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8 학군 출신 교사
어렸을 때 우리 집은 가난했다. 강남 8 학군 출신이라면서 이게 무슨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 같은 헛소리인가 하겠지만, 이는 사실이다. 내가 고등학생이고 우리 언니가 대학생 때, 우리 집에는 매달 돈을 벌어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내 학원비와 언니의 대학생 학비는? 아빠 퇴직금과 마이너스 통장에서 충당했다. 그런데 어떻게 강남 8 학군 출신이 되었냐고? 지금부터 자세히 설명할 테니 잘 들어보시게나.
나는 개포동에서 정확히 17년을 살았다. 유치원생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재건축해서 철거해야 하니 나가라고 할때까지 살았다.) 지금에야 강남구 개포동은 평당 1억을 훌쩍 넘는, 유명 정치인들의 주거지로 잠실과 더불어 한국에서 알아주는 상급지이지만 내가 학생 때는 달랐다. 친구들끼리 모이면 "개포동으로 삼행시 지어볼까? 개: 개도, 포:포기한, 동:동네" 하며 깔깔거리던 곳이었다. 엘리베이터 없는 5층짜리 낡은 아파트, 잦은 누수로 천장에서는 자주 물이 떨어졌고 베란다의 천장 시멘트가 부스러져 머리 위로 툭툭 떨어졌다. 5층에 살았을 때는 72개의 계단을 올라야만 비로소 현관문을 열 수 있었다. 정수기도 없었기에 마트에서 생수라도 사는 날에는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가난했던 우리 가족도 강남에 살 수 있었다. 재건축을 코 앞에 둔 낡은 아파트는 전세가가 매우 저렴하기에.
그렇다. 우리 부모님은 그 오랜 기간을 자가 없이 전세살이만을 고집하셨고, 별다른 공부 없이 투자한 주식과 지방 아파트에서 큰 손실을 본 후로는 오로지 은행 적금과 저렴한 전셋집 살이 만으로 거센 인플레이션의 파도에 맞서셨다. 그랬기에 날이 갈수록 우리 집은 근검절약 해야 했고(화장실 물 내리는 비용이 아까워 요강을 오래도록 사용했으니 말 다했지 뭐. 2000년대의 일이다.) 그럼에도 가정 살림은 날이 갈수록 퍽퍽해졌다.
개도 포기했던 동네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분위기가 어떤지 상상이 안 될 것이다. 초6 때, 반 아이들이 시험 시간에 대놓고 서로 큰 소리로 컨닝을 하는데도 담임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리숙한 남자애를 일부러 회장으로 추천해서 표를 몰아주어 학급 회장으로 만들었다. 대놓고 야한 행동을 하고 성희롱적 말과 폭력적 언어를 서슴치 않았은 학생들이 많았다.
중학교 생활은 더욱 암울했다. 쉬는 시간이면 화장실에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짧은 흡연 후 다 같이 사이좋게 교복에 돌려 뿌리던 싸구려 향수 향에 코가 마비될 것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다. 수업 중, 어떤 학생들은 한켠에 뷰티샵을 차려 서로 화장해 주기 바빴고, 그 옆에서는 눈병이 무섭지도 않은지 하나의 컨택트 렌즈를 서로 눈을 뒤집어 까주며 돌려 끼우고 있었다. 반에 가장 영향력 있는 남학생을 기준으로 동물의 왕국 뺨치는 철저한 피라미드식 위계구조가 짜여있었고, 불쌍한 초식자 학생들은 매번 준비물과 교과서, 소지품을 빼앗겨야 했다. 소수의 학생들만 내신을 챙기고 시험공부를 했다. 초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이 점점 변해가는 모습도 충격이었다. 그들의 교복 치마는 날이 갈수록 짧아졌으며 화장은 점점 진해졌다.
이런 주위 환경에서 어린 나이에 스스로 중심을 잡고 열심히 공부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곳에서 나는 제법 공부를 잘하는 축에 속했다. 이는 전부 우리 언니 덕분인데, 우리 언니는 정말이지 대단한 사람이다.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치열하게 공부해서 중학교 때부터 이름을 날렸는데, 같은 중학교에 입학하자 선생님들은 모두 내게 "네가 OO이 동생이니?" 했을 정도였다.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쉽게 받는 성격이었던 나는 따라서 별생각 없이, 원래 학생은 시험 기간이면 저렇게 공부하는 건가 보다- 하며 언니가 공부하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익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학년 학부모들 모임에서 내가 꽤나 유명했나 보다. "엄마가 학교 모임에 한 번도 안 나오는데, 걔는 대체 누구야? 하며 베일에 감춰진 우등생으로 치맛바람 날리는 부모님들 사이에서 나에 대해 많이들 궁금해 했다고 한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내게 엄청난 행운이 찾아왔다. 강남 8 학군(대치, 도곡 등)의 유명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 것이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90퍼센트의 학생들이 진학하는 바로 옆 고등학교가 아닌, 도보로 20-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곳의 아이들은 중학교 때의 반 아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모두 착하고 친절했으며 공부도 당연히 열심히 했다. 뒤에서 등수를 세는 게 더 빠른 아이들의 최대 일탈은 주말에 독서실로 향해 그곳에서 잠을 자거나 PMP에 다운로드한 영화를 몰래 보거나, 노래방 가서 가요 부르기, 부모님 몰래 코엑스 메가박스에 가서 팝콘과 함께 영화를 보는 것이 전부였다.
당시 대한민국의 최대 유행은 '꽃보다 남자'였는데, 나는 마치 재벌들의 학교를 다니게 된 금잔디와 다름없었다. 이는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반 친구들 모두 나를 금잔디처럼 어여삐(?) 여겨주었다. 한 친구는 내게 "야, 우리 OO이, 내가 나중에 치킨집이나 하나 차려줄게!" 하며 나의 마음을 설레게 했고, 그들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낡고 낡은 개포주공의 우리 집에 초대된 한 아이는, 마치 서민의 음식-떡볶이를 처음 먹고 충격과 감격에 휩싸인 구준표처럼 다음날 학교에 가 "나 OO집 가 봤다!"라며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내었고, 또 그 소문을 들은 다른 친구들은 '대체 자신은 언제 그 집에 가 볼 수 있느냐며!' 나를 다그쳤다. 부동산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타워팰리스, 도곡렉슬 등의 으리으리한 넓은 집에 사는 아이들은, 그렇게 나를 신기해하며 친절히 잘 대해주었다.
중학교 때의 전교 등수보다는 밀려났지만, 나는 고등학교 생활이 너무 행복했다. 중학교 때와는 다르게 친구들도 제법 사귀었고, 힘들었지만 열심히 공부했고, 비록 모의고사 때만큼의 성적은 아니었지만 나름 괜찮은 수능 성적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교대에 진학했다.
서울대와 의대를 버리고..
돈 때문이었다. 우리 집에 돈이 없었다. 하루빨리 사회에 나가 돈을 벌고 싶었던 나에겐 그 당시 최선의 선택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내가 수능을 봤을 당시에도 전국의 모든 의대 정원이 다 찬 후에 서울대나 성균관대 반도체(그 당시에 졸업 후 바로 삼성전자로 입사 가능) 학과 같은 곳이 채워졌다. 그래서 공부 꽤나 한다던 이과 학생들에겐 '서울대'의 메리트가 딱히 없었다. 게다가 내가 원서 쓸 당시엔, 약대를 가기 위해선 관련 학과에 진학해서 PEET라는 시험을 봐서 합격한 후 약학전문대학에 가야만 약사가 될 수 있었다. 수능 점수로 갈 수 있는 약대와 치대 TO가 전혀 없었다. 의대 역시 MEET라는 시험 통과 후 의학전문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의 수를 제외한 정원이었기 때문에 수능 만으로 의대에 합격하기에는 정말 쉽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과는 다르게 수의대는 의학계열 학과로 아예 인정해 주지 않았다.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수의대 어때?' 하면 다들 '수의대? 시골 가서 소 진찰해 주게?' 했다.)
관련 과에 진학해 완벽에 가까운 학점을 사수한 후 PEET 시험을 응시? 아니면 '서울대'라는 직함을 얻어 남들에게 어렸을 적 공부 꽤나 했다는 부러움 얻기? 모두 내겐 사치였다. 하루 몇 만 원이 아쉬운 내겐 이러한 선택 모두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수능 성적표가 나왔을 때, 부모님과 나는 대치동의 한 입시컨설턴트를 찾았다. 당시 20분에 몇십만 원 하는 아주 고액의 상담이었다. 우리 집은 한두 푼이 매우 아쉬는 상황이었지만, 부모님께서는 고맙게도 상담 비용을 지원해 주셨다. 지금도 유튜브, 인터넷 강의에서 열심히 활동 중인 그 강사는 내 성적표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OO의대 쓰세요. 붙겠네."
몇 십만원의 비용이 무색하게 5분도 안되어서 끝난 상담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의대가 서울에 있는 의대가 아닌 지방에 있는 의대라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던 우리 언니는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재수 없이 한번에 지방 의대에 진학했다. 언니는 의전, 치전, 약전 등으로 거의 없어진 의대 정원을 허들을 당당히 넘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든 우리 집에는 매달 돈을 벌어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당시 우리 부모님은 의대 간 자식에 대한 자랑스러움 보다는 대학 학비, 생활비, 월세 등의 부담스러움이 더 커 보였다. 매일 밤 언니와 엄마는 전화로 돈 문제로 싸웠다. 부모님께서는 최소한의 비용만을 언니에게 지원해 줬고, 언니는 여러 개의 과외를 통해서 생활비를 충당했다.
17살때 부터 나는 가난한 우리집을 위해 빨리 취업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어떤 수능 점수가 나오든지 재수는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재수할 돈이 어딨어, 빨리 졸업해서 얼른 돈 벌어야지.' 그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지방 의대라... 부모님께 언니처럼 내게도 생활비와 학비를 지원해 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니 한 명 만으로도 벅찬 우리 집 사정에 나까지... 의대가 그럴 가치가 있을까?
(당연히 그럴 가치 있지 바보야..)
후회하냐고? 두 말하면 잔소리, 당연히 후회한다. 서이초 사건을 비롯해서 추락한 교권 문제로 사회가 떠들썩할 때쯤이면 더욱 더 맹열히 후회한다. 그때 어떻게 해서든, 학자금 대출을 받든, 아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서든 지방 의대를 가야 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아마 나는 그때처럼 교대를 택할 것이다.
<교대 진학의 장점_막 수능을 본 19살 과거 나의 생각>
1. 학비가 싸다.
2. 집에서 가깝다.
-자취를 안 해도 돼서 생활비가 안 든다.
3. 4년 후에 바로 돈을 번다.
4. 공무원이라서 정년까지 일할 수 있다.
-정년까지 돈 걱정 없다.
하지만 어린 과거의 나는, 교대 진학의 단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빨리 돈을 벌고자 하는 욕심에 생각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교대 진학 및 교사의 단점_11년 차 교사인 현재 나의 생각>
1. 대학 수업이 너무 재미없고 배움도 없다.
-대학에서 학문적으로 가치 있는 무언가를 배우고 싶은가? 3호선 교대역에서 환승도 하지 말기를 바란다.
2. 월급이 적은데 부업 금지다.
-대학생 때 과외로 고3 수학, 영어 수능 대비까지 해준 나로서는 아쉬울 따름이다. 초1부터 고3까지 전부 수업 가능한 육각형 교사인데..
3. 더럽고 냄새나는 화장실을 쓴다.
-어린 초등학생들은 변기에 잘 조준(?)을 못 한다. 매일 청소를 하는데도 매일 오줌 냄새가 난다. 똥을 안 내리는 경우도 태반이다.
4. 화장실을 제때 못 간다.
-수업 시간에는 당연히 못 가고, 쉬는 시간에는 학생들과 같은 화장실을 써야 해서 조금 그렇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는데, 화장실 칸 안에 들어간 나의 모습을 학생들에게 보이기 싫다.
5. 밥을 잘 못 먹는다.
-수 백명의 초등학생들이 떠드는 곳에서, 끊임없이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곳에서 밥 한술 마음 편히 뜰 수 없다. 밥 먹다가 누군가 싸우기라도 하면 밥맛이 뚝 떨어진다.
6. 교권이 계속 낮아진다.
-훈육? 훈계? 생기부조차 사실대로 쓰지 못하는데, 어떻게 감히 학생들을 지도하겠는가. 친구를 때리거나 욕하거나, 누가 봐도 교육적 지도가 필요한 상황 인데도 자꾸 눈치가 보이고 주저하게 된다.
7. 컴퓨터 사양이 낮다.
-공무원 동무들이라면 이해하리라. 공무원들은 삼성이나 엘지 같은 대기업 본체를 못 쓴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중소기업의 컴퓨터 본체를 아주 비싼 가격에 사야 한다. 중소기업을 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AS를 받아야 하는데 그 기업이 없어진 경우가 파다하다. 그리고 몇 년 이상 지난 게 아니면, 아예 전원이 켜지지 않는 수준의 고장이 아닌 이상 본체도 좀처럼 바꿔주지 않는다. 컴퓨터가 너무 느리고 렉도 잘 걸린다. 특히 성적 처리로 바쁜 학기말에는 컴퓨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의 삶에 만족한다. 뭐 어쩌겠는가. 과거의 내가 내린 선택이니 현재의 내가 책임을 져야지. 그리고 이왕 책임질 거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최근 한 뉴스에서 고3 학생이 의대와 한의대 등 여러 의학계열 학과에 합격했음에도 서울대 국어교육과에 진학하는 파격적 선택을 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기사 제목을 보자마자 난 탄식을 금치 못하였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어린 학생에게 초인적인 힘으로 텔레파시를 보내고자 노력했다. 10년, 아니 5년만 지나도 인터스텔라의 주인공 못지않은 후회를 하게 될 것인데.. 어찌하여..
아.. 님.. 부디 그 길은 가지 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