠다는 요청이 들어온다. 예상은 했다마는 올림픽 행사는 개나 소나 오는 그런 곳이 아닐뿐더러 숙박도 마련하지 않고 오다니 어이가 없다. 시내 호텔에서 돈 주고 묵으란 말이다! 난 다시 명단을 바꿔야 하므로 이 호텔의 오피스에 가서 실갱이도 벌이고 타티아나에게도 메일도 보내야 한다.
이 아무나 부류 중 강원도 지역 신문 기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문사별로 총 10명 이상이 온 것 같은데 강원도청의 요청으로 이들을 위한 옵저버 AD카드도 발급해줬었다. 옵저버 호텔을 달라고 해줘서 내줬더니 호텔이 후졌다고 기사를 쓴다. 본디 언론사는 언론사를 위한 패스가 따로 있다. 그들은 언론사들을 위한 올림픽 대회시설 내 호텔에서 따로 묵는다. 언론사의 자격도 못 얻었으면서 목적 없이 왔으면 곱게 홍보활동이나 하고 할 것이지 내가 옵저버를 위해 만들어놓은 밴드에 몰래 가입하고 그 안에서 얻은 정보로 이상한 기사만 쓰고 있다. 뭘 하고 다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경기를 보러 다니면서 심심하면 옵저버 밴드를 보고 저녁에는 기사를 쓰나 보다. 거기에 뭐가 두려운지 강원도 공무원들은 경기 티켓까지 마련해 가며 절절매고 로비를 해댄다. 이상한 기사를 쓸까봐 그런건가. 어짜피 저들이 쓰는 기사는 다 이상할 텐데. 기레기... 기레기... 뭔가 했더니 기레기는 이런 족속들이었다. 강원도 공무원들은 악의성 기사를 쓸 거라며 옵저버 밴드에서 탈퇴도 못 시키게 한다.
옵저버 가방을 옵저버들에게 나눠주려고 프론트 근처로 가져왔더니 AD카드를 발급해 준 지역 의원이 왔다갔다 하는 게 보인다. 사진으로 얼굴을 보기는 했지만 얼굴이 반지르르해서 머리를 단정히 하고 꼿꼿이 걸어 다니는 게 ‘내가 의원이오~ 알아주시오~’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내가 강원도민이면서 강릉시, 평창군, 정선군민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내 세금이 아깝다. 다음 선거 때 이중 반은 떨어지지 않을 텐가. 돈 낭비다.
난 올 때 이미 사표를 써서 들고 왔다. 사유는 아주 명확하고 구구절절하다. 사실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는 내게 꿈의 직장이었다. 이건 운명이라 생각했다. 합격통보를 받은 날 ‘손에 손잡고’를 부르며 온 집안을 뛰어다녔다. 연봉도 반이나 깎였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러나 점점 각 기관에서 파견되어 온 공무원의 무능함과 횡포, 체육계 인사들 특유의 업무 처리, 번거로운 이중 한영/영한 보고체계와 각 기관별 5중 6중 보고체계, 내가 하지 않아도 될 공무원 업무의 대리 수행,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의 문의와 요청 속에 점점 지쳐갔고, 대외 정치하느라 정신없는 높으신 양반들 아래서 온갖 일을 떠안고 혼자 고군분투했다. 결재서류를 조작해서까지 소치를 가려던 강원도 공무원도 국회의원의 어처구니없는 요구사항도 겨우겨우 참고 눈감아 줘야 했다. 어떤 빽 있는 사람은 일주일 동안 무단결근을 하는데 나는 늦은 새벽까지 혼자 일했고, 쪽잠을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내가 왜 그 좋은 회사를 때려치웠을까 하는 후회를 하며 울기도 했다. 소치에 오니 좋은 것은 혼자 자다가 벌떡 일어나 우는 일은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럴 때쯤이면 휴대폰이 나를 깨우고 정신없게 한다.
정말 오기 싫었는데,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겠지만 내가 안 오면 이 모든 프로그램은 망한다 싶었다. 겨우 2월 한 달을 못 참아서 국민 역적이 되는 것도 싫었다. 정말 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개최를 위하는 진심 어린 마음으로 왔다. 사표는 폴더에 껴서 한 달치 짐을 싸느라 새로 산 대형 캐리어에 고이 모셔두었고 힘들 때마다 생각하며 위안을 얻었다. 물론 소치 대회 경험이라는 것을 할 극히 드문 기회를 얻게 된 것에 대해서는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업무가 대회 경험이라면 더는 안 하고 싶다.
이 외에도 웃지 못할 사건은 소치에서도 매일 다이내믹하게 진행되었다. MBC에서는 옵저버와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찍겠다고 오기 전부터 사전 접촉이 들어왔다. 그래서 짬을 내어 소치 대회 중 IOC 홍보담당자를 만나 허락도 받았다. 요청에 따라 인터뷰를 진행할 옵저버도 모아놨다. 촬영 날이다. 근데 무단으로 펑크를 냈다. 멘붕이 왔다. 대형 언론사마저... 믿었던 PD마저... 한 공무원은 술을 먹고 잔디밭에서 노상방뇨를 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밤에는 객실 문을 뻥뻥 차고 다녔고 그 작자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도 문 차는 소리는 들었다. 섀도우 담당자 한 명은 미리 소치 섀도우 담당자와 합의를 하고 왔는데 자기를 경기장에 들여보내 주질 않는다며 해결해달라고 수시로 쪽지를 보낸다. 해당 경기 담당자에게 연락을 해보지만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한다. 그 사람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애가 탄다. 어떤 분은 친인척상을 당했는데, 공항까지 어떻게 가는지 모르고 아무도 데려다 줄 사람이 없다며 데려다 달라고 순진하게 부탁한다.
내가 여행가이드냐. 혼자서 공항까지 갈 줄 모르는 공무원을 공항에 바래다주고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 소치 조직위 지식관리팀장에서 전화가 온다.
“안녕! 나 소치 조직위 알렉산더인데 너 많이 바쁘지? 나도 그래. 지금 한국인 한 명이 소치 시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연락을 받았어. 아무래도 너네 옵저버인 것 같아. 병원에 영어자원봉사자가 있으니 그 애한테 전화해볼래?”
확인해보니 감기 기운이 있는데 비장한 각오를 보이며 굳이 소치에 왔던 개최도시 공무원이다. 그분은 그 병원에서 며칠 동안 격리된 채 중대 수술을 받고 소속 개최도시 시장님과 함께 돌아갔다.
나도 시간을 내어 옵저버 프로그램 하나를 듣는다. 듣고 있자니 영어가 되는 강원도 공무원이 계속 무례하게 질문한다. 나조차 거슬린다. 본인이 영어 잘한다고 뻐기는 건지 평창이 훨씬 낫다고 자랑하는 건지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 IOC 관계자가 쉬는 시간에 와서 말한다.
“쏠, 저사람 제지 좀 해줘. 소치조직위에 실례야."
대충 그에게 설명하긴 했는데 그 사람은 입이 엄청 나왔다. 폐막식 날 폐막식 행사 티켓을 여러 장 펼쳐 들고서는 ‘너는 이거 못 보지?’하는 표정을 하고 행사장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과연 이렇게 떠들썩하게 왔다 가서 실제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해당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은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대부분의 공무원은 소치에서 구경만 잘하고 시간만 잘 보내고 보직을 옮겨 다른 곳으로 갈게 뻔하다. 일단 나부터도 그 꼴도 못 보겠고 이 짓도 못 해 먹겠다.
위원이란 타이틀을 가진 나이가 지긋한 옵저버가 위로랍시고 말한다.
“오래 사시겠어요. 쓰잘데기 없이 욕을 하도 많이 먹어서...”
난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물론 모든 참가자들이 나의 올림픽 순수 열정을 짓밟아 버린 것은 아니다. 많이 도와주고 열심인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이 중에 제일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통역이다. 언어가 안 되는 대부분의 옵저버들을 위해 옵저버로 와서는 통역업무를 하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어느 날 그중 다람쥐처럼 귀여운 써니 씨가 눈물을 그렁그렁하며 이야기한다.
“저 어제 귀신 본거 같아요.”
웬 귀신? 남이 귀신 본 이야기는 고등학교 때 이후 처음 들었다.
내가 평소 신뢰하던 써니 씨가 그런 이야기를 하니 나는 더더욱 믿을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 둘이 창가에 앉아 있길래 쳐다봤어요. 치마를 입은 여자와 어린 남자였는데... 자세히 보니 다리가 없이 둥둥 떠 있었어요.”
그러자 옆에 있던 변호사도 맞장구를 친다.
“빨간 모자를 쓴 남자가 내 방에서 왔다 갔다 했어요.”
아니 믿을 만한 사람들이 왜 이러는 건가? 내가 싫어하는 기레기도 아니고, 시의원도 아니고, 관광 온 사람마냥 신나서 돌아다니는 공무원들도 아닌 이 사람들이 왜 이러나.
우연을 가장하여 느닷없이 경험한 귀신 목격담이 하나 둘 나오자 나는 점점 무서워졌다. 아무래도 요양병원이었다는 이곳에 무언가 사연이 많아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반은 영국인인 경기장 설계 전문가는 체크인하던 날 방에 갔다가 기겁을 하고 나와 너무 무섭다며 룸메이트를 구해줄 것을 요청했다. 가만 보니 낮에는 이곳 호텔은 너무 고요한데 나만 시끄럽게 떠들고 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밤에는 불빛에 비친 곳곳의 조각상들에 사연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난 기가 세서인지 아님 둔감해서인지 아직 귀신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듣자니 소름이 돋으면서 내가 얘기한 러시아 자원봉사자들은 사람이었을지, 내가 낮에 찾아가는 오피스 직원들은 귀신을 본 적이 있을지 궁금해졌다. 새벽에 전화를 받고 눈을 비비며 프런트에 가서 일을 처리할 때도 오싹하는 느낌이 들어 뛰어갔다가 뛰어오곤 했다.
어느덧 소치 올림픽은 성황리에 끝이 났고 옵저버 프로그램과 섀도우 프로그램도 모두 종료됐다. 하아! 이제 끝이다! 내가 러시아에서 사용한 로밍폰 사용량을 보니 수신은 78시간, 발신은 약 26시간이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4일을 통화만 한 셈이다. 모두들 오늘 떠난다. 하지만 나는 패럴림픽 옵저버 프로그램은 이제 시작이기에 패럴림픽 옵저버 담당자들이 (3명이나 되었음) 올 때까지 하루 더 있다 가야 한다. 혼자만의 시간. 나쁘지 않다. 패럴림픽은 규모가 작고 패럴림픽이란 특성상 옵저버들이 모두 OFH에 묵는다. 다만 올림픽을 패럴림픽으로 바꾸는 대회 이전 기간(transition time) 동안 그들은 여기 잠시 머물러야 했다.
AD카드를 발급해 줬던 국정원 직원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정말 우리가 모르게 활동을 하고 있었다. 중요 행사 있을 때에만 VIP 위치 확인에 대한 전화가 왔었다.
“저도 이제 갑니다.”
“아니 어딜 가세요? 저의 안전도 있는데요!”
“이젠 안전할 거예요. 고생 많으셨어요”
난 속으로 생각한다. 귀신 있는데.
홍보팀으로 같이 와서 대회 내내 전시관을 운영했던 지니 언니도 내 옆에서 짐을 싸고 있다. 새벽 1시 반이면 이들 모두 버스나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돌아간다. 다들 짐을 싸느라 바쁘고 가끔 나에게 찾아와 열쇠도 주고 남은 음식도 준다. 갑자기 한가해진 나는 혼자만의 계획을 세우다 남은 라면을 혼자 다 먹어버릴 거라고 결심한다.
모두들 떠났다. 새벽 2시쯤 된 것 같다. 숙소로 혼자 터벅터벅 돌아오는 길. 오늘따라 더욱 이 길이 낯설고 어두컴컴하게 느껴진다.
귀신 나오는 거 아냐?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구치는 것 같다.
음? 내가 묵는 건물 1층에 환한 빛이 보인다.
귀신 아니야?
환한 창 안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안심을 한다. 리우 올림픽 담당자들이 노트북 앞에 앉아 정신없이 일하고 있다. 난 너무 반가운 마음에 리우 올림픽 옵저버 담당자 호세를 향해 손을 흔든다. 호세는 패럴림픽 옵저버 프로그램까지 담당해야 해서 내일까지 일을 마치고 잠시 여행을 다녀올 거라 했다. 뭐 호세도 있으니까, 난 혼자가 아니야! 안심하며 잠자리에 든다. 늦게까지 늘어지게 잤다.
다음날 저녁, 패럴림픽 팀이 도착했다. 이것저것 알려주고 물건도 전달하고는 내가 다 먹어버리려고 했던 라면을 함께 먹으며 나는 무심한 듯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