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시선 노트

스프의 맛

by 시선

내가 사용설명서를 가장 많이 읽는 제품은 단연 '라면'이다. 왜냐면 끓일 때마다 읽으니까 ㅎㅎ 미끌한 비닐에 단호히 새겨진 그 설명들은 라면회사에서 연구한 결과에 가깝게 맛 좋은 라면을 끓이게 만들어준다. 시간을 들여 나 대신 '그 라면'의 맛을 가장 효과적으로 탐구해 줬으리란 믿음이 굳건한 나는 라면을 가장 효과적으로 끓이는 방법은 조리법을 대체로 따르는 것이라고 믿는다.

조리법을 존중한다고 해서 나만의 '해석'을 통제하는 것은 아니라 한동안은 변형을 추구하고 이리저리 바꿔보았다. 이를테면 물을 올리며 바로 과립스프를 넣어 순서를 뒤집는다든지 특별한? 조합이 될 재료를 추가해 본다든지. 어떤 때에는 고구마를 넣어보기도 했고 요구르트를 넣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요구르트를 넣은 라면 맛은 정말 아니올시다였다:)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본 후로는 새우나 만두 같은 재료를 얌전히 추가해보는 것이 전부인 요즘이다. 라면 끓이는 일에 힘을 주지는 않고 있으니까.


강을 바다로 만든 듯한 국물은 견디질 못한다. 나에게는 언제나 스프, 스프의 맛이 중요했다. 색깔이 있고 냄새가 나 기호 식품 다운 특징이 핵심 가치인. 그런 내가 라면 조리법에 불평(Pain Point)이 있었던 건 바로 설명의 기준이 되는 단위 문제였다. 조리법은 당연히 1개를 끓일 때를 기준으로 물의 양을 안내해 주는 것 같지만 그게 정확히 1개 기준의 물의 양을 안내한 것인지 말로 적혀있지는 않다. 게다가 'n개 이상을 끓일 때는’ 얼마만큼의 물의 양을 더해 넣으라는 식의 설명은 전혀 없기도 하고.

나는 이럴 때가 어렵다. 추측이 사실이 맞는지 확인할 길이 없을 때. 물어보기 전에 말해주면 좋으련만. 2인분 이상을 끓일 때는 추측성으로 물을 조금 덜 넣게 되지만 '정확한 사실'을 알고 싶은 마음이 늘 마음속에 있었다. 사실대로만 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나의 변형은 사실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라면을 근거 있게 끓이고 싶은 마음이랄까.


얼마 전에는 정신줄을 놓는 바람에 짜파게티를 물 600ml를 끓인 후, 면과 (과립 스프)를 넣고 5분 더 끓이게 됐다. 짜파게티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후레이크를 넣을 타이밍에 과립스프를 실수로 넣은 것이었는데 스프가 졸여질 때까지 끓이며 얼마나 한심하게 여겼는지 모른다. 그런데 웬일일까? 국물이 열 숟가락 정도 더 많게 끓여진 짜파게티를 후루룩 톡톡 먹으며 당황하고야 말았다. 제일 맛있었다. 정말 지금까지 끓인 짜파게티보다 제일 맛있어서 속은 기분도 들었다.

'이건 뭐지? 과립스프는 물 여덟 스푼 정도만 남기고 따라 버린 후에 넣으라고 했잖아! 하란대로 안 했는데 제일 맛있잖아. 이건 뭐지!' 조리법대로 만드는 맛은 정석대로 맛있었고 변형된 맛 또한 그 나름의 좋음이 있었다. 빨간 라면은 이리저리 다르게 만들어 보았지만 짜파게티만큼은 항상 조리법 그 정석대로 만들어왔는데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 가끔 여러 분야에서 정신줄을 놓는 일이 필요할지 몰라.'라고.
그래서 자주 진지하고 깍듯해질 때마다 저 생각을 떠올려 먹는다.

라면 끓이는 시간에도 총량의 법칙이 있다면 2020년 이전에 다 써버린 것인지 이제 라면을 잘 먹지 않게 되었지만 가끔 잘 끓여진 스프의 맛이, 너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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