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건강한 엄마라도 혼자서 아이를 양육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가 말을 하지 못하는 시절에는 상호작용이 잘되지 않아 더욱 힘들다. 주변에 도움을 받아야 정서적으로 안정적인 육아를 할 수 있다. 조울증을 앓고 있는 모든 엄마가 육아가 버거운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는 정신적으로 취약했다. CCTV를 돌려보며 상당히 당황스러웠고 이렇게 계속 지낼 수는 없었다. 아이도 나도 살얼음판 위를 건너는 것처럼 보였다. 친정엄마나 시어머니가 도와주실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남편이 퇴근하고 집에 오면 시간이 날 때마다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했다. ‘나한테 말 좀 걸어 달라고’ 매달렸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상황은 어떤지, 어떻게 해야 내가 조금이라도 나아질지에 대해 진지한 의견을 나눴다.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남편의 '육아휴직'이었다. 나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대안이었는데 남편이 고민끝에 먼저 제안을 했다. 번뜩 떠오른 바로는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말이 나왔으니 나는 남편이 육아휴직을 신청하길 간절히 바랐다.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상관없어"라는 말까지도 할만큼 내 곁에는 반드시 누군가가 있어야 하는 절실한 시기였다. 내가 기대고 싶은 사람, 오직 남편 뿐이었다. 우리가 육아휴직을 하기로 했지만 현실적으로 여러 장벽과 마주쳤다. 가장 큰 우려는 경제적인 문제였다. 외벌이 중인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면 매월 들어오는 수입이 없어진다. 약간의 모아 둔 돈을 아껴서 생활비로 써야 한다. 일상이 이전보다 팍팍해지더라도 현재 우리 가족이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에 집중하기로 했다.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다'라고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는 말한다. 한 번의 큰 행복보다 여러 번의 작은 행복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행복은 커다란 목표를 성취했을 때만 오는 거라고 여겼다. 무슨 일을 할 때 과정보다 결과에 집착했다. 달성하지 못한 결과로 인해 항상 불행하고 불안했다. 찰나의 행복을 느낄만한 마음적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면서 진정으로 행복이 주는 의미를 깨달았다. 특별하게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그저 소소하고 소박하게 남편과 아이와 함께 하루를 감사하며 보냈다. 이제서야 ‘나도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구나’를 알게 됐다. 그때의 일 년을 돌이켜보면 벅찬 감동과 기쁨으로 가득하다. 내 삶 전체를 통틀어 오래도록 기억 속에 저장하고 언제든지 꺼내보고 싶을 만큼 소중한 시간이었다. 돈을 쫓지 않으니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값진 시간을 얻었다.
남편을 처음 만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자부하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대화를 많이 하는 부부라는 것이다. 10여 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다투기도 하며 헤어질 위기도 있었다. 매번 해결되지 않을 똑같은 일로 싸우기도 하고 별거 아닌 자존심을 세우기도 했다. 때로는 씻기지 않을 수도 있는 상처를 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 앉아 이야기 하려고 노력했다. 순간 화가 나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며 진심을 담아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꾸미지 않고 최대한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말들을 천천히 이어갔다. 상대방의 말은 중간에 끊지 않고 줄곧 경청하기도 했다. 부부가 살면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지만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어땠는지를 궁리해 보는 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남편과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니 저녁에 아이를 재우고 대화를 더 자주 하게 됐다. 부부가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 부딪치지 않을까 싶겠지만 우리에게는 크게 해당되지 않았다. 그동안 남편과 했던 시시콜콜한 대화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뢰까지 차곡차곡 쌓이는 계기가 됐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드디어 빛을 발했다. 대화하는 횟수가 늘어나서 서로에 대한 믿음이 견고해졌다. 아이를 돌보는 시간에는 각자 해야 할 일들을 보완하며 차근히 해나갔다.
몇 년 전만 해도 결혼은 하되 아이는 낳고 싶지 않았다.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내가 이 결정을 해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고 조심스러웠다. 중학생이 된 이후 늘 불운하다고만 느꼈던 부정적인 내가 엄마로서 자격이 있을까 의심했다. 결혼 전, 남편에게는 아이 한 명은 낳자고 약속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움이 앞섰다. 애써 아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뤄뒀다. 아이를 가진 이유 중에 대부분은 남편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약속은 꼭 지켜야 하니까 그렇게 임신을 준비하게 됐다.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어떤 동기가 있으면 잘 변하기도 한다. 남편의 육아휴직을 통해 작디작은 생명이 차츰 사랑스럽게 다가왔다. 내 고집대로 아이를 가지지 않았더라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 같다. 물론 아이를 낳고 육아하는 과정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초반에는 정신과 육체가 고단하고 피폐했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아이가 있어 내 인생이 잃어버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에게서 나를 닮은 모습을 발견할 때면 눈물 나게 행복했고 아이의 말과 행동에서 배울 점이 많았다. 아이가 커가는 만치 어느새 나도 엄마로서 성장하고 있었다. 한 인간이 태어나 자라는 과정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는 건 나를 대단히 가슴 설레게 했다. 심적으로 편안해지니 비로소 내 중심이 아닌 아이 입장에서 육아를 할 수 있게 됐다.
육아휴직은 조울증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조울증은 대표적인 기분 장애로 주된 치료 목적은 안정적인 상태를 계속 유지시키는데 있다. 약물 복용이 우선적인 치료 방법이지만 내가 일상을 주체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환자 스스로가 치료를 위해 병을 관리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육아는 규칙적으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낮과 밤을 구분하고 성인처럼 통잠을 잔다. 엄마도 아이 수면시간에 어느 정도 맞춰진다. 밤잠을 자고 아침에 깨는 시간이 일정해진다. 육아휴직 덕분에 남편이 아이를 봐줄 수 있어서 숙면을 취했다. 낮에 혼자 아이를 돌볼 때는 정신이 없고 서툴러서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있었다. 남편과 같이 있으니 가끔 요리를 하고 식사도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남편에게 잠시 아이를 맡기고 운동도 했다. 임신을 하고 중간에 정신과 약물을 바꾸면서 살이 19kg이나 쪘는데 육아와 운동을 병행하며 원래 체중으로 돌아왔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아파트 산책을 하는 일은 우리만의 오전 루틴이 됐다. 아침에 일어나면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커피 마시러 나갈까? 오늘 날씨는 어때?”로 시작한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따사로운 햇살을 쬐는 습관으로 우울한 기분을 많이 떨쳐냈다. 육아휴직을 하는 사계절 동안 부지런히 밖에 나가 자연 풍경을 바라봤다. 육아휴직은 단지 남편과 같이 아이를 양육하는 일을 넘어 조울증 치료에도 분명 필요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