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의 변방에서 쌓아 올린 숨은 거장의 세계
아마도 당신이 들어 보지 못한, 그러나 가장 성공한 영국 음악가
- 텔레그래프(The Telegraph) -
일견 단순한 홍보문구로 읽히는 어느 매체의 표현은 어느덧 반백을 넘긴 음악가의 궤적을 적확히 읽어내고 있다. 사이키델릭으로 출발, 프로그레시브 록 그리고 메탈로 이행한 포큐파인 트리(Porcupine Tree)부터 노맨(No-Man), 블랙필드(Blackfield), 스톰 커로젼(Storm Corrosion) 등 다양한 이름으로 작업물을 내놓은 스티븐 윌슨은 주류 음악과 동떨어진 변방에서 착실하게 세를 넓혀 왔으니 말이다. 여기에 본인의 이름으로 내놓은 최근 두 장의 음반, 재즈 퓨전과 아트 록의 유전자를 수혈한 <The Raven That Refused To Sing (And Other Stories)>와 고독사한 여인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은 콘셉트 앨범 <Hand. Cannot. Erase.>가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차트 성적을 거두면서 대중에게도 그 이름을 각인시키는 듯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대중과 평단 모두의 호응을 얻은 지금에 와서 그는 단 한 장의 음반으로 모두를 배신한다. 변박 따위는 없는 간결한 리듬, 직관적으로 귀에 내리 꽂히는 선율이 스티븐 윌슨이라는 이름에 이끌린 청자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진실의 유일성에 대해 의구심을 던지며 시작하는 "To The Bone"이 그 신호탄이다. 테크니션 마르코 미네만(Marco Minnemann)을 대신해 기용된 제레미 스테이시(Jeremy Stacey)의 드러밍은 촘촘하게 조직되기보다는 일관성 있는 진행으로 여유롭게 곡을 지탱하며, 니네트 타엡(Ninet Tayeb)의 배킹 보컬은 건조한 남성 보컬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선율의 풍미를 한층 끌어올린다.
피어오르는 당혹감은 "Nowhere Now"에 접어들면서 변화에 대한 확신으로 굳어간다. 도입부에서 기타의 파열음으로 소리를 확장하는가 하면 후렴에서는 공간감을 머금은 톤으로 곡을 장식한다. 뒤이어 나오는 기타 솔로 또한 지난 음반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한 진행을 선보이니, 음악가의 변화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시점이다. "Pariah (Feat. Ninet Tayeb)"에서는 남녀 보컬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음악가의 진솔한 고백을 전한다. 처음 들려오는 것은 여린 목소리로 현실의 피로감을 고백하는 남성. 이어서 거친 목소리를 타고 여성 화자의 노랫말이 다가온다. 남성 보컬의 무기력감과 대조를 이루며 극적인 분위기를 강조하는데, 보컬리스트로서 표현력의 한계를 자각한 음악가의 극복 시도인 셈이다.
계속해서 음반은 굳히기에 들어간다. "The Same Asylum As Before"의 날카로운 리프 진행, "Refuge"의 백미인 하모니카와 기타 솔로 모두 곡의 진행에 따라 자연스럽게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뿐이다. 연주 스타일에 있어서 교집합을 가질 지도 모르겠으나, 청자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곡 구성을 비틀던 과거와는 명확히 대비되는 부분이다. 이어지는 트랙, 고양감을 불러일으키는 "Permanating"은 어떤가. 8비트 건반음이 닦아놓은 길 위로 가성과 진성을 자유롭게 오고 가는 목소리는 음반 내에서도 압도적인 선율을 뽐낸다. 여기에 부족한 기교의 완충제로 설정한 코러스, 신시사이저 등의 장치가 완성도를 높이니 킬링 트랙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간결한 구성의 수록곡 사이에서도 익숙한 존재감을 뽐내는 곡들이 있다. "Song Of I (Feat. Sophie Hunger)"과 "Detonation"이 선사하는 2연타다. 전자의 앰비언트 팝 사운드가 가슴 깊은 곳을 짓누르는 베이스 라인과 스산한 현악기 선율로 불길함을 빚어내는가 하면, 후자가 맹목적인 신앙에 대한 비판을 9분에 이르는 대곡에 녹여낸다. 특히 급격한 변화 대신 하나의 주 선율로 시작, 점진적으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Detonation"은 몰입도에서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서두의 인용구를 다시 떠올려 본다. '아마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은 비단 스티븐 윌슨이라는 음악가를 몰랐던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팬을 자처했던 이들이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스티븐 윌슨의 세계를 본작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전혀 낯선 것만은 아니다. 포큐파인 트리의 프로그레시브 록에서 노맨의 앰비언트 사운드까지, 대중음악의 변방에서 고유의 스펙트럼을 형성해 온 숨은 거장은 이곳저곳에서 자신의 파편을 끌어와 한 장의 음반으로 연성해냈다. 다만 그것을 조직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낯설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경험. <To The Bone>이 담아낸 음악이 그 어느 때보다 방대한 이유다.
음악가 : Steven Wilson(스티븐 윌슨)
음반명 : To The Bone
발매일 : 2017.08.18.
수록곡
1. To The Bone
2. Nowhere Now
3. Pariah (Feat. Ninet Tayeb)
4. The Same Asylum As Before
5. Refuge
6. Permanating
7. Blank Tapes (Feat. Ninet Tayeb)
8. People Who Eat Darkness
9. Song Of I (Feat. Sophie Hunger)
10. Detonation
11. Song Of Unb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