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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말 Jan 13. 2023

가스라이팅 3부 (완)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



 상연의 그녀를 만나고 꿈이 생겼다. 가게를 키워나가서 바닷가에 큰 카페를 갖는 게 꿈이라고 한다. 세 달 전 세연 씨를 좋아하던 마음을 접으면서 의기소침해하던 그때도 나는 꿈이 뭐냐는 질문을 던졌다. 시장에서 벗어나서 좀 더 젊은 사람들이 있는 번화가에서 카페를 해볼 생각은 없는지 물었다. 직접 원두를 초이스 하고 로스팅해서 이 정도 커피맛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시장 상가에서 프랜차이즈 최저가 커피와 경쟁하고 있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조금 더 상연이 만들어내는 커피의 가치를 알아주는 곳으로 가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상연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저는 여기 있어야 해요'라고 말했다. 지금은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은혜 씨의 덕분이다. 상연은 스스로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가 사라지면 상연은 지금의 모습을 유지할까? 아니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까? 그 순간에 다다라서야 상연은 자신의 성장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상연은 그녀에게 때로는 길들여지는 것처럼, 때로는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길들여짐과 가스라이팅의 차이는 무엇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이 둘의 경계가 모호해져 나도 내 판단을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혹시 내 해석의 문제가 아닐까?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해본다.


 두 사람은 같이 살기는 했지만 결혼과는 달랐다. 월세와 생활비를 일정 비율로 공동부담하기로 하고, 각자의 수입과 지출은 각자 관리했다. 하지만 카페의 운영부터 시작된 개입은 당연하게도 상연의 수입과 지출로도 이어졌다. 상연은 가계부를 적으면서 가게의 매출/매입뿐만 아니라 모든 개인적인 지출을 그녀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녀가 상연의 가계부를 대신 적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상연의 소비에도 그녀의 가치관에 따라 변화가 생겼다. 


 상연은 새벽에 첫 버스를 타고 가게로 출근했다. 가게 오픈 전에 로스팅을 하기 위해서다. 아르바이트를 쓰지 않고 혼자 카페를 운영하면서 밤 9시가 돼야 마감을 하고 집에 갈 수 있었다. 부족한 수면으로 건강에 대한 염려가 컸다. 그래서 상연은 한 달에 8만 원 정도를 건강보조식품을 구입하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은혜 씨는 상연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 달에 200만 원 버는 사람이 8만 원짜리 건강보조식품을 먹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냐고 했다. 지금은 가게 매출이 좋지 않으니 나중에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먹으면 되기 않겠냐고 말했다. 나는 200만 원 버는 사람도 내 건강이 중요하면 충분히 8만 원을 투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지금은 가게 상황이 좋지 않고 아껴야 할 때이니 나중에 형편이 좋아지면 다시 챙겨 먹자는 말에도 수긍이 갔다. 상연은 결국 건강기능식품을 포기했다. 대신에 끊었던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상연에게 담배를 끊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 역시 흡연가이기 때문이다.


 상연의 지출에는 보험료도 있었다. 그녀는 상연이 가입한 보험이 보장이 형편없는 보험이라는 것을 이유로 해지를 권유했다. 그 보험은 어머니의 친구분 소개로 가입한 보험이라고 했다. 나는 상연이 보장내용과 해지환급금이 얼마인지 스스로 알아보길 바랐고 도움이 필요하면 전문 보험사를 소개해 주겠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어떤 이유로든 8년을 납입한 보험을 해지한다는 게 께름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연은 은혜 씨가 보험을 잘 안다고 말하며 알아보길 주저했다. 며칠 후 만난 상연에게 보험 일은 어떻게 됐는지 물어봤다. 결국 보험을 해지했다고 했다. 해지환급금은 납입한 보험료의 10% 수준이었다. 보험을 해지한 일은 보험설계사를 통해 가족들의 귀에 들어갔다. 알고 보니 그 보험은 어머니가 5년을 납입하고 상연에게 넘겨준 보험이었다. 누나는 엄마가 한 푼 두 푼 아껴서 5년이나 넣어준 보험인데 어떻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네 맘대로 보험을 해지할 수 있냐고 따졌다. 상연의 누나는 또다시 은혜 씨를 걸고넘어졌고 상연은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는 걸 인정은 했지만 사과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상연은 친구들과 계모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가 길어지면서 계비만 계속 내고 만나는 일은 없었다. 은혜 씨는 상연의 지출에 계비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상연에게 계모임을 탈퇴할 것을 권했다. 만나지도 않는 계모임에 계속 돈을 낼 필요가 있냐는 것이 이유였다. 사정이 어려우니 지금 탈퇴를 하고 나중에 다시 가입하면 되지 않겠냐고 했다. 하지만 상연은 계모임을 탈퇴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도 친구들과의 오랜 인연을 이렇게 끊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상연에게 계모임을 탈퇴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상연은 솔직하게 '계모임을 탈퇴한다고 말하는 게 쪽팔려서'라고 말했다. 나는 상연에게 '사정이 어려워지는 것은 쪽팔린 일이 아니다. 누구나 그런 상황을 겪는데 이번이 상연의 타이밍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상연은 그게 아니라.. 하고 지난 이야기를 들려줬다.


 상연은 은혜 씨가 너무 좋았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친구들은 어떻게 만난 사이인지, 어떤 사람인지 물었다. 상연은 그녀가 이혼 경험이 있는 돌싱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친구들의 반응은 예상밖이었다. 친구들은 상연에게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렸다. 특히 상연이 그녀와 같이 살 거라고 말했을 때 친구들은 미쳤다고 했다. 온갖 카더라 정보로 상연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몇몇 친구는 '두고 봐라 나중에 후회할 거다' 라며 악담까지 퍼부었다. 그런데 계모임까지 탈퇴한다고 말하면 친구들이 뭐라고 반응할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나는 상연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상연에게 그 친구들은 어떤 친구인지. 상연은 고등학교 친구들이라고 대답했다. 대화가 길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어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앉았다.


 사람들은 학교 다닐 때 만났던 사람들을 평생 동안 친구라고 부른다. 그때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친구들과 만나진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서로 우정을 느낀다. 하지만 사회로 나오면 다른 공동체가 생긴다. 이때부터는 의식하지 않으면 잘 만나 지지 않는다. 그래서 번개는 줄어들고 대신 계모임으로 형태가 바뀐다. 예전보다 자주 못 만나면서 그리운 친구들도 있고 안 봐서 편안한 친구들도 있다. 보고 싶은 친구들끼리는 계모임 말고도 소규모 만남을 따로 가진다. 나는 상연에게 친구들과 계모임을 제외하고 자주 만나는지 물었다. 상연은 가게 일 때문에 바빠서 못 만난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처럼 새벽 일찍 나오는 것도 아니고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한 달에 두 번 쉬는 날도 생겼다. 친구들과 계모임을 안 하더라도 따로 만나면 되지 않겠냐고 물었다. 모임에는 상연을 존중하지 않는 친구들도 있었기에 그들 모두와 친하게 지내려 하지 말고 좋은 친구만 골라서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상연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친구는 없는지 물어봤다. 변명으로 대답을 시작한 상연은 결국 없다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가게로 가끔 찾아오는 친구는 있다고 말했다. 그럼 그 친구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고 말했다. 알겠다고 말하는 상연의 대답에는 힘이 없었다. 우리가 코로나를 이유로 만나기 싫은 사람들과 거리 두기를 한 것처럼 상연은 가게를 이유로 친구들과 거리 두기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계모임은 상연에게 무슨 의미인 걸까? 나는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그녀와 똑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상연은 결국 계모임을 탈퇴했다. 그리고 자신이 낸 계비 64만 원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가족들에 대한 증오와는 별개로 상연은 매형에게 고마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누나와는 다르게 상연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사람이었고, 상연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의 배려 덕분에 지금까지 이자는커녕 권리금과 보증금을 거의 갚지 않고 온전히 생활비로 사용할 수 있었다. 최근 상연은 매형에게 권리금을 깎아달라고 요구했다. 권리금이 너무 높게 책정된 것 같으니 천만 원만 깎아달라고 말했다. 물론 은혜 씨의 아이디어였다. 매형은 두 가지 이유를 들어서 거절했다. 첫째, 그 당시 5,000만 원에 가게를 넘기라고 제안한 사람이 있었던걸 기억하지 않느냐고 상연에게 말했다. 매형이 카페를 운영할 당시 상연이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연은 그때의 기억을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아내의 동생이기 때문에 3,000만 원에 카페 장비들 그대로 가게를 넘겨준 것인데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둘째, 지금 상연과 누나의 사이가 이런데 권리금을 깎아주면 누나가 가만히 있겠냐는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 상연과 매형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상연은 매형의 말에 동의하며 또 한 번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며칠 전 점심시간에 카페에 들렀을 때, 상연은 궁금한 것이 있다고 했다. 상연은 다른 손님들의 눈치를 살피며 매형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누나에게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 그런데 돈을 보내야 하는 게 맞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나는 3초 간 침묵했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내 귀를 의심했다. 그녀의 입김일까?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김이 작용했길 진심으로 바랐다. 나는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장례식은 매우 중요한 자리라는 말로 입을 열었다. 나는 친구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진주까지 차를 몰고 장례식에 참석했던 일을 말해줬다. 친구 할머니의 장례식까지 챙기는 걸 유별나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장례식은 고인을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지인의 체면 때문에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더군다나 상연이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매형의 어머니 장례식이지 않은가? 어머니를 여의고 실의에 빠져있을 매형을 생각하면 무슨 생각이 드는지 물어봤다. 상연은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상연이 매형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했을까? 모르겠다. 나는 물어보지 않았다.


 상연은 나에게도 매형에게도 은혜 씨에게도 입버릇처럼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상연에게 고마움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날 이후로 상연의 고맙다는 말이 더 이상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상연은 그녀의 정신적 지배 아래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기쁨을 즐기고 있었다. 상연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걸까? 주체적인 삶을 살길 바라는 내 마음이 상연에게 부담을 주고 있었다. 상담을 요청하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상연은 스스로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주는 나의 제안들보다는 결론을 지어주는 그녀의 오더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가스라이팅이었지만 그에게는 삶의 방향이었고 희망이었다. 부디 내 생각이 틀렸기를, 악어와 악어새처럼 두 사람이 오랜 시간 함께하기를 희망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오늘도 그 카페에 간다. 나는 손님에서 관찰자로, 그리고 다시 단골손님으로 돌아왔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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