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혼자 힘으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때로는 그들의 도움과 조언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작은 인연도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삶을 살면서 많은 인연들과 만나고 헤어졌다. 임신과 출산 과정을 경험하며 맺게 된 인연들은 특별해서 유독 더 기억에 남는다.
짜꿍이는 수술을 잘 마치고 일주일 만에 퇴원했다. 얼굴살이 포동포동하게 찐 건강한 모습을 보고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학병원에서 처치하는 수술치고는 난이도가 높지 않아서 무사히 끝났다. 신경 써준 의료진에게 고마웠다. 갑작스러운 아이의 입원과 수술로 나는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며칠 동안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불면증에 시달렸다. 모유수유도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원래 먹던 기분조절제(리튬)와 항정신병약을 한시라도 빨리 복용하기로 했다. 산부인과에 입원해 있는 나를 대신해 남편이 대리처방을 받아왔다. 최근 대학병원 처방전 대리수령이 강화되어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했다. 내가 거동이 불편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진단서 등 몇 가지 구비서류를 준비했다. 신청하는 대리인으로 남편이 맞는지 몇 번을 확인받고서야 약을 처방받았다.
약을 보자마자 드디어 잠을 편히 잘 수 있다는 생각에 안심했다. 남편은 쇼핑백도 내게 건넸다. “이게 뭐야?”라는 내 물음에 열어보라며 손짓했다. 작은 선물과 함께 카드가 들어 있었다. S교수님이 직접 쓴 손편지였다. 임신기간 동안 고생하셨다며 출산을 축하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고작 대학병원에 다니는 수많은 환자 중에 한 명일 뿐이다. 그런 나에게 교수님이 선물을 주시다니 살짝 놀랐다. 교수님을 의심해서 한숨 쉬던 지난날을 되돌아 봤다. 코끝이 찡해질 만큼 감사했다. 결과적으로 건강하게 아이를 안아볼 수 있었던 건 교수님 진료 덕분이었다. 퇴원 후 나도 작게나마 보답을 드리고 싶어서 교수님을 찾았다. 오랜만에 본 것 같은 느낌이라 더 반가웠다. 교수님은 다시 한번 축하한다며 육아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용기를 주셨다. 그러나 뒤이은 말은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곧 대학병원을 퇴사해 개원한다고 하셨다.
믿고 의지했던 정신과 의사와 더 이상 상담을 받을 수 없다. 이 말이 정신질환자에게 얼마나 힘이 빠지는 일인지 어쩌면 일반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다시금 C교수님이 떠올랐다. 내게 양극성 장애 진단을 내리셨던 분이다. S교수님으로 바뀌기 전 3년 넘게 치료와 상담을 받았다. 인생이 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마다 나를 구해주고 일으켜 세워준 사람이다. 가족에게도 쉽게 꺼내지 못하는 말들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했다. 항상 어느 누구도 다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나를 지지하는 말을 해주셨다. 조울증 환자라고 해서 못하는 일은 없다며 언제나 나를 응원해 주는 말을 들려주셨다. 그때 교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C교수님에게 진료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한동안 슬픔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었다. ‘왜 저를 떠나시나요. 저는 이제 어떤 의사에게 진료를 받아야 하나요.’ 무인도에 갇혀 완전히 홀로 고립된 기분이었다. 영원히 한 의사에게만 진료를 받을 수는 없는 일인데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절망했다.
누구는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다. “다른 정신과 의사도 많잖아? 더 나은 의사가 있을 거야.” 물론 이 말도 맞다. 정신과 의사는 주변에 무수히 많고 그중에는 분명 훌륭한 의사도 있다. 또한 정신과 의사 한 명만을 맹목적으로 믿어서도 안 된다. 그렇지만 ‘나와 잘 맞는 의사’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특히나 정신과 의사와 환자, 상호 간에 신뢰 형성은 매우 중요하다. 당시만 하더라도 나에게 C교수님은 대체 불가능한 인연이었다. S교수님도 내가 입원했을 때 매일같이 병실에 오실 정도로 세심하고 배려가 넘치셨지만 처음부터 믿음이 가지는 않았다.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조금씩 맞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와 맞는 정신과 의사를 또다시 찾아 헤매는 힘든 일을 반복해야 했다. 그동안 처방받은 진료기록이 있어 대학병원에 다녔지만 아이를 양육하면서 먼 거리를 오가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집 근처에서 가까운 의원을 다니는 게 나았다. S교수님과 헤어지고 의원을 세 군데나 돌아다닌 끝에 현재의 의사를 만났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C교수님만한 분을 찾지 못했다.
아이의 대학병원 퇴원에 맞춰 산후도우미님이 집으로 오셨다. 앞으로 3주 동안 아이를 돌봐줄 예정이었다. 조리원에 갇혀 있는 것보다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편이 정신적으로 훨씬 도움이 됐다. 산후도우미님이 일대일로 꼼꼼하게 아이를 보살펴 주셨다. 나도 간간이 외출해서 산후마사지를 받으며 푹 쉬었다. 분유를 먹이는 것부터 트림시키기, 옷 입히기, 목욕하는 법 등 산후도우미님에게 신생아 양육을 제대로 배웠다. 아이는 수술을 했다는 것이 무색할 만큼 무럭무럭 잘 자라줬다.
나는 약을 복용하면서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아이를 봐야 하는 책임감으로 약간은 상기된 기분이었지만 이 정도는 괜찮았다. 낮에는 산후도우미님과 아이를 보고 저녁에는 퇴근한 남편과 같이 육아를 했다. 모든 것이 서툰 초보 엄마, 아빠지만 배운 대로 적용하려고 고군분투했다. 내가 조증 증세가 올라오는 가장 큰 원인은 수면이다. 밤에 잠을 잘 못 자면 어김없이 기분이 들뜬다. 나를 위해 남편은 새벽수유를 담당했다. 두 시간마다 새벽에 깨는 신생아를 보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엄마들이 왜 산후우울증에 걸리는지 생각해 보면 수면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는다. 잔 것도 안 잔 것도 아닌 상태로 새벽을 보내고 남편은 출근했다. 아이가 돌이 지나고 온전히 통잠을 자고 나서야 남편의 새벽도 편안해졌다. 임신하기 전 새벽수유에 대해 남편과 이야기했다. 평소 잠을 못 자면 굉장히 피곤해 하는 남편인데 도맡아 할 수 있다는 말에 믿음이 갔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아내였다면 남편이 덜 힘들었을까. 이미 대화가 끝난 주제지만 막상 그날이 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새벽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미안했다. 조울증 환자가 육아를 한다면 새벽수유는 꼭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