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6학년 때 짝꿍이었던 박현신을 만났다. 현신이는 법대를 다니고 있었다. 현신이는 6학년 때도 똑똑하고 논리적이었다. 늘 약간 삐딱한 자세였는데 선생님한테 주먹으로 얼굴을 맞는 것을 짝꿍이어서 바로 옆에서 본 적이 있다. 사법고시 공부한다고 사라진 후론 박현신을 보지 못했다. 뭘 하고 있을까? 법조인이 되었을까? 우리는 둘 다 한 학번이 늦었는데 나는 현신이가 학교에 있어서 좋았다. 그때 나눈 이런저런 이야기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6학년 때의 넌 뭐랄까.
우리랑은 다르다는 느낌이 있었어.
이미 넌 그때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잖아.
그래서 어른스러운 느낌이었지."
내 어릴 적 자랑이 있다면, '서울시립소년소녀합창단'이었다는 것이다. 합창단 활동으로 인해 나의 초등학교 생활은 평범하지는 않았고, 가만있어도 튀었다. 수업을 자주 빠지거나, 수업 중간에 공연 준비를 위해 조퇴를 하는 일도 있었다. 토요일에는 학교가 끝나면 바로 세종문화회관이 있는 연습실엘 갔다.
지금은 초등학교 2학년부터 활동이 가능한 것 같은데, 나는 당시의 최연소 자격이었던 4학년에 입단했다. 만 9살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나와 함께 들어온 동기들 중에는 6학년 언니들이 많았다.
합창단원이 된 것은 서울시립소년소녀합창단 출신이었던 피아노 학원 선생님 덕분이다. 권민아 선생님은 연세대 피아노과를 졸업하고 유학을 다녀와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연세피아노'를 열었는데, 학생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합창교실을 열고 노래를 가르쳐주셨다. 선생님이 무료 합창교실을 열고 우리에게 노래를 가르쳐줬던 것은 그만큼 선생님의 합창단 생활이 너무 좋았기 때문인 것 같다.
내 재능을 알아본 선생님이 어느 날 엄마에게 연락해서 '서울시립소년소녀합창단'이라는 것이 있고, 지금 단원을 뽑고 있는데 지원해 보는 것이 어떻냐고 권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따라 쫄래쫄래 합창단 사무실이 있는 세종문화회관에 시험을 보러 갔다. 내가 시험을 보게 된 것을 듣고 시험 보겠다고 자원한 친구와 그 엄마, 그리고 그 엄마의 친구 아줌마들과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였다.
그때 내가 불렀던 것은 '무지개'라는 동요였다.
- 알쏭달쏭 무지개 고운 무지개
- 선녀들이 건너간 오색 다린가...
이런 가사의 노래였다.
발성 테스트도 봤던 것 같다.
- 아아아아아아아아아~
- 아에이오우~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내 음정을 확인했다.
그리고 피아노 반주자 선생님이 아무렇게나 막 반주를 해도 꿋꿋하게 '무지개'를 부르는 테스트도 있었다. 여기서 나는 약간 흔들렸다.
며칠 뒤,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첫날의 발성 연습에서 메조소프라노 파트에 배정받았다.
이렇게 만 9살 4학년에 첫 사회생활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준단원이라고 해서 연습생 시기를 거쳤다. 공연 대비반처럼 발성도 배우고, 악보도 익히고 파트 연습도 한다.
6학년 언니들은 나를 너무 귀여워해 줬다. 생각해보면 그 언니들도 참 귀여웠을 때인데. 언니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나를 불러서 내 볼도 꼬집고 귀엽다고 했고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했다. 간식도 하나 더 챙겨줬다. 그중 한 언니는 아빠가 KBS 드라마 PD여서 드라마에 나오기도 했고, 또래 언니 중 현수 언니는 나중에 포카리스웨트 모델이 되어 모델이자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렇게 예쁘고 귀여운 언니들이 나를 귀여워해 줬던 건 참 영광스럽다. 지금도 나는 그 언니들을 기억하지만 그 언니들은 나를 기억 못 하겠지.
첫 연습곡부터 남달랐다. 비발디 <사계>의 합창곡이다. 비발디의 <사계>를 "랄랄랄랄라라라~" 이렇게 가사로 표현하는 것이었는데 처음 느껴보는 합창의 느낌이 웅장하면서도 너무 좋았다. 이 노래는 언니들의 몫이었고, 나는 공연장에서 이 노래를 부를 기회는 없었지만, 내 첫 연습곡이 동요가 아닌 비발디의 사계라는 것 자체로 자긍심이 넘쳤다.
어린이의 특권으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의 장기 공연도 참여했다. 서울시립오페라단의 오페라 <운명의힘>에 거지 역으로 출연했다. 아마도 내 첫 공연이었을 것이다. 이때는 대사가 없었다. 거지 복장을 하고 밥을 먹는 시늉을 했다. 그다음 해 출연한 오페라에서는 가사가 딱 두 줄 있었다.
- 빌라노 다인디에뜨로~
- 빌라노 다인디에뜨로~
아마도 사람을 놀리는 그런 가사였다.
그해 12월 정기공연에는 <호두까기 인형>을 연주했다. <호두까기 인형> 역시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을 합창곡으로 편곡한 것이었다. 특히 클라라 역을 맡았던 서연 언니를 보며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꿈이라면 깨지 말라
-고마워요 고마워요. 아아아 행복하여라~
-바칩시다 꽃을 바칩시다 장미꽃을~
-꽃이 피는 봄의 노래
덕분에 나는 차이콥스키 <호두까기 인형>을 피아노 서곡부터 합창곡의 가사까지 모두 알게 되었다.
이 공연에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의 작곡가 안병원 선생님이 직접 지휘를 해서 공연 자체가 매우 화제였다. 어떻게 보면 나의 첫 합창단 정기공연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키가 작고 어렸던 내가 태극기를 손에 들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는 모습이 매체에 많이 실렸다. 잊을 수 없는 한 해였다. 아직도 여전히 내 생애에 좋았던 해를 꼽으라고 한다면, 이때, 1990년을 꼽는다.
나를 테스트해서 단원으로 뽑아주신 당시의 총무, 원학연 선생님은 내가 4학년을 마칠 무렵, 폴란드로 유학을 떠났다. 작고 조그마한 체구에서 뿜어 나오는 공명이 인상적이었고 항상 재밌게 노래를 가르쳐주어 우리가 참 잘 따랐던 분이었는데, 선생님이 떠나시던 날 엘리베이터 앞까지 울면서 따라나간 기억이 있다.
내가 입단한 초창기에 계셨던 김명엽 선생님, 1대, 3대 지휘자 백천웅 선생님의 가르침 아래, 그리고 많은 좋은 선생님들의 코칭 아래 나는 성장해갔다.
-돌아온 나의 고향 마중 나온 나의 친구
-옛날의 추억 그린 그린 그라스 오브 홈~
주변의 할머니 할아버지들 앞에서 부르면 참 좋아하셨던 노래다. 향수를 자극하는 노래였나 보다 싶다. 이 노래는 미국 대사관에 초청받아 미군들 앞에서도 불렀던 기억이 있다.
세종문화회관뿐 아니라 예술의전당, 국립극장 등의 큰 무대에도 많이 서봤다. 홍난파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고향의 봄> 뮤지컬에도 참여했다. 남북 고위급 인사들이 우리의 공연을 관람했다. 서울시향 주관의 팝스콘서트도 내가 좋아하던 공연 중 하나였다. '팝'을 주제로 '나홀로집에', '알라딘' 등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고 '한국의 휘트니 휴스턴'이라 불렸던 신효범과 같은 가수와 함께 노래도 불러봤다.
금난새 선생님, 명동성당 신부님, 리틀엔젤스 선생님들도 객원지휘자로 만났다. 어떤 연말에는 문화체육부 장관에게 털모자와 목도리도 선물로 받았고,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 때에는 청와대에서 리무진을 타고 들어오는 김영삼 대통령을 맞으며 '대통령 찬가'를 불렀다. (지금은 금지곡이다)
- 어질고 성실한 우리 겨레의
- 찬란한 아침과 편안한 밤의 ~
대통령은 리무진에서 내려 청와대로 들어가기 전 우리 모두에게 일일이 악수를 했다. 이 모습은 TV에 나왔고, 많은 사람들이 TV에 나온 나를 봤다. 아직도 대통령 손의 촉감이 기억난다. 대통령의 손은 내가 그동안 악수해 본 손 중 가장 까칠했다.
당시에는 <사랑이 뭐길래>라는 드라마가 인기였고, 언니들이 선생님들한테 졸라서 연습을 일찍 마치기도 했다. 그럼 환호하며 집에 돌아와 아주 조금 대발이를 볼 수 있었다. 어른 합창단인 서울시립합창단과 연습실을 같이 썼고, 합창단 연습실의 필수품인 덧신을 안 가져간 날이면 어른들의 하이힐 슬리퍼를 신고 어딘가를 왔다갔다한 기억도 있다. 연습이 엉망이었거나 우리가 너무 시끄럽게 떠든 날이면 고등학생 최고참 언니들에게 단체로 정신교육을 받기도 했다.
연습은 학교가 끝나고 오후에 시작해서 밤에 끝났기 때문에 합창단에서는 늘 간식을 제공해줬다. 지금도 건재하고 있는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옆 KFC에선 우리를 위한 맞춤형 간식을 제공해줬다. 비스킷, 코울슬로, 치킨, 음료로 구성된 것이었다. 때로는 덕수제과에서 때로는 참새방앗간에서, 혹은 맥도널드에서 간식이란 이름의 저녁 식사가 제공되었다.
선생님들이 항상 강조하신 것이 있다.
-너네가 아마추어니? 프로야. 프로페셔널해야지.
-그러니 무대에서는 더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 해.
-그리고 프로페셔널하다는 건 공부도 잘하는 거야. 우리 합창단 친구들은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는 그런 친구들이어야해.
우리 대부분은 선생님의 바람대로 그랬다. 노래도 잘하고 공부도 잘했다. 쭉 성악으로 진로를 가진 언니들은 예고를 다녔고, 합창단 활동을 한 덕에 세종문화회관에서 우리가 공연할 때 독창회의 기회도 주어졌다. 그랬던 언니들은 서울대, 연대 성악과로 진학을 했다. 나도, 내 친구들도 그럭저럭 학업을 이어갔고, 결론적으로는 성악 진로는 아니어도 생물학 박사인 친구도 있고, 외교부, 고용노동부 등지에 근무하는 친구도 있다.
합창단에는 나를 지금도 들뜨게 하는 멋진 표어도 있다.
"노래는 맛있게, 표정은 밝게, 마음은 즐겁게"
50년이 넘어도 촌스럽지 않다.
우리는 이렇게 노래를 맛있게 부르면서, 밝은 표정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합창단 생활을 했다.
내가 합창단 생활에 회의를 느낀 것은 사춘기가 왔을 때다. 당시 발성 선생님의 딸도 합창단을 다니고 있었는데, 다른 아이들과 달리 처우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공연에서도 매번 레퍼토리가 비슷해지다 보니 지루함이 커졌다.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기 때문에 오페라나 뮤지컬 같은 재밌는 공연 경험의 기회도 사라졌다. 부모님은 내가 합창단 활동을 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지만, 정작 내 공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연습은 물론이고, 화려한 공연을 마치고 혼자 버스를 타고 또 많이 걸어 집에 돌아오는 길은 쓸쓸했고, 외롭기도 했다.
합창단에서의 난 언제나 약간 위축된 아이였던 것 같다. 얌전하고 적극적이지 않았다. 반대로 학교에서는 처음에는 조용하게 지내다가도 시간이 지날수록 친구들이 좋아하게 되는 인기쟁이였다. 중학생이 되어 단발을 강요하는 학교에는 합창단 공문을 내면 머리를 계속 기를 수 있었지만 튀는 것이 싫어 단발로 짧게 머리를 자르고 평범해지려 했다.
사춘기의 나는 중2가 되어 내 합창단 활동에 전혀 관심 없는 엄마에게 불만을 품고 물었다.
"엄마, 나 합창단 그만둘까?"
엄마는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니 맘대로 해라."
그래서 나는 그 주에 친구들에게도 선생님에게도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전화로 합창단을 그만두겠다고 통보했다. 그때가 중2 말. 2년만 더 버티면, 고1을 지내면, 명예로운 졸업을 할 수 있었는데 나는 그렇게 나의 첫 번째 사회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더 다녔다고 해서 내 운명이 바뀌었을 것 같지는 않다. 가슴이 미어지거나 하는 안타까움은 없었지만 근근이 나의 무모한 결정에 후회는 많이 했다. 엄마는 왜 나를 말리지 않았을까 하는 원망도 있었다. 거울이 있는 합창단 연습실에서 덧신 신고 뛰어다니며, 친구들과 간식 먹고 떠들고 노래하는 꿈도 참 많이 꿨다.
노래는 반 아이들이나 선생님이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면 절대로 하지 않았다. 고2부터는 악관절 장애를 앓았다. 턱에서 소리가 나는 질환으로, 치료를 받으며 성악 진로에 대한 환상을 영원히 접었다. 점점 노래를 하지 않게 되어 노래 실력도 잃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광화문에 갈 일이 있는 날이면 세종문화회관 연습실을 기웃거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한 번도 합창단 공연을 일부러 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합창단 생활에 대한 그리움은 있었고 꿈에서도 가끔 등장했다.
그러다가 합창단에서 동문이 노래를 함께 부르는 파트가 있는데 참여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왔다. 어릴 적 함께했던 변함없는 친구들과 재회했다. 우리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함께 노래했다.
이후 2014년에는 '서울시소년소녀합창단 창립 50주년 기념음악회'라는 좋은 무대 기회가 생겼다. 많은 동문들이 공연을 위해 참여했다. 이번에는 지휘자 선생님들도 모두 만났다. 선생님들은 여전한 포스와 목소리로, 그때의 그 말투로 살갑게 맞아주셨다. 나는 연습에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모두 참여했다. 그때도 우리는 눈물을 훔치며 노래했다. 이때부터 나는 합창단을 중간에 그만두었다는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리고 2019년, 서울시합창단에서 서울시민합창단을 뽑아 <유관순 칸타타> 공연을 함께 한다는 소식에 근처에서 프로젝트를 하고 있던 나는 흔쾌히 오디션에 참여했다. 옛날 연습실에서 옛 단원으로서 이렇게 어른 합창단의 공연에 참여하는 것이 기뻤다.
내가 예전에 합창단 활동을 했다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모님이 내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하셨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그리고 당시의 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부모님도 그런 건 없었다. 우리는 독립적이었고, 순수하고 열정 있는 전문적인 선생님들에게 거의 동등한 케어와 지도를 받았다. 여기에 별도로 드는 비용도 없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남아있었으면 하는 것이, 그리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지금은 '서울시소년소녀합창단'으로 바뀐 나의 합창단이다. 우리가 그렇게 맑고 밝고 맛있게 합창단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들이, 그리고 어른들이 우리의 순수함을 지켜주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50주년 공연 연습 때 선생님들은 이렇게 모이는 것이 마지막일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백천웅 선생님, 김명엽 선생님, 원학연 선생님을 모두 볼 수 있어서 좋았고, 그것이 100주년에도 이어지길 바랐다.
그런데 그 합창단은 이제 없다.
박원순이 서울시합창단과 서울시소년소녀합창단을 통합해버린다는 소식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른 합창단과 소년소녀합창단은 엄연히 다른 것이고, 달라야 함을 알았던, 소년소녀합창단을 지켜주고 싶어 했던 많은 어른들이 반대했던 것으로 안다. 나도 블로그에 분노의 글을 올렸는데 그 글은 텔레그램을 통해 서울시 공무원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무력하게 통합되는 것을 보고 서글펐다. 잠시 서울시합창단 공연에 참여했던 나를 부끄러워했다. 우리를 담당하셨던 세 지휘자 선생님들은 이제 소년소녀합창단 활동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합창단은 망가졌고, 기획자였던 박원순은 자살을 했고, 이후에는 코로나가 왔다.
코로나 이후, 합창단은 다시 재기를 꿈꾸고 있을지 모르겠다.
다시 옛 모습과 영광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성인이 되어 오늘도 이어지고 있는 나의 사회생활. 나는 10세 때부터 합창단 활동을 통해 익힌 무언의 원칙을 확인하면서 지켜가려고 하고 있다.
구성원 개개인의 순수한 열정은 계속되어야 하고, 지켜져야 한다.
아무런 생각 없이 중도 포기하는 법은 없어야 한다. 충분히 고민하고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최고라고 생각했던 내가 속한 조직이 최고라고 느껴지지 않으면, 떠나도 좋다.
스스로가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어야 하고, 그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모두가 열심히 매진하고 변화해야 한다. 그것이 최고의 시너지를 내는 조직문화로 발전한다.
내 직장이 이런 조직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합창단도 다시 이런 모습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순수한 열정으로 프로페셔널을 추구하던, 어른들도 존중할 수 밖에 없었던 본연의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