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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식탁/1월] '반가운 것을 기다리는 마음'

- 새마을금고 매거진 MG magazine.1월호 <국수> 

* 2023년부터 새마을금고 월간 매거진의 <인문학 식탁> 코너에 칼럼을 정기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음식 속에 문학을 녹여내어 맛 뿐만 아니라 더욱 풍성하고 깊은 의미까지 담고자 합니다.  1월호 음식 주제는 '국수' 입니다. / 푸드 칼럼니스트 이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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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금고 월간지 MG magazine.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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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 식탁 1월. >     


백석(作) 시 <국수> 속의

‘반가운 것을 기다리는 마음’     


지나간 2022년은 미련 없이 보내고, 새롭게 다가온 2023년을 반갑게 맞이하는 시기이다. 송년회와 신년회의 식탁에는 대개 화려하고 자극적인 음식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흥은 더해간다. 다들 떠들썩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지만,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다는 소리가 종종 들린다.


아마도 단순히 음식으로만 채워지지 않는 그 무언가를 놓치고 있지 않나 싶다. 나라고 그 공허한 순간을 피해갈 수 없다. 조용히 눈을 감고 마음 깊은 곳으로 한발자국씩 들어가 본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렇게 몇 발자국 걸어간 곳에 식탁이 놓여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 위에 조용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음식 하나가 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 한 그릇이다. 맑은 국물 속에 하얀 면이 정갈하게 놓여있는 국수와 대면하고 있자니, 이리저리 분주하게 뛰어다녔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아, 이제야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서서히 윤곽이 잡히기 시작한다.    


     


시인이 기다리던 국수, 백석 <국수>

백석 시인이 어릴 때의 추억을 그리워하며 쓴 작품이 있다. <국수>라는 제목의 이 시는 하얀 눈밭에서 산새와 토끼가 평화롭게 노니는 마을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시인은 자꾸만 이 아름다운 마을에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온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러면서 마치 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여기서 반가운 것이란 바로 ‘국수’를 뜻한다. 정확히 말하면 정다운 이웃과 함께 국수를 만들어 먹었던 시절을 의미한다. 시인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 뿔뿔이 흩어져버린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을 국수에 투영한 것이다. 예로부터 국수는 우리 민족과 오랫동안 함께 한 음식이었다. 서민들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고마운 음식이었으며, 좋은날 가까운 사람들과 나눠먹는 정다운 음식이었다. 한 마디로 우리에게 국수는 곧 ‘유대감’을 상징하곤 했다. 시대적인 환경과 문화적 관습으로 인해 특정 음식이 곧 하나의 정서를 반영하게 된 셈이다.


시인은 눈 내리던 겨울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국수를 만들어 먹던 추억을 떠올린다. 동시에 가난했지만 정겹게 삶아가던 모습을 그리워한다. 그러면서 이 ‘반가운 것’이 온다는 말을 마치 염원하듯 자꾸만 반복한 것이다.


요즘도 우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소박했지만 평화로운 고향에서 사람들과 즐겁게 국수를 나눠 먹었던 시인의 어린 시절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해를 거듭할수록 세상은 살기 편리해졌지만 어쩐지 마음은 반대로 흘러갈 때가 많다. 그 어떤 산해진미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느낄 때, 마음의 고향에서 먹었던 국수 한 그릇이 절실하다. 시인이 고대하며 염원하던 ‘반가운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국수, 소박하지만 결코 소박하지 않은 것.

백석의 시에서 국수를 ‘히스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극적이지 않지만 담백한 국물에서 우러나오는 향을 맡아본다. 마음 한 구석부터 조용히 스며들어와 결국 추억 속 저 어딘가에 잠들어 있던 맛을 일깨우고 만다. 화려하지만 텅 빈 음식들이 범람하는 시대에서 맑은 국물 안에 정갈하게 담긴 면발을 보고 있자니, 보이지 않는 무언의 힘이 느껴진다.


흔히 ‘진짜는 말이 없다’고 하지 않은가. 마음이 훈훈하게 데워지는 국수 한 그릇을 비우고 나면 그 어떤 화려한 요리가 부럽지 않다. 제대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과 그럴 힘이 배 저 안쪽부터 뜨끈하게 올라온다. 국수 한 그릇이 주는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입만 즐겁게 하는 현란한 맛은 일시적이지만, 국수가 주는 슴슴하고 담백한 맛이 주는 여운은 길고 오래 간다.    

  

국수에는 만드는 이의 마음이 담겨있다. 맑은 육수는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지만 결코 그 요리 과정은 단순하지 않다. 버섯, 멸치, 양파, 다시마 등 갖은 식재료를 넣고 누군가는 땀을 뻘뻘 흘리며 깊은 맛을 우려낸다. 이렇게 끓인 국수는 맑은 국물만큼이나 맑은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인심 좋던 시절에는 지나가던 걸인도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었고, 지금도 결혼식처럼 좋은 날에는 넉넉한 마음으로 축하를 더해준다.


새롭게 시작하는 한 해에는 우리의 삶 또한 국수를 대접하는 일과 같았으면 한다. 허기를 채워주는 든든함과 따스한 마음까지 담백하게 전해주는 일. 잠시 비바람을 피해 우연히 들른 곳에서 어디선가 풍기는 국수냄새에 마음 한 구석이 말랑해진 기억이 있다면, 우리는 시인처럼 다른 이에게 ‘반가운 것’을 줄 수 있는 마음의 넉넉함을 갖추고 있음을 기억하자.  / 푸드 칼럼니스트 이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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