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금고 월간 매거진의 <인문학 식탁> 코너에
칼럼을 정기 연재하고 있습니다.
음식 속에 문학을 녹여내어 맛 뿐만 아니라
더욱 풍성하고 깊은 의미까지 담고자 합니다.
9월호 음식 주제는 '장아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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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식탁>
/ 푸드 칼럼니스트 이주현
음식은 아쉬움을 넘어 얄궂으리만치 휘발성이 강하다. 아무리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만든 음식도 입 안에서 몇 번 씹고 넘기면 그 뿐이다. 더 이상 맛도 촉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신체에 영양분을 공급하며 사라지고 마는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어떤 음식은 가슴 속에 진한 여운을 남기고 간다. 차곡차곡 시간을 축적해온 장아찌는 입 안을 자극하는 강렬한 맛과 함께 어려운 시절 우리의 삶에 커다란 의미를 남긴 음식이다.
여러 문화권에서 비슷하게 존재하는 장아찌
장아찌는 ‘채소를 소금이나 간장에 절여 숙성시킨 저장식품’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한국에 장아찌가 있다면 서양에는 피클이 있다. 식초나 소금, 향신료 등에 음식을 절인 후 장기간 보관하는 방식은 대부분의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조리법이다. 같은 동양권 문화에서는 일본의 우메보시가 한국의 매실 장아찌와 비슷한 음식이라고 볼 수 있다. 매실 장아찌는 달고 시큼한 맛이 강한 반면 우메보시는 소금 덩어리처럼 아주 짠 맛이 나는 것이 차이점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도 장아찌와 김치는 둘 다 오랜 시간 숙성과정을 거치는 비슷한 음식이다. 하지만 장아찌와 김치를 가르는 기준은 발효에 있다. 발효과정을 거친 것을 김치, 그렇지 않은 것을 장아찌라 일컫는다. 여러 문화권에서 나타난 저장 음식인 피클, 우메보시, 김치, 장아찌..모두 시간의 힘이 차곡차곡 쌓여 식탁 위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는 음식들이다.
혹독한 계절을 이겨내도록 도와준 고마운 존재
장아찌는 지금은 입맛을 돋우는 별미 반찬으로 사랑 받지만, 음식이 귀했던 예전에는 부족했던 식량을 채워주던 고마운 존재였다. 사계절 구분이 뚜렷한 이 땅에서 우리 민족은 철마다 재배되는 여러 채소를 적절한 저장법으로 갈무리하여 곤궁한 시기에 대비하였다. 계절에 따라 기온의 차가 크며, 그에 따라 채소를 구하기 어려웠던지라 장아찌는 부족한 채소섭취를 위한 필수 존재였다.
특히 각 가정의 부녀자들에게 장아찌를 만드는 일은 중요한 연례행사 중 하나였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를 살펴보면 7월령에 “채소 과일 흔할 적에 저축을 많이 하소. 박·호박고지 켜고 외·가지 짜게 절여 겨울에 먹어보소. 귀물이 아니 될까.”라는 대목이 나온다. 채소가 흔하게 나오는 시기에 마치 저축하듯이 장아찌로 만들어 놓으면 겨울에 보물 같은 존재로 보답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9월령에는 “타작점심 하오리라 황계 백숙 부족할까. 새우젓 계란찌개 상찬으로 차려놓고 배춧국 무나물에 고춧잎 장아찌라. 큰 가마에 안친 밥이 태반이나 부족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고춧잎 장아찌가 가마솥을 채운 밥을 다 먹어 치울 정도로 입맛을 돋우는 기호식품으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했음을 알 수 있다. 장아찌는 이처럼 필수 음식이자 취향을 담은 별미 음식으로서 우리 조상들의 식생활에 빠질 수 없는 고마운 존재였다.
시대가 흘러 현대 사회에 진입했어도 냉장고가 보급되기 전까지는 음식을 장기간 보관하기 어려웠다. 이 때도 장아찌는 장기간 먹을 밑반찬으로 훌륭히 그 역할을 해냈다. 소싯적 어르신들의 도시락에 장아찌가 빠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런 현실을 반영한 추억이었을 것이다.
농작물 재배 기술이 발달한 요즘은 신선한 채소를 쉽게 구할 수 있다. 또한 음식과 맛의 취향이 급격하게 변화하는지라 장아찌에 대한 선호도가 상당히 낮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장아찌는 특유의 새콤달콤하게 톡 쏘는 맛으로 고유의 영역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무더운 여름철 잃어버린 입맛을 돋우는 반찬으로도 사랑받으며, 추억의 맛을 잊지 못하는가 기성세대가 즐겨 찾는 힐링 음식이기도 하다. 시간이 켜켜이 쌓인 장아찌는 쉽게 휘발되지 않는 강렬한 맛과 의미가 담겨 있다. / 푸드 칼럼니스트 이주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