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잔뜩 성났던 하늘이 모처럼 기분이 좋았나보다. 며칠 내내 먹구름 가득한 흐린 얼굴만 보여주더니 간만에 청량한 하늘이 보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귀한 날이었다. 이런 날에는 사물이 가진 본연의 색에 ‘반짝이는 날씨 필터’가 입혀진다. 뭐라 정확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차갑고 투박한 것들 위에 따듯하고 정다운 색이 덧입혀 진다고 할까. 그런 색감은 좀처럼 보기 어려운 것이기에 집에 머물러 있다가도 마음 급하게 외출 준비를 하고야 말았다.
늘 지나가던 거리도 달라지면 전혀 다른 장소처럼 느껴지게 마련이다. 자동차를 타고 가던 거리를 천천히 걸어가면 거리 곳곳에서 또 다른 낯섦을 발견하듯, 출근길 서둘러서 걸어가던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니 마치 다른 여행지에 온 것만 같다. 초록색 나뭇잎 그늘 밑에서 어린 아이가 되어 자전거 페달을 하염없이 돌려본다. 얼굴에 가볍게 부딪히는 바람이 기분 좋다.
집에 돌아오니 갑자기 허기가 밀려온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니 시원하고 든든한 밥상 한 그릇이 간절하다. 오늘 날씨에 걸맞는 ‘여름 밥상’을 차려 보기로 한다.
나는 오이 특유의 향을 좋아하지 않는다. 누군가 부엌에서 오이를 손질하고 있을라치면 거실에서부터 그 낌새를 알아차리고는 질색팔색을 한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반기는 오이 요리가 있다. 아주 차갑게 먹는 ‘냉 오이 샐러드’이다.
오이를 투박하게 짓이긴 다음에 소금을 살짝 뿌려 절인다. 물러진 오이의 수분을 제거하고 마요네즈, 설탕을 넣어 섞는다. 허니 머스터드 소스가 있다면 더 세련된 맛을 낼 수 있다. 여기에 주황색 게맛살을 넣으면 색감도 예뻐지고, 포만감도 좋아진다. 잘게 다진 양파를 넣으면 알싸하고 시원한 맛에 입 안이 개운해진다.
‘냉 오이 샐러드’는 한 번에 넉넉하게 만들어 놓으면 좋다. 냉장고에 차갑게 보관해놓고 목이 마르고 출출할 때마다 꺼내 먹으면 그만이다. 입 안에 넣는 순간 아삭한 오이의 식감과 함께 수분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시원하고 차가운 것이 입 안에 가득 찬다. 갈증으로 예민해진 몸이 기분 좋게 차분해진다. 새콤달콤한 맛이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조차도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매력적인 샐러드다. 시간이 지나면 오이에서 수분이 나와 샐러드 밑바닥에 물이 고이는데, 이를 잘 털어준 뒤에 식빵 사이에 넣으면 담백한 ‘게맛살 오이 샌드위치’가 완성된다.
수분 보충
냉 오이 샐러드
■ 필요한 재료
크래미 3개, 오이 1개, 양파 1/3개,
소스 : 마요네즈 2큰술, 허니머스터드 2작은술, 올리고당 0.5큰술, 레몬즙 약간, 소금 약간
■ 만드는 과정
1. 크래미는 결대로 찢어서 준비한다.
2. 오이는 한 입 크기로 썰은 뒤에 방망이로 가볍게 눌러 으깬다. 소금을 살짝 뿌려서 10분 뒤에 수분을 가볍게 짠다.
* 방망이로 오이를 으깨면 소스가 더 잘 스며들어 맛있다.
3. 곱게 다진 양파와 크래미, 오이, 분량의 소스를 넣고 잘 섞어 완성한다.
*chef's tip
오이 자체의 향을 살리고 싶다면 소스를 반만 넣고, 채소를 싫어하는 아이들이 있다면 달콤한 맛을 강조하여 소스를 다 넣는 것이 좋다. 양파를 너무 작게 다지는 것보다 씹는 맛이 있게 사방 0.5cm 크기로 썬다. 유독 매운맛이 강한 양파라면 찬물에 담궈 매운 맛을 뺀 뒤에 수분을 제거하여 넣도록 한다.
주먹밥은 쌀밥에 소금을 간간하게 넣어 섞고, 참치와 마요네즈 섞은 속을 듬뿍 넣어 뭉친다. 주먹밥 겉면에 간장을 살짝 넣은 계란물을 얇게 발라 팬에서 구워내면 식감이 바삭해지면서 훨씬 더 맛있다. 아까 만들어둔 ‘냉 오이 샐러드’와 함께 먹으니 찰떡궁합이다. 따듯한 주먹밥 한 입 크게 입 안에서 우물우물 씹다가, 목이 막힐 때 쯤 오이 샐러드 한 젓가락을 먹으면 차갑고 아삭한 것들이 목구멍 전체로 시원하게 내려간다.
이렇게 배부르게 여름 밥상 한 상을 다 먹고 나니 근사한 휴양지가 아니더라도 여름을 만끽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구나 싶다. 마치 여행을 온 것처럼 낯설었던 그 길이 내일 다시 출근할 때 마주치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궁금해진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온갖 것이 다 싱그럽고 반짝이는 여름 일상이다. (요리, 사진, 글 = 이주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