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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저나무 Oct 20. 2017

베니 앤더슨│Piano

"노년의 남자, 새 피아노로 옛날 곡을 연주하다."

Benny Andersson│Piano│Deutsche Grammophon, 2017.


재해석, 번안, 리메이크, 커버 그리고 리믹스까지. 의미하는 바는 조금씩 다르지만, 기존 창작물을 그만의 방식으로 다시금 빚어내는 행위를 가리킨다. 표현만큼이나 그 의도도 다양하다. 누군가는 원작자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 누군가는 상업적 성공을 갈망하며 재해석을 시도한다. 물론 음악가 본인이 아닌 이상 그 심리를 알 길은 없다. 다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내놓는 것 이상으로 까다로운 대중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앞선 세대가 남긴 위대한 유산과 끊임없이 저울질당하며 말이다.


곡들의 핵심에 접근하고자 노력하면서 내가 깨달은 사실은
 1년 전에 작곡한 곡이든 40년 전에 작곡한 곡이든
그 껍질을 한꺼풀 벗겨 나갈 때마다
내가 음악에 더욱 가까이 다가간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 베니 앤더슨(Benny Andersson) -


하지만 지금 소개할 음반만큼은 그런 심사 기준을 접어두도록 하자. 아바(ABBA)의 명곡부터 뮤지컬 작품, 솔로 음반에 이르기까지, 베니 앤더슨의 음악 인생을 아우르는 본 음반은 서두에 언급한 어떤 단어로도 형용할 수 없다. 어느덧 일흔을 넘긴 음악가에게는 가슴 벅찬 존경도, 성공에 대한 열망도 없다. 그 무엇도 ‘재해석’하지 않는다. 다만 미처 발견하지 못한, 그러나 분명 존재한다 믿는 음악의 본질을 묵묵히 찾아갈 뿐이다. 최고의 팝 밴드에 몸 담고,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쉼 없이 건반을 두드렸던 지난날을 반추하며.


Benny Andersson - Thank You For The Music

아바의 마지막 정규 음반 수록곡이었던 "I Let The Music Speak"<Piano>의 시작을 알린다. 음악을 찬미하는 내용의 노랫말을 떠올린다면 이보다 적절한 도입부가 있을까. 세 박자 위로 전해지는 비애부터 행진곡의 경쾌함까지, 피아노가 그리는 변화무쌍한 감정선은 표현 그대로 음악이 말을 걸어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어지는 트랙은 뮤지컬 <체스(Chess)>의 넘버 "You And I"다. 남녀 주인공 복잡 미묘한 심경을 저음부와 고음부를 오가는 연주, 다채로운 곡 구성에 녹여낸 점이 인상 깊다.


아바의 명곡과 뮤지컬 <체스>의 음악은 재현과 재구축의 경계를 넘나들며 음반을 지탱하는 두 축으로 자리매김한다. "Thank You For The Music""Happy New Year"가 풍성한 코러스와 함께 전하던 에너지를 나긋한 연주로 풀어내는가 하면, "The Day Before You Came"은 신시사이저가 조성하던 스산함을 유연한 건반음으로 이어받는다. 악기 구성 너머 변하지 않는 음악의 본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명제는 이후로도 원곡의 잔망스러움을 스타카토로 재현한 "Embassy Lament", 여인을 변함없는 사랑을 두터운 저음부로 그려낸 "Anthem"등을 거치며 더욱 공고해진다.


밴드 및 오케스트라 구성이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되는 과정도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Malarskolan"에서는 원곡의 통통 튀는 매력을 고스란히 재현하면서도 섬세한 건반 터치를 통해 빈자리를 메우고, "Mountain Duet"의 강렬한 록 비트는 중간중간 수 놓인 무수한 음으로 대신한다. 베니 앤더슨의 솔로 음반에 수록된 곡은 또 어떤가. "Midnattsdans"의 포근한 관악기 선율, "Trostevisa"에서 부주키(그리스 전통악기)가 자아내던 민속 음악의 향취가 피아노 한 대로 재현되는 양상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황홀한 순간이다.


음악을 또 다른 형태의 언어라 한다면 노년의 음악가는 청자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 애초에 그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상대는 누구였을까. 음반은 암시한다. '껍질을 한꺼풀 벗겨 나'갔을 때 마주할 음악의 본질이야말로 그가 찾아 헤매던 상대였음을. 청자는 다만 그 위대한 광경을 참관할 자격을 얻었을 따름이다. 과거의 베니 앤더슨과 지금 이 순간의 베니 앤더슨이 조우하는 순간, <Piano>가 그곳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음악가: 베니 앤더슨(Benny Andersson)

음반명: Piano

발매일: 2017.10.13.

수록곡

1. I Let The Music Speak

2. You And I

3. Aldrig

4. Thank You For The Music

5. Stockholm By Night

6. Chess

7. The Day Before You Came

8. Someone Else's Story

9. Midnattsdans

10. Malarskolan

11. I Wonder (Departure)

12. Embassy Lament

13. Anthem

14. My Love, My Life

15. Mountain Duet

16. Flickornas Rum

17. Efter Regnet

18. Trostevisa

19. En Skrift I Snon

20. Happy New Year

21. I Gott Bev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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