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도넛의 인기가 뜨겁습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컬러풀한 이색 도넛 인증샷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한창 유행중인 도넛 가게는 1시간이 넘는 대기 줄은 기본이며, 자칫 늦게 갔다가는 ‘솔드 아웃’이라는 절망적인 소식까지 맞닥뜨릴 수 있죠. 하지만 사람들은 달콤한 도넛을 먹겠다는 일념 하에 이런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내합니다. 소위 말하는 ‘도넛 핫플’이라면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긴 여정을 떠나기도 합니다. 도도한 도넛과 이에 열광하는 소비자들을 보고 있자니 ‘과연 도넛이 트렌드의 중심이기는 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요즘입니다.
도넛이 이렇게 다시 유행의 물살을 타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SNS에 최적화된 도넛의 외관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사각형 프레임 안에 담기 좋은 앙증맞은 모양,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화사해지는 알록달록한 색감까지. 먹는 것과 사진 찍는 일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요즘 젊은층에게 도넛은 더 없이 매력적인 메뉴로 다가올 것입니다.
도넛이 다시 급부상하게 된 배경으로 ‘하이틴 감성’의 귀환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하이틴 감성이란 미국 하이틴 영화에 나오는듯한 빈티지한 느낌의 감성을 말합니다. 게다가 이 영화에는 항상 간식으로 도넛이 자주 등장하는 법칙이 있죠. 최근에 이런 하이틴 감성을 추구하는 젊은층이 늘어나면서, 도넛은 더 이상 촌스러운 옛날 간식이 아닌 트렌디한 아이템이 된 것입니다. 이에 맞춰 도넛 가게는 인테리어부터 시작하여 제품 패키징까지 하이틴 감성을 듬뿍 담아 제작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말 그대로 도넛은 이제 단순히 음식을 넘어선 하나의 아이템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분야를 막론한 다양한 브랜드들이 도넛 가게와 콜라보하는 현상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트렌디한 감각이 더해진 굿즈를 도넛과 함께 판매하기도 하며, 한정 사은품으로 제공하기도 하죠. 단순히 먹는 것뿐만 아니라 가치와 경험을 소비하는 요즘 MZ세대들이 앞 다투어 도넛 가게를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요?
최근 유행하는 도넛은 대표적인 미국식 도넛입니다. 다양한 맛의 필링이 도넛 안에 터질 듯이 가득 차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도넛의 겉면에는 초콜렛이 두껍게 코팅되어 있거나 쿠키, 마시멜로우 등 갖가지 토핑이 빈틈없이 붙어 있죠. 높은 칼로리 때문에 ‘길티 플레저’의 대표 메뉴였던 도넛은 이제 칼로리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달콤한 자극이 주는 황홀함을 선택한 듯싶습니다.
어릴 때 재래시장에서 파는 ‘도나쓰’를 시작으로 도넛은 꽤나 많은 진화를 거쳐 왔습니다. 기본 도넛부터 시작하여 한 때는 건강을 생각한 웰빙 도넛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칼로리를 낮추기 위한 노력으로 담백하게 구워낸 도넛은 다소 퍽퍽한 식감에 어딘가 살짝 밍밍한 맛이 났습니다. 이도 저도 아닌 도넛이 자리를 못 잡고 있을 때쯤, 입 안에 넣자마자 몇 초 만에 녹아내리는 글레이즈 도넛이 등장합니다. 진한 달콤함이 순식간에 입 안에 퍼지는 맛을 느끼고 있자니 ‘그래, 도넛은 이 맛이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 입맛은 대체로 비슷한 법인가 봅니다. 그 이후로 도넛 시장에서는 대체로 ‘웰빙’이란 키워드 보다는 ‘극강의 달콤한 맛’에 초점을 둔 제품이 많이 출시되었습니다.
최근의 도넛은 ‘달콤한 맛’ 한 가지로 표현하기에는 그 스펙트럼이 무궁무진하게 넓어졌습니다. 오리지널 커스터드 크림은 묵직하게 단 맛을 내며, 민트 초콜렛 필링은 화사하고 향기로운 맛을 냅니다. 진한 누텔라 크림은 거침없는 단 맛으로 황홀함을 선사하고, 딸기잼이나 과일 크림이 들어간 필링은 통통 튀는 상큼한 맛을 내죠. 이 외에도 흑임자, 쑥, 떡 등을 이용한 일명 ‘레트로 풍’ 도넛이 이색 메뉴로 소비자들을 즐겁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저 달콤한 디저트라고만 한정짓기에는 이제 도넛의 세계는 너무나 깊고 다채로워졌습니다.
최근 강남역에 ‘던킨 라이브’ 플래그십 스토어가 오픈했습니다. 이전에 도넛과 커피를 판매하던 음식점과 달리 곳곳에서 특별한 요소를 찾을 수 있죠. 실력파 디자이너와 함께한 감각적인 인테리어도 볼거리 중 하나지만 압권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도넛의 반죽을 만들거나 크림을 채워 넣는 생산 과정을 직접 볼 수 있도록 방송사 스튜디오처럼 꾸민 공간인데요. 더 이상 음식점이 단순히 음식을 판매하고 먹는 고유의 기능만 수행하는 곳이 아니라, 가치와 경험을 함께 소비할 수 있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담으로, 던킨 도넛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하이틴 영화뿐만 아니라 미국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경찰과 도넛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임을 볼 수 있습니다. 잠복근무를 하거나 밤샘 수사를 하는 경찰이 한 손에는 도넛과 커피를 들고 있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죠. 이는 24시간 영업 방침을 고수하던 미국의 던킨 도넛이 심야시간에 근무하던 경찰들에게 커피와 도넛을 제공하면서 시작된 풍경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경찰은 주로 잠복근무를 하게 되면 차 안에서 삼각 김밥과 컵라면을 먹는 반면, 미국 경찰은 도넛과 커피를 먹는 셈이죠. 단순히 흘러가고 마는 유행의 일부분이 아니라, 삶의 특정 부분에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는 도넛의 위력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부분입니다.
학생 시절, 직사각형의 박스 안에 담긴 던킨 도넛은 말 그대로 ‘선물 상자’였습니다. 조심스럽게 박스를 열고나면, 도넛이 보이기도 전에 달큰한 향부터 박스 바깥으로 풀풀 풍겨져 나왔습니다. 정갈하게 줄지어서 담긴 도넛 중에서 한 개만 가만히 빼보려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결국에 곱디 고운 슈가 파우더가 여기 저기 흩날려서 어딘가에 하얀 가루를 묻히고야 마는 어린 시절이었죠.
지금은 튜브 모양의 도넛 보다는 동그란 모양의 도넛이 더욱 유행입니다. 하지만 저의 어린 시절만 해도 속이 뚫린 튜브 모양이 도넛의 정석이었습니다. 엄마가 이 도넛 하나만 사주면 그저 신이 나서 뻥 뚫린 구멍을 통해 엄마의 얼굴도 보고, 흘러가는 구름도 쫒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이 튜브 모양 도넛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못마땅하기도 했습니다. 뻥 뚫린 부분은 도넛 사장님이 몰래 먹으려고 숨겨놨던 것이 아닌지, 이 불완전한 것에 제 값을 주는 게 어쩐지 아까웠달까요.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오히려 이 뚫린 부분이 있기에 튜브 모양 도넛이 완전해진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인생 역시 이와 닮아 있다는 것을 수시로 느끼곤 하죠.
삶 역시 늘 부족한 부분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이 곳을 메우면 다시 저 곳이 뻥 뚫립니다. 다시 달려가 그 곳을 메우면 또 다른 곳이 부족해지고 말죠. 인생이란 이런 보수공사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이 상태를 불완전함으로 여긴다면 삶은 늘 부족함에 허덕일 수밖에 없을겁니다. 결국, 삶의 부족한 부분조차 하나의 온전한 형태로 인정할 때, 그때에 우리는 진정한 마음의 자유로움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굳이 그 맛을 음미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입 안에서 달콤한 맛을 와르륵 쏟아내는 도넛을 한 입 먹어 봅니다. 그리고 달콤한 맛이 사라지기 전까지 내 안의 비어 있는 부분을 잠시 동안 힘껏 품어보고 싶습니다. 하이틴 감성을 추구하며 SNS세상과 공존하는 MZ세대에게는 도넛이 트렌디함으로 다가오지만, 더 높은 연령층에게는 어릴 적의 기억과 함께 인생의 진리까지 투영하는 먹거리로 다가오는 도넛. 이래서 도넛이 유행은 유행인가 봅니다.
*이 글은 SPC매거진 2월호에 기고한 칼럼으로, 전문은 아래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