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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퓰러 Sep 14. 2022

아버지의 아버지를 그리다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

오늘도 아버지의 잔소리가 시작됐다.   

"나는 네가 샤워하고 청소를 하는 꼴을 한 번도 못 봤다. 언제쯤 청소할래?"


내가 샤워하고, 다음에 바로 누군가가 샤워할 텐데 굳이 청소를 할 필요가 있나?

굳이 대답하지 않는다.


가족끼리 근교로 놀러 가자는 아버지의 제안에 나는 SNS 기자단 활동 때문에 임진각 평화누리에 갈 일이 생겼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또 한마디 보탠다.  

"그럼 간 김에, 거기도 갔다 와라. 625전쟁납북자기념관."


임진각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

거기 가면 아버지의 아버지. 내 할아버지의 이름을 볼 수 있다.


그동안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이 생겼다는 것은 아버지 덕에 알고는 있었지만 크게 관심 갖지는 않았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5세 조카 말투를 흉내 내며 말한다.

"시러~!!!"






아버지가 처음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을 다녀온 것은 4세였던 손자와 함께였다.

손자로 인해 정신없는 와중에 손자가 안내원을 너무 좋아하고 잘 따르길래 잠시 그 안내원에게 잠시 손자를 맡겨두고 할아버지 이름을 보고 왔다고 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이름을 본 순간 울컥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했다.


예전에 한 방송인은 본인이 엄마가 없이 자라서 그런지 엄마가 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모른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장면을 보면서 말했다.

"맞아. 나도 아버지가 있다는 느낌이 어떤 건지는 모르겠어. 그냥 '이런 걸 거다...' 하고 추측하는 거지."


아버지는 얼굴도 기억 못 하는 할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은 있었으나 원래부터 안 계셨던 존재였기에 부족하다는 생각 없이 컸다고 한다. 다만 꼬마 시절 아버지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수시로 흘리는 눈물과 한탄의 기억은 생생히 남아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내가 꼬마 시절, 아버지는 항상 나를 이렇게 혼냈다.   

"아빠가 없고, 너 혼자 산다고 생각해봐! 이렇게 울고 떼쓰면 안 되지! 씩씩해야지!"





갈 때는 문산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임진각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가 자주 없어서 한참 걸렸다. 임진각-문산을 다니는 열차가 오전 1~2회, 오후 1~2회 있으니 시간을 맞춰 이 열차를 타면 보다 편리하게 임진각에 다녀올 수 있다.  




예상과는 달리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은 임진각 초입에 아주 가까운, 접근성이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선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에서 SNS 기자단 취재를 했다.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시간까지 약 40분이 남았다.


서둘러 6.25전쟁납북자기념관에 들러 할아버지 이름을 보기로 한다. 입장을 하자 안내해주시는 분이 말한다.

"1층부터 둘러보시고 2층으로 올라가세요."


1층에는 할아버지 이름이 없는 것 같다.

빠르게 둘러보고 2층으로 올라갔다.

저 멀리 엄중한 분위기가 느끼는 곳이 있다.

빠르게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많은 이름들이 나무판자에 빼곡히 적혀있다.

할아버지 이름이 눈에 보인다.


할아버지 이름 세 글자를 확인한 순간, 갑자기 깊은 곳에서 슬픔이 몰려왔다. 나도 모르게 그 슬픔이 입 밖으로 나왔다.

"어흐흐흐흑"


납북자 명단을 검색하는 키오스크도 눈에 보인다.

흐느끼면서 할아버지 이름을 검색해본다.

눈앞에 할아버지 이름과 납북 추정 일자가 검색되어 나타난다.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으면서 더 큰 슬픔이 몰려온다.

더 크게 흐느낀다.




아버지가 느꼈던 감정도 나와 같았을까?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에 할아버지 이름이 포함되게 된 것은 2012년 정부가 추진한 납북자 신고 절차 덕분이었다. 그 전에는 어디선가 6.25 납북자 8만여 명 명부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것도 같다.  이후 국립중앙도서관과 정부기록보존소에 있던 5만 9964명의 피살자 명단으로 구성된 4권의 두꺼운 책이 우리 집으로 배달됐고 지금도 아버지 서재에 꽂혀있다.  이러한 시간의 흐름 속에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정부로부터 납북자로 인정받는 작업을 했던 것이다.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은 4권의 책이 우리 집에 오고 나서 한참 후에 생겼다.


납북자 신고를 준비하던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가족과 말 한마디 못하고 잡혀가 외롭고 어둡고 쓸쓸한 죽음을 맞게 된 모습을 상상하며 할아버지가 불쌍해져서 가슴이 미어졌다고 한다.


아버지는 서재에 있는 그 두꺼운 책을 손에 넣은 순간, 나처럼 이렇게 흐느끼지 않을까?


단지 이름 석자 새겨놓은 그 책이, 그리고 이 공간이 얼마나 아버지에게는 소중한 공간일까. 납북자 가족에게는 또 어떨까.




나는 왜 울고 있는 것인가? 


할아버지가 불쌍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아버지가 불쌍하고, 또 아버지한테 미안해서 눈물이 나는 것 같다.


이상하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감정도 함께 몰려왔다.

내게는 너무나도 큰 존재인 아버지...

아버지가 안 계시다면 나는 아버지를 얼마나 그리워하며 고통스러워하고 슬퍼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

아버지가 안 계시면 나는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비도 오고,  날씨도 춥고,  혼자고...

나는 그냥 마음껏 울어 버린다.




이곳을 다녀와서 몇 주 뒤 아버지에게 사실 6.25전쟁납북자기념관을 다녀왔노라고 고백했다.

아버지의 첫 말은 이랬다.

"참내. 손자가 아니고, 손녀가 먼저 다녀왔네."

그다음은 현 정부 비판이 이어졌다.  

"그나마 박근혜 정부 때 이런 거라도 만들어져서 다행이지!"


생각과 이념의 차이 속에 구성원들 간의 갈등은 항상 존재한다. 그로 인해 할아버지는 납북됐다. 개인의 이익과 상황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은 저마다 다르다. 아버지의 말에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할아버지도 손자가 아닌 손녀가 먼저 와서 섭섭해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나는 할아버지를 만나서 너무나도 반갑다는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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