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언제 처음 정신질환에 걸렸는지 회상해 본다. 과거를 돌이켜 보는 것은 나를 이해하고 질병을 극복하는데 출발이기 때문이다. 양극성 장애로 진단을 받기 전 우울증이 먼저 시작됐다. 1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풀잎이 싱그러운 초여름, 대학교 4학년 2학기 기말고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 방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한동안 멀뚱하게 벽만을 쳐다봤다. 취업 준비를 따로 하지 않았던 나는 공식적으로 백수가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당장 내일 일어나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현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수능 점수 맞춰 들어간 대학에서 벗어나고자 편입을 했지만 또다시 원하는 대학이 아니어서 만족하지 못했다. 어리석게도 당시에는 내 실력을 인정하지 싫었고 대학이 인생 전부였다. 한 학기 휴학을 하면서까지 적응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마저도 별다른 소득 없이 아득한 미래에 대한 고독한 불안만이 엄습해올 뿐이었다. 마지막 시험이 끝나니 홀가분한 생각보다는 취업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더 컸다. 전공 공부로 취업을 못 했다는 건 어쩌면 핑계다. 그보다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대학 수준만 높이면 취업이 저절로 되는 줄 알았다. 나는 이토록 세상살이에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시험을 보고 온 날, 머릿속이 온통 하얘지고 마음은 공허했다. 순식간에 뜨겁게 활활 타오르는 강한 햇빛이 비췄고 정신이 모조리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온몸은 끈덕진 흙탕물로 뒤덮여 끝도없이 깊은 심연의 늪으로 빨려 들어갔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아무리 외쳐도 자다가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넷플릭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 정다은(박보영)이 우울증에 빠지는 장면과 비슷하게 나는 힘조차 쓰지 못했다.
그해 겨울이 돼서야 묵은 때를 씻어 냈다. 가족 손에 이끌려 동네 신경정신과 의원에서 어떤 여성과 심리 상담을 했다. 병원에 가기까지 5개월이나 되는 시간들은 하루하루가 우울했다. 눈을 뜨면 막막했고 눈을 감으면 왜 살아있는지 죄스러웠다. 차라리 큰 병에 걸려 빨리 죽고 싶었다. 그것은 치료의 방법이 있으니 교통사고가 크게 나서 즉사하고 싶었다. 자살은 어떤가, 한차례 자살시도를 했지만 남겨질 가족들이 생각나서 끝내 죽을 수 없었다. 죽지 못해 사는 삶이었다. 내가 왜 이런 생각들이 드는 건지, 여러 번 자문하기도 했지만 아직까지도 명확한 답은 알 수 없다. 조증이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면 우울증은 철저하게 나 자신을 갉아먹었다. 분명한 건 약을 먹고 상담 치료를 하니 내 기분이 놀라울 정도로 평온해졌다.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진지하게 생각했다. 결국 취업을 했고 더 이상 치료가 필요하지 않다는 의사 결정에 완치됐다고 믿었다. 그러나 우울증은 몇 년 뒤 조울증으로 진단명만 바뀐 채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혔다. 오랜 시간동안 크고 작게 또는 알게 모르게 우울증에 시달렸다.
양극성 장애는 조증 증상만 있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우울증과 공존한다. 우울증 양상은 병을 앓은 기간과 내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처음에는 자살 사고가 많이 나고 희망이 없어 매 순간이 깜깜했다면 점점 계속 졸리고 무기력하며 한없이 피곤함으로 변했다. 오늘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건망증에 걸린 듯 기억이 나지 않기도 했다. 특히나 조증 뒤에 온 우울증은 기분이 크게 고양된 만큼이나 밑으로 훅 떨어져서 이겨내는데 더 힘겨웠다.
임신기간에 심한 조증을 겪었고 출산 후에는 남편과 산후도우미님의 도움을 받으며 기분이 괜찮았다. 기분조절제를 복용했던 터라 약간은 가라앉아 아마도 경조증 상태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침에 가뿐하게 일어나 무언가를 계획하고 적극적으로 육아에 참여했다. 남편이 출근하고 산후도우미 제도가 끝나니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지독한 우울증이 찾아왔다. 내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갑자기 한 번에 다 쏟아냈다가 회복하지 못하고 완전히 고갈된 느낌이었다. 힘을 내서 아이를 돌봐야 하는 상황에 우울증이라니 아는 고통이라 더욱 눈물겨웠다.
밤잠을 자기 전에 약을 복용하고 잔다. 몇 시인지 모르지만 아직 밖은 어두운데 아기 울음소리가 들릴 듯 말 듯 한다. 새벽에 아이가 깬 것 같다. 살짝 눈을 떴다가 다시 잠을 청해본다. 남편이 나를 깨우는 소리에 아침인 것을 깨달았다. 눈을 뜨는데 눈꺼풀이 무거워 잘 떠지지 않는다. 내 몸에 누군가가 무거운 돌덩이라도 칭칭 감았나, 잠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남편은 출근시간이 임박하기까지 최대한 아이를 보고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오전 9시, 지금부터 남편이 퇴근하는 오후 6시까지 아이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 머리가 멍하지만 정신을 차리려고 애쓴다. 휴대폰으로 아이 상태를 기록하는 앱을 보면서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한다. 생후 50일도 안 된 아이는 먹고 자고 싸는 행위를 반복한다. 일정한 시간에 맞춰 분유를 타서 먹이고 수시로 기저귀를 확인해 갈아주고 하품하며 졸려 하면 재운다. 우울한 나는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육아였다. 오전 시간에는 유난히 졸려서 아이와 눈을 맞추고 놀아주며 교감하기 어려웠다.
어떤 날은 소파에 누워 가슴에 아이를 안고 있었다. 아침부터 졸리고 기운이 나지 않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겨울이었던지라 아이가 추울까봐 이불을 덮어줬다. 아이가 눈을 감은 것을 확인하고 나도 그대로 잠이 들었다. 잠시 후 아이가 깬 것도 모르고 나는 계속 자고 있었다.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 거실에 CCTV를 설치했다. 내가 우울한 걸 이미 인지하고 있던 남편은 회사에서 카메라를 확인하고 나에게 전화를 했다. “아기 깨서 움직이는데 정신 좀 차려봐.” 우울하면 사소한 것에도 예민해져서 남편의 음성이 날카롭게 들렸다. “잠깐 잔 건데 왜 그래?” “잠깐 아니야. 아기 움직이면서 이불이 얼굴 덮으려고 했어. 질식이라도 하면 어쩔라 그래?” 듣고보니 가능한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아기 돌보고 다 했어. 분유 먹이고 기저귀 갈고 엉덩이 닦아주고 옷 갈아입히고…” 화가나고 판단이 흐려져서 딴소리를 해댔다. “그건 당연한 거야. 그것도 안 하면 그건 방치지.” 할 말이 없었다. 그날 이후 남편과 함께 CCTV에 녹화된 영상을 돌려봤다. 한두 번이라고 알고 있던 내 기억과는 달리 잠인지 뭔지에 취해 힘들어하는 날이 꽤 됐다. 그때마다 아이가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나는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제3자 입장에서 바라본 우울한 내 모습은 얼어 붙을 정도로 충격이었다. 아이는 죄가 없는데 엄마로서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다. 우울증이 의지로 되는 문제가 아니기에 뭔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