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의 아저씨 한 명쯤 괜찮지 않아요?

마흔, 불혹 말고 미혹

by 무진

“마흔의 아저씨 한 명쯤 있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작가와 함께하는 인문학식탁 참가신청서를 냈다. 작가와 저녁을 먹으며 대화하는 프로그램이다. 신청자 중 10명을 선정한다고 했다. 작가는 2018년 올해의 독립출판 1위에 선정된 ‘일간 이슬아 수필집’의 이슬아 님이다. 책을 많이 읽으면서도, 작가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느 책이든, 책을 읽으면 작가와 대화하는 기분이니까. 행사에 가지 않을 이유는 이것 말고도 많다. 평일 저녁이고, 서울에서 하고, 신청서까지 써야 하고, 책으로 이미 충분히 좋았는데 굳이 작가까지 만날 필요도 없고….


이십 대 시절과 달라졌다. 그땐 조금만 관심 가는 일이 있으면, 에너지가 쉬이 그쪽으로 모아졌다. 디지털카메라가 막 세상에 알려지던 시절. 한참 알바를 해서, 본체만 이백만 원이 넘는 전문가용 카메라를 구입했다. 어딜 가든 매일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다녔다.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하고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온라인에 사진을 올리고, 다른 사람들의 사진을 보며 온종일 사진에 빠져 지냈다. 사진만 아니라 그땐 뭐 하나에도 쉽고 깊게 빠져들었다.


취업, 연애, 결혼, 육아, 친구, 술. 소란했던 이삼십 대를 지나왔다. 마흔이 되어보니 무엇에도 열정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점점 삶이 조용해진다. 그래서 때때로 사람들은 회사에 더 푹 빠지기도 한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일찍 출근하고, 늘 사무실에서 저녁을 먹고, 취미 모임마저 사내에서 이루어지는 삶. 그 삶도 자신만의 해결 방법 이리라.


하지만 직장인이 은퇴하고 나면, 특히 남자들은 사무실 인간관계가 한 번에 끊어진다고들 한다. 실제 은퇴한 분들을 봐도 많이 그랬다. 미래에 그렇게 될 관계라면, 지금 즐겁기라도 해야 한다. 하지만 특별한 대화거리도, 함께 보내는 시간의 충만함도 없는 게 대부분이다. 그런 소주만 태우는 시간을 더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직장 내 모임 등 대부분의 관계를 정리했다. 그렇게 마련한 시간을 잘 쓰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에도 관심의 에너지가 확 쏠리지 않는다.


이대로는 삶이 그대로 머무르기만 할 뿐이다. 마흔은 불혹이라지만 미혹이 더 필요하다.


아주 작은 흥미만 생겨도 무조건 해보자는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그래서 올해 읽은 70여 권의 책 중 가장 좋았던 책. 그 책의 작가를 만나러 갈 결심을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슬아 님이 요즘 엄청 뜨거운 인기 작가라는 거다. 신청하고도 안 될까 봐 걱정됐다. 그래서 신청서 마지막에 ‘전부 젊은 여성분들일 텐데, 마흔의 아저씨 한 명쯤 괜찮지 않겠냐.’며 굽신거렸다. 전략적 굽실거림으로, 예상대로 참가자로 선정되었다. 사십 대가 되는 것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10명의 참가자는 예상대로 나 빼고 모두 여성분이었다. 식탁은 꿈을 찾는 퇴사, 비건, 결혼, 페미니즘, 동성애를 포함한 연애, 독립출판과 글쓰기 등 다양한 요즘 이야기들로 채워졌다. 내 나이와 생활 반경에서 접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기껏해야 텍스트로만 보는 내용들. 이런 다양한 이야기를 살아있는 목소리로 듣고 말하는 시간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보다 더 젊은 세대의 새롭고 다양한 목소리로 세상은 조금씩 변해가고 있구나. 그렇게 느꼈다.


이 저녁 7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오후 연차를 냈다. 그래서 서울 가는 김에 '매그넘 인 파리' 사진전을 먼저 보려 동선을 짰다. 하지만 평소 두 시간이면 서울에 도착하던 고속버스는 도로 공사 때문에 계속 도착시간이 밀리고 있었다. 사진전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버스에서 계속 고민했다. 무엇이든 해보자고 마음먹은 계획을 떠올렸다. 두 시간은 봐야 한다는 전시를 삼십 분 밖에 못 보더라도 일단 가보자 생각하고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미술관으로 향했다.


사진에 담긴 결정적 순간, 색, 구도에 매료됐다. 지나가던 옆 사람이 놀랄 만큼 종종 크게 '헉' 소리를 내며 사진을 감상했다. 이십 대 때 사진에 열정을 품었기에, 지금 나 나름대로 사진을 바라보는 눈이 생겼겠지. 그런 이십 대가 없었다면 지금 이렇게 사진을 보고 감동하지 못했겠지. 확 끌리지 않아도 해보자는 마흔의 결심을 하지 않았다면, 이 사진전을 그냥 지나쳐 카페에 앉아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겠지.


뒤돌아 볼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이. 이십 대엔 이십 대의 삶이, 사십 대엔 사십 대의 삶이 있다.




Photo by Andrew Neel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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