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럿이 함께 있을 때, 무릎 꿇고 앉으면 언제고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에이 괜찮아. 다리 펴고 편하게 앉아.” 나 좋자고 꿇은 무릎인데 예의를 차리는 줄 알고 다들 오해를 했던 거다. 어린 시절 한동안은 무릎 꿇고 앉는 게 훨씬 편했었다. 쭉 펴고 앉는 것보다. 얼마나 편했으면 좌식일 때 뿐 아니라 의자에 앉을 때에도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았었는데 언젠가부터 그러기를 그만뒀다. 신체검사 결과를 어쩌다 알게 된 날부터였던 것 같다.
첫 번째로 앉은키가 큰 아이는 우리 반에서 키가 제일 큰 육상부 친구였는데, 그다음 두 번째로 앉은키가 큰 아이가 나라는 걸 알게 된 거다. 세상에 심지어 육상부 친구와 몇 센티미터 차이도 나지 않았다. 내 앉은키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컸다. 우리 반에서 나는 키가 몇 번째로 작은 아이였는데. 이 길이를 자각하고 나서 더는 의자에 무릎 꿇고 앉을 수가 없었고 다 커서 영화관에 가게 됐을 때는 맘 편하게 허리 펴고 앉지를 못했다. 혹시나 내 뒤통수가 스크린을 가려 뒷사람이 영화를 제대로 못 보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그렇다고 뒷사람에게 매번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기요 저 때문에 스크린이 가려지는지 말해주실래요?"에이, 이 질문은 생략하고 대략 이 정도면 잘 보이겠지 하는 선에서 허리를 구부린다. 이게 습관이 돼서 더는 뒤에 누가 없는 자리에서도 허리를 구부린 채로 영화를 본 일도 더러 있었다. 아, 정말 '긴 허리 지금은 내 알 바 아니고~' 할 때는 언제 오려나.
어느 날 단점을 향해 곤두서는 맘을 내려놓으려면 단점의 장점을 발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다리가 아주 긴 남편에게 두서없이 질문을 던졌다가 대화는 싱겁게 끝이 났다.
"오빠! 숏다리의 장점이 뭐가 있을까?"
"숏다리의 장점은 허리가 긴 거야." "아니 그러니까 허리가 긴 체형의 장점을 물어본 거잖아."
"허리가 긴 체형은 허리가 잘록하고 복근이 있지."
"아니 나는 허리가 잘록하지 않고 복근이 없잖아!"
"움 너는 그냥 키가 작아."
웹 문서를 찾아보니 숏다리는 골프, 수영처럼 상체의 힘을 쓰는 스포츠에 유리한 체형으로 마이클 펠프스도 엄청난 숏다리란다. 다리가 짧으면 무게중심이 낮아져서 자세가 안정되기 때문에. 그런데 어쩐 일인지 허무한 남편과의 대화가 더 귀에 맴돌았다. "숏다리의 장점은 허리가 긴거야." "숏다리의 장점은 허리가 긴 거야." 그 말이 왠지 마음을 편하게 해줬기 때문이다. '그래, 그렇구나 하는 마음이 정신 건강에는 더 좋구나.' 게다가 뭔가 맹점을 벗어난 말 같긴 해도 틀렸다고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앉은키가 크다는 사실에 '허리가 길다'는 것보다 '다리가 짧다'는 것을 먼저 떠올리곤 했는데 그 느낌과 뉘앙스도 조금 다른 생각이었다. 매번 문제가 무엇인지 문제의 문제는 또 무엇인지 근거는 무엇이고 그 배경은 무엇인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 나에게 앉은키가 크다는 것은 매사 조심할 게 더 많은 일이었다. 짧은 다리의 장점마저 밝혀내기 힘들었으니 일부러 긍정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이 일에 깊이 있는 분석이 필요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기 시작했다. 허리가 긴 일의 장단점을 파헤치고 파헤쳐서 나에게 좋을 게 뭐람. 그냥 그렇다고 해버리면 그만인 거 아닐까?
생각난 김에 키와 앉은키를 재봤다. 남편의 키는 182cm, 앉은키는 91cm. 내 키는 159cm, 앉은키는 87cm. 헉!!! 키는 23cm 차이 나는데 앉은키는 고작 4cm 차이다. 역시나 눈이 휘둥그레지며 부정적인 생각에 빠질 것 같은 찰나. 하지만 내게는 잡념이 들기 전에 곧바로 떠올려야 할 말이 있다
"숏다리의 장점은 허리가 긴 거야." 그래, 그렇다고 해버리고 말자. 더는 파헤치지 말자. 나의 긴 무릎 위의 세계에 대하여.